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79화
제179화
백무열의 일행들은 함께 관중석에서 경기를 감상했다.
커뮤니티에 따르면 16강전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1대1 대결로 진행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은 김수정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갑작스러운 데스매치 진행 방식에 각자의 방식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미친. 갑자기 이렇게 경기 방식을 바꾸는 게 어딨어? 지가 이곳의 주인이라고 막 갑질해도 되는 거야?"
"그러게요. 참가자들도 좀 당황스러울 것 같은데."
"바로크…. 걱정된다."
자칭 묵찌빠 삼형제들이 그러했고.
"저 카이단이라는 놈의 머리숱이 아주 많군."
"역시 머리숱이 많은 놈들은 줏대가 없다니까."
일명 대머리 형제라고 이름 지은 그들이 응원인지 모를 헛소리를 지껄였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걱정이 없는 것은 백무열의 손자인 백성찬이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죽지 않을걸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김수정이 묻자, 백성찬이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글에 떨어트려도 살아남으실 분이에요. 뭐, 실제로 정글 비슷한 곳에서 함께 살아보긴 했지만요."
알 수 없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도대체 백무열이라는 분과 이 손자인 백성찬은 어떤 경험을 했던 것일까.
한 번도 그들의 싸움을 본 적이 없는 김수정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경기는 9대 6의 대립 구도가 되었다.
관중석은 뜨거운 냄비처럼 들끓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누가 살아남을지 알 수가 없잖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아악! 미친!!"
"심장이 쫄깃하네. 후우."
"제발. 살아남아라. 제발. 제발."
많은 아우성들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돈을 걸고 표를 산 사람이다.
표를 사기 위한 조건이 바로 돈을 거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일행들은 모두 백무열이라는 분에게 걸었다.
"수정 씨. 아버지는 괜찮겠죠…?"
바로 옆에 앉은 최정현은 기가 질린 얼굴로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수정은 옅게 웃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저처럼 아버님께 돈을 걸지 그러셨어요."
"아, 그게…. 하하. 아직 아버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요. 제가 듣기론 시작하신지 두 달밖에 안 된 걸로 아는데…. 그럴 바엔 제가 직접 보고 겪은 무열이 삼촌을 찍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아 참.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해주실래요?"
"음~ 알겠어요. 근데 말 안 놓으실 거예요? 저보다 오빠신데."
"하하…. 천천히 놓을게요."
"…흐음. 알겠어요."
자꾸 피하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뭔가 그와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수정은 그냥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경기는 진흙탕 싸움으로 이어졌다.
대립한 그들이 맞붙으며 어마어마한 연기와 먼지가 경기장에 자욱했다.
관중석은 긴장감이 흘러넘쳤고, 안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많은 탄식이 난무하는데, 문득 저 앞에 익숙한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그는 경기장에 난입할 수 없도록 쳐진 난간을 붙잡으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영감님! 제발 이겨줘요! 내 전재산이 걸렸다고!!"
"뭐야. 쟤가 왜 저깄어?"
어젯밤 그렇게 찾았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뜬금없이 이곳에서 마주쳤다.
연녹색의 갑주를 입은 케레노스가 난간을 쾅쾅! 두드렸다.
"이겨! 이기라구요!!"
김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다가갔다.
* * *
주변은 온통 화염 투성이였다.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는데, 아직 살아 있다.
그러고 보니, 화염에 대한 내성이 100%였구나.
진짜 불행 중 다행이네.
[화염에 대한 내성이 100%입니다.]
[최상위 계열 화염입니다.]
[당신의 몸에 적응을 마친 화염이므로 데미지를 입지 않습니다.]
"…휴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화염에 대한 내성이 100%일지라도, 화염의 계급에 따라 데미지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해오름은 태양을 이용한 공격인 만큼 내성이 100%라도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물론, 전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상위 계열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해오름을 흡수해 되돌리는 저 장갑의 정체는 대체….
"…으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지금은 이 망할 놈을 공격하는 게 먼저니까.
곧장 포크 숟가락으로 휴톤의 팔 곳곳을 빠르게 찔렀다.
"음…!"
갑자기 생명력이 닳자 당황했는지, 휴톤이 재빨리 손을 뺐다.
나는 그대로 녀석을 향해 달려들며 포크 숟가락을 찔렀다.
하지만 휴톤의 몽둥이는 재빠르게 내 공격을 막아냈다.
빌어먹을 더럽게 빠르네.
"재밌군."
하나도 재밌지 않다.
휴톤이 한쪽 입꼬리를 씰룩 올리자, 나는 곧장 마력을 끓어 올렸다.
슈슈슈슛.
심장에 위치한 바람의 마력이 빠른 속도로 혈관 곳곳을 누비는 것이 느껴졌다.
아네모네를 먹으면 좀 더 위력이 올라가고 성장할 수 있겠지만, 이런 난전 속에서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다.
"내가 말했을 텐데. 그런 폭발 공격은 내겐 먹히지 않…."
[바람의 에너지가 10% 소모됩니다.]
[날카로운 바람의 예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딴 소리는 이거나 처먹고 얘기해라."
케레노스에게 배웠던 바람의 칼날이 한 손에 생겨나자, 나는 그대로 그것을 있는 힘껏 던졌다.
쒸아악-
거대한 반월의 부메랑이 허공의 잔상을 찢으며 독수리처럼 날았다.
아마 가까이서 던졌으니,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
휴톤은 잠깐 흠칫하더니, 자신의 몽둥이를 바람의 칼날에 맞댔다.
몽둥이의 가호가 걸려 있어서 잘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노리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음…!"
