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75화
제175화
자욱한 안개.
흡사 천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꽃밭.
그리고 그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상큼한 온천의 향은 미도의 몸과 마음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도 자유로움을 느꼈다.
"아~ 진짜 좋다~"
팔을 타고 흐르는 향긋한 온천수.
그녀는 현실에서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게임 속에서 마음껏 누렸다.
지금 이 넓은 온천엔 오직 미도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좋았다.
마치 부자가 되어 온천을 통째로 산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역시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되는 거 같네."
그렇게 또 자신만의 철학을 되새긴 미도는 눈을 감으며 오늘 있었던 하루를 떠올렸다.
이카루스 길드원들을 만났고, 오빠들과 함께 콜로세움에 들어왔다.
늘 있었던 일처럼 투닥거렸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이곳에서는 마음껏 할 수 있었으니까.
"교수님이 내주신 숙제 때문에 콜로세움에 신청하긴 했는데…."
성좌들의 능력을 알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스타 프루츠를 먹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스타 프루츠 능력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아까 1조에 견소룡이라는 8인의 초신성 중 한 명이 있었지만, 어디 능력을 물어본다고 쉽게 알려주겠냐고.
그건 그들에겐 기밀이나 다름없었다.
"하아…. 결국 내가 스타 프루츠를 먹는 방법밖에 없겠지?"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쟁쟁한 강자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우승 후보로 꼽히는 것은 단연 두 사람.
제우스 길드의 라인하르트와 8인의 초신성 중 한 명인 견소룡.
그리고 아까 자신들을 공격했던 미치광이 삐에로도 굉장한 강자처럼 보였다.
꽤 강하다고 자부했던 오빠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
"…나쁜 새끼. 정혁이 오빠를 로그아웃시키다니. 복수할 테다."
그리고 미도가 눈여겨보는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다크울프 님…."
커뮤니티에선 그렇게 불리지만, 실제 게임 아이디는 '잭슨'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미도는 아까 전 있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미치광이 삐에로에게 당하려던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거미줄 뭉치가 삐에로를 덮치더니 자신을 구했다.
전에 봤을 때는 못 봤던 능력인데, 아무래도 그는 한층 더 강해진 듯 보였다.
"대체 정체가 뭘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랭킹 1위인 마이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신흥 강자로 당당하게 유저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에는 촌장으로 임명되며 '메테우스'라는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이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콜로세움 끝나면 놀러 가봐야겠다.
[귓속말이 도착하였습니다.]
"음? 누구지?"
갑자기 도착한 귓속말에 미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보낼 사람이 누군가 싶어서.
그녀는 곧장 창을 열었다.
- 김현우: 미도야. 너 혹시 다크 울프랑 아는 사이니?
- 미도: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 김현우: 아, 아니구나…. 아니야. 신경쓰지 마.
그렇게 말한 김현우는 먼저 귓속말 창을 닫고 나갔다.
미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 오빠는 갑자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우선은 이 온천을 좀 더 즐기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다.
다크울프. 다크울프….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나지 않는다.
왜 내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던 걸까.
"아악~ 왜 현우 오빠는 내게 이런 의문을 남긴 거야."
미도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온천수에 머리를 담갔다.
그리고 샴푸광고처럼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찬란한 별들이 꼭대기에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가 대단하네.
"하아. 피곤해. 그냥 내일 직접 물어봐야겠다."
미도는 온천수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 * *
[호시탐탐 영사기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탕에서 나오자마자, 아까 그 망할 놈들이 놓고 간 것을 떼어냈다.
그리고 곧장 정보창을 열었다.
[호시탐탐 영사기]
등급: 고급
파르타 공국의 수만 가지 발명품 중 하나. 크기는 사과처럼 생겼지만, 그 속은 굉장히 정교한 마도 공학의 정수가 깃들었다.
-5분간 영사기의 빛을 벽에 비추면 벽 너머를 볼 수 있다.
-단, 상대방은 이곳을 볼 수 없다.
-부가 옵션: 3D 음질. 서라운드 기능.
-주인과 거리가 멀어지면 자동으로 꺼집니다.
-현재 등록된 주인: '박태현'
"…미친놈들."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호시탐탐이라니.
성능을 보니 기가 찬다.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미도가 곤란할 뻔했다.
후우. 이 썩을 놈들을 죽였어야 했나.
약간의 후회가 들었지만, 미련을 갖기 않기로 했다.
앞으로 기회는 많을 테니까.
"일단 돌아가야겠군."
아까 산 비누는 큰 수건에 몽땅 싸서 둘러멨다.
돌아가는 길에 라인하르트는 뭐하나 싶어서 봤는데, 녀석은 사람들이 제일 많았던 탕에서 홀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성격이 호탕하고 생각이 없는 놈으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저런 진중한 면도 있구만.
근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 거지?
부르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으으음."
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니 라인하르트가 들어간 탕에서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보글보글 거리는 게 심상치 않다.
나는 설마 하는 예감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똥을 싸라. 똥을…."
저러니 사람들이 없던 거였다.
아니, 도망간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온천을 나왔다.
빠른 속도로 장비를 갖춰 입고, 옥상으로 향했다.
