소설리스트

나 빼고 다 젊은이-184화 (184/375)

나 빼고 다 젊은이 184화

제184화

갑작스러운 꽃다발에 엘리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나와 꽃다발을 번갈아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전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요."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하긴 갑자기 나타나서는 꽃다발을 들이밀었으니 그럴 만도 한가.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이거 참 민망하군.

"그게 아닐세. 꽃을 좀 봐주겠나?"

"꽃을요…?"

그녀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지나 꽃다발로 향했다.

오색찬란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을 보던 엘리스의 눈은 서서히 커졌다.

아마 알아보는 것이겠지.

헬레나의 말에 따르면 분명 알아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이건…."

엘리스는 깊어진 듯한 눈매로 꽃의 종류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로 진지하게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어떻게 오셨죠…?"

나는 엘리스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헬레나가 보내서 왔네."

"…그렇군요. 암호는 알고 계시겠죠?"

확실히 헬레나가 얘기했던 대로 조심스러운 여자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네."

아마 지금 한 말은 나를 떠보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엘리스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절 따라오셔요."

나는 그녀를 따라 홀에 있는 거대한 벽난로 앞에 섰다.

아직 한 번도 불을 피우지 않아서 그런지 벽난로는 깨끗했다.

엘리스는 벽난로에 붙어있는 종을 일정한 박자로 흔들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

뭘 하려는 것일까.

그저 호기심이 어려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유심히 지켜봤다.

엘리스는 종을 흔들고는 가만히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답신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답신이 왔다.

딸랑딸랑.

아까와는 다른 박자로 흔들리는 종.

엘리스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잠깐 뒤돌아주시겠어요?"

"음, 이렇게 해도 되나?"

나는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마치 전혀 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그 모습이 제법 웃겼는지, 엘리스가 피식 웃었다.

"뭐, 그려서도 되구요."

그녀는 내가 눈을 감는 동안 무언가를 조작하는 듯했다.

뭔가 덜컥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벽돌을 옮기는 것 같았다.

혹시 벽난로의 벽돌인가…?

"이제 뜨셔도 돼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눈을 떴다.

그러자, 별안간 벽난로의 안쪽이 드르륵- 올라가더니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하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이런 곳에다가 통로를 만들어놓긴 하던데….

사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여길 내려가셔서 끝에 다다르시면 막다른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황하지 마시고 기다리시면 문이 열리며 그분이 나타나실 거예요. 그리고 이걸 들고 가시면 넘어질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엘리스가 준 것은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조그만 등불이었다.

아무래도 마법이 걸려있는 모양이다.

솔라가 있다면 필요 없겠지만, 지금 솔라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몸이다.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곤, 곧장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둥실 떠오른 등불이 내 뒤를 따르며 길을 밝혔다.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지."

계단은 나선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마 여기가 2층이었으니, 1층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건가 보다.

마침내 바닥에 닿았을 때 보이는 것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나는 엘리스가 말해주었던 것처럼 길의 끝까지 걸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고독하게 울리는 발소리.

그리고 등불이 비춘 내 그림자뿐이었다.

마침내 엘리스가 말했던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

"…흐음. 참 복잡하게도 해놨네."

아무리 보안 때문이라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다.

무슨 꽃말대로 꽃을 사서 보안을 유지한다냐.

'영원'이라든가 '기억'이라든가 '천사'라든가.

하여튼 내가 겪어보지 못한 방법이라 그런지 조금 신선하긴 하다.

"…잠깐만."

그 순간 머릿속이 번쩍이며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퍼즐을 10년 만에 찾은 것 같은 오싹한 소름.

나는 아까 꽃말이 적힌 종이를 다시 펼쳤다.

"이거 혹시…?"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날 것 같다.

곧장 인벤토리에서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그것은 조금 빛이 바랜 오래된 편지지.

그것은 아직 뜯어지지 않은 상태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의 편지][퀘스트 아이템]

등급: 일반

아렌이라는 사람에게 남긴 사라의 편지.

"항상 빛나던 천사는 나의 기쁨이었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노라."

그것을 본 순간 처음 나온 대답은 "맙소사."였다.

마치 꼬인 실타래가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킨다.

사라의 편지와 사라 플라워즈.

이것은 그저 우연일까.

그리고 편지의 겉면에 적힌 저 문장.

그것은 아까 전 샀던 꽃말에 있던 단어들이었다.

"설마…."

드르르륵-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길을 막고 있던 벽이 서서히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벽이 올라가자, 그곳엔 귀족답지 않게 수수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아렌입니다."

* * *

백무열은 일행들과 함께 포트렌의 서쪽으로 향했다.

이곳에 모인 인원은 생각보다 많았다.

기존에 훈련소에서 만났던 일행들에 더해 오늘은 콜로세움에서 만난 미도가 함께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버프 필요하신 분 손!"

"나요! 나 좀 줘요. 누나."

미도의 손에 쥐어진 분홍색의 붓과 파레트가 움직인다.

이어서 허공에 그린 그림이 백성찬의 몸에 달라붙었다.

조그만 검을 들고 있는 분홍색 귀티 그림이었다.

"오오, 역시 대박. 근데 귀티는 좀…. 에이, 모르겠다. 먼저 가요~"

그녀는 함께 사냥하지 않고, 뒤에서 버프만 걸어주었다.

자신이 함께 파티에 꼈다가는 지금 사냥 중인 사람들이 경험치를 많이 먹지 못할 테니까.

아직은 레벨 차이가 있는 만큼 지금은 이렇게 뒤에서 버프만 걸어주는 게 제일 도와주기 쉬운 방법이었다.

뭐, 사실 이것만 해도 굉장한 거다.

아니, 이 사람들이 대단한 건가.