단 한 번의 몽둥이질에 손쉽게 흩어져 버린 바람의 칼날은 그대로 여러 개의 칼날로 나뉘더니, 그대로 휴톤의 몸 곳곳에 생채기를 입혔다.
그의 팔, 다리, 가슴에 바람의 상흔이 새겨졌다.
내가 노린 것은 바람의 독특한 성질 변화.
예전에 지그마로 변신했을 때, 실피드 기사단 중 한 놈이 이런 비슷한 공격을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바람 고유의 성질 변화였다.
"큭…. 이런 잔챙이 같은 기술을 쓰다니."
휴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내 얼굴도 그리 좋지는 않다.
피가 제법 많이 닳을 줄 알았는데, 별로 안 닳았다.
제길. 괜히 녀석의 화만 키운 셈이 되었군.
이 녀석이랑은 상성이 너무 안 좋은데….
그때,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곰 같은 덩치의 우람한 체격과 희끄무레한 흰 머리.
짙은 흑색의 목검을 쥔 노인이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돌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백무열이 말했다.
"여긴 내가 맡지."
"너…."
녀석이 걸어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피떡이 되어 장외로 떨어진 두 명의 거한 누워있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4조의 참가자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무열은 순식간에 저 두 사람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장외로 날려버렸다.
진짜 헛웃음 밖에 안 나오는군.
어째 저놈의 전성기 시절보다 더 쎈 거 같은데.
"맡겨도 되겠냐?"
그런 내 말에 백무열이 두둑하며 어깨를 풀었다.
"글쎄. 해보지 뭐."
"……."
나는 말 없이 백무열의 등을 바라봤다.
그리고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검에 붙어있는 시든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력 발아."
[비전 스킬, '마력 발아'를 사용합니다!]
[소량의 자연 에너지가 시든 꽃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백무열의 목검에 붙어있던 시든 꽃들이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았다.
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오?"
"지금은 내가 해줄 게 이거밖에 없다."
나는 녀석에게 미리 만들어둔 조그만 식량을 몇 개 나누어 주었다.
날씨 요리술의 효과가 들어가 있으니, 아마 약간의 버프는 될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충분하다. 효과 좋네."
"부탁한다."
"그래. 미도나 좀 도와줘라."
"아차, 그렇지."
곧장 고개를 돌리니, 미도를 포함한 호랑말코들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때 그 망할 삐에로 놈과 다른 녀석의 협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김현우는 방패를 든 채 우두커니 거대한 보호막으로 방어만 하는 상황.
나는 곧장 그곳을 향해 달렸다.
멀어지는 백무열과 휴톤의 대화가 초감각을 통해 귓가로 들려왔다.
"하하, 또 만났네."
"그래. 기다려줘서 고맙다."
"그때 못 냈던 승부를 다시 가려보자고."
"바라던 바다."
쿠우우웅!
엄청난 힘의 격돌이 또 한 번 먼지를 일으켰다.
* * *
"현우 오빠. 좀만 더 힘내요!"
난전이 시작되자마자, 김현우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번에 자신들을 괴롭혔던 그 삐에로 유저가 다시 한번 공세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매드독.
아까 이름을 적어 넣을 때 알게 되었다.
이어서 나타난 것은 대검을 든 남자.
그의 이름은 델라이로 무거운 중갑옷과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전사 클래스를 가진 유저였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의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
매드독의 단검에 있는 맹독은 자신들에게 상극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직업은 그야말로 PK에 최적화된 클래스같이 보였다.
그리고 델라이가 입고 있는 갑옷.
저것은 한동안 아.스.라 커뮤니티에서 오르내렸던 '지치지 않는 신념의 갑옷'이었다.
오르카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브륜힐트가 입었고, 드워프의 축복이 부가되어 엄청난 옵션이 붙어버린 갑옷.
김현우는 입이 닳도록 저것을 갖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었다.
근데 저걸 산 사람이 지금 눈앞에 이렇게 버젓이 있을 줄이야.
"기사의 긍지!"
"제길. 빛의 방패!"
김현우가 이를 악물며 방패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성스러운 빛의 가호가 담긴 거대한 보호막이 자신과 박태현을 보호했다.
'크윽. 이대론 얼마 버티지 못해. 마력이 떨어져가는데.'
맹독이 묻은 단검이야 보호막으로 튕겨낼 수 있겠지만, 저 델라이의 스킬은 얘기가 다르다.
저 갑옷에 붙어있는 스킬이었던 기사의 긍지.
베일에 싸여져 있던 그 스킬의 정체는 바로 기사가 가진 긍지를 그대로 검기에 담아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공격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제길. 박태현! 어떻게 좀 해봐!"
"이씨. 나도 피하기 바쁘다고! 저 망할 삐에로 좀 어떻게 해봐!"
매드독은 보호막을 뚫는 것을 포기했는지, 밖으로 나온 박태현만을 집중 공격했다.
그가 우리에게 응어리진 것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델라이가 이러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저기 있는 다크 울프로 알고 있는데….
"크윽. 델라이. 당신은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죠? 다크 울프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닌가요?"
델라이가 피식 웃었다.
"그냥 내 스킬을 마음껏 시험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네가 탱커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이카루스의 김현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말이 안 되진 않아. 난 지금 와 있는 기자들에게 나의 가공할 힘을 보일 생각이거든. 어디 나의 긍지를 더 받아보라구. 하하."
델라이의 대검에 깃든 기사의 긍지가 더욱 길어졌다.
그것은 마치 거인이 쓰는 검처럼 보였다.
그가 이번엔 검기를 날리지 않고, 직접 대검을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저걸 맞는 다면 이제 빛의 방패는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거기까지."
"……?"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넌 죽는다."
가면을 쓴 남자가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바로 다크 울프.
김현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