"하하! 몸이 엄청 가벼운걸!"

"그래. 마치 머리털이 없어진 기분이야!"

머머리와 타르모가 빨라진 속도와 함께 쥬얼 매머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창과 단검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머머리는 오른쪽 앞다리를, 타르모는 왼쪽 앞다리에 연마한 스킬들을 퍼부었다.

"일렉트릭 스피어!"

"쇼크 대거!"

두 사람은 유독 마법사 길드에서 배운 무기에 번개를 입히는 스킬에 집착했는데, 찌릿찌릿한 느낌이 온몸에 흐를 때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좋아서였다.

"좋았으! 뒷다리는 우리 묵찌빠 형제랑 성찬이가 맡는다!"

묵사발의 외침과 동시에 각자의 공격이 뒷다리에 퍼부어졌다.

백성찬과 묵사발은 오른 다리를 맡았고, 지킬과 바로크는 왼 다리를 집중공격 했다.

그들의 호흡은 생각보다 잘 맞았다.

"무열이 할아버지."

"응?"

팔짱을 낀 채 미도와 함께 관망하던 백무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는 안 나서세요?"

"난 저런 놈 정도는 쉽게 잡는다. 저놈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거지. 내가 나서면 저놈들의 실력은 금세 녹슬고 말 거다."

"아아, 하긴 그때 보여주셨던 힘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네요."

미도가 해결한 호기심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또 한 번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티원들에게 걸어준 이동속도 버프가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공중에 그려진 것은 날개가 달린 분홍색 신발이었다.

"바디 페인팅!"

그림은 흐물흐물해지며 흩어지더니, 여러 개로 나뉘어 파티원들에게 달라붙었다.

미도는 이동속도가 올랐다는 메시지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백무열 또한 흐뭇하게 웃었다.

"넌 꽤 즐거워 보이는구나."

"네. 즐거워요. 이곳에서 제 꿈을 이뤄가고 있으니까요. 제 원래 꿈이 미대를 가서 그림을 마음껏 그리는 거였거든요."

"오~ 그래?"

백무열은 미도의 눈을 한 번 보고는 자신의 팔뚝에 달라붙은 그림을 살폈다.

아까 그린 이 귀티인지 뭔지 하는 고양이도 그렇고, 지금 그린 분홍색 신발도 그렇고, 자신의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그는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미대 안 가길 잘했단 말은 하지 말아야지.'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그저 취미에 그치겠지, 하며 생각만 할 뿐.

"아 맞다. 무열이 할아버지. 검도 잘하신다고 하셨죠?"

"응? 아아, 그래. 뭐, 소싯적에 꽤 휘둘렀지."

"히히. 저도 알아요. 지금 방송에서 얼마나 난린데요."

"말도 마라. 아까 기자 놈들 때문에 빠져나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제 친구도 할아버지한테 막 사인 받아달라고 난리예요."

"그래? 크하하하! 그래. 그래. 마음껏 해주마!"

백무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사냥을 하던 일행들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정색을 하며 일행들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발사했다.

물론, 한 손에 마력 이발기가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위이이잉-!

"…버지. 할아버지!"

"응? 또 왜."

마력 진동의 소음 속에서 또 한 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백무열은 마력 이발기의 전원을 끄며 미도를 보았다.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저 검도 좀 가르쳐주세요."

"엥??"

"검도요."

"갑자기??"

"아니, 그게…."

미도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한 달 전.

그녀는 춘택이와 함께 사냥을 했다고 한다.

물론 춘택이가 한 건 아니었고, 미도가 대신 사냥을 해주며 춘택이를 키워주는 식으로.

어쨌든 그녀는 아는 사람에게 괜찮은 검을 선물 받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검을 휘둘러보고는 생각보다 좋았다고 한다.

그 뒤로도 계속 개인 방송이란 걸 하면서도 검을 썼는데 시청자들이 재능이 있다고 막 그랬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배워보고 싶어서요. 아니, 제가 휘둘러볼 테니까 재능이 있는지만 한 번 봐주시면 안 돼요?"

백무열은 미도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동자와 굳게 다물어진 입술.

그녀는 지금 진심으로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뭐 재능이 있는지 봐주는 정도야 괜찮겠지.'

사실 백무열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은 친우의 손녀라고 해서 봐주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으니까.

아마 자신이 가르친다면 미도는 힘들어서 포기할지도 몰랐다.

물론, 저기서 '쥬얼 매머드' 다리나 두들기고 있는 놈들은 자신의 시험을 훌륭히 통과한 정예 중의 정예다.

자신의 손자처럼 재능이 출중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인내심과 노력은 인정해줘야 했다.

"알았다. 어떻게 보여줄 생각이냐."

"저 매머드를 혼자 잡아볼게요. 어차피 피도 얼마 안 남았네요."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백무열이 손자인 백성찬에게 몇 마디 귓속말 말을 했다.

내용은 당연히 미도가 잡을 거니까 비키라는 것.

귓속말은 금세 전해졌는지, 일행들이 소리치며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백무열은 다시 미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비는 다 됐다."

"좋아요."

미도는 여러 말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피의 도살자'라는 검을 꺼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흉흉한 것이 여자가 들고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미도는 곧장 매머드를 향해 달렸고 제일 가까이 있는 오른쪽 앞다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허리는 옆으로 숙이고, 팔은 곧게 펴고, 검을 쥔 손에는 강한 힘을 주자 일직선의 궤적이 호선을 그리며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스으으으윽.

마치 회를 뜨는 것처럼 0.5초의 간격 차를 내며 그려진 실선.

곧장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메머드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옆으로 고꾸라졌다.

쿠우웅!

뒤에서 그 모습을 본 백무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호오."

이것 봐라?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