아직 약속 시간은 이르지만, 무열이 놈은 일찍 나와 있을 것이다.
녀석은 항상 그랬었으니까.
끼이익-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역시나 백무열.
"일찍 오는 건 여전하구만."
"…네가 늦는 것도 여전하고."
백무열은 심통이 난 듯 보였다.
이 녀석은 삐지면 늘 이런 표정이다.
이거 꽤 단단히 삐진 모양인데.
"화났냐?"
"…말 걸지 마라."
"화났구먼."
곧장 망우초 담배를 꺼내 불을 피웠다.
솔라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간단하게 불 뿜기 스킬을 사용했다.
백무열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녀석은 눈앞에서 담배를 든 채, 검지와 엄지를 문질렀다.
아, 불이 없구나.
이 녀석은 내가 없으면 담배를 못 핀다.
화르륵.
입에서 뻗어 나간 불이 손쉽게 백무열의 담배에 붙었다.
우리들은 서로의 연기를 내뿜으며 야경을 감상했다.
생각보다 경치가 끝내준다.
"캬. 바로 이 맛이지."
백무열이 작게 감탄했다.
"그렇게 좋냐?"
"당연히 좋지. 현실에선 건강 때문에 끊었던 건데. 넌 아직도 피지 않냐?"
"뭐, 그랬는데. 나도 요새 게임 하느라 많이 못 피웠네. 허허."
"여기선 마음껏 펴도 건강에 이상이 없으니까. 그게 좋네."
우리들은 한 모금 더 담배를 빨았다.
짙은 니코틴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러고 보면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느껴보는 담배 맛이다.
그동안 내가 꽤 많이 바빴었구나….
"야, 춘택아. 넌 그동안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냐?"
백무열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떻게 지내 왔냐라….
그러고 보면 그동안 누구에게도 내가 이곳에서 뭐하고 지냈는지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한 적이 없었다.
했더라도 깊은 얘기는 하지 못했지.
나는 그저 담뱃재를 털었다.
"……."
"왜 얘기하기 싫냐?"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우리 사이에 숨길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겐 무려 4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무열이 놈이 평소에는 입이 가벼워도, 비밀에 관해서는 입이 꽤 무거운 편이니 괜찮겠지.
"후우. 어디 보자. 내가 처음 시작했던 게…."
망연하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나는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곧장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 위에서 엄청난 말들을 많이 쏟아냈다.
처음 내가 이 게임을 시작한 이유.
그리고 튜토리얼에서 겪었던 기상천외한 일.
날씨 요리사가 되었고, 알렉서스의 뒤를 잇게 된 일.
그리고 플로라와 아이올로스를 만났고, 윈디아에서 겪은 오크들의 난동과 북극에서 있었던 일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했다.
백무열은 놀람과 감탄을 반복했고 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너무나 방대한 이야기인지라,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속 시원하게 털어내고 나니 확실히 기분은 좋은 것 같다.
"아차, 그걸 못 물어봤구나."
내 이야기만 쏟아내느라, 정작 무열이 놈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제일 궁금했던 건 어떻게 헤라클래스에게 힘을 전수 받았냐 하는 것이었는데….
"뭐, 시간 많으니까. 내일 물어봐도 되겠지."
오랜만에 담배를 펴서 그런지 가래가 낀다.
헛기침을 한 나는 곧장 팔을 휘휘 돌리며 창가에 섰다.
오늘 밤은 만월인지 보름달이다.
아래로는 포트렌의 많은 야경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깐 사색에 잠겼다.
그때, 입구 밖으로 웬 일행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음? 저놈들은…."
일행들의 정체는 바로 콜로세움에서 만났던 16강 진출자들이었다.
전부는 아니고, 몇몇이 빠져있었다.
대략 9명인가?
아무튼 그들은 한밤중에 누군가의 인도 아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엔 같은 조였던 마법사 놈과 대검을 든 놈도 있었다.
- 잭슨: 야. 소룡아. 혹시 밖에 콜로세움 선수들 어디로 이동하는데 뭐 아는 거 있냐?
- 견소룡: 글쎄요? 전 지금 뒷산에서 수련 중이었습니다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하여간 이놈 머릿속엔 오직 수련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알려나.
"…아무도 모르겠네."
백무열은 나와 함께 있었다.
견소룡은 수련을 했고, 그렇다고 라인하르트가 알 것 같지도 않다.
그놈 또한 바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쯧. 어째 도움 되는 놈들이 없냐."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보름달로 시선을 옮겼다.
뭐, 어차피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경기는 내일 낮 12시.
그때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다.
혹시 추가 전달사항 같은 것이 있으면 관계자가 알려줄 테지.
"…근데 저건 또 뭐지."
별안간 보름달을 등지고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조그만 새였는데,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뭐야, 메테우스에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길 어떻게…?
"구루우우욱-!"
이름 없는 레추자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 말 그대로 질주.
눈앞에 있는 창문을 뚫을 기세로 녀석은 멋지게 날아왔다.
나는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얼어버리고 말았다.
100미터.
50미터.
20미터를 넘어 5미터.
그리고 여기. 1미….
퍼억-!
"……."
레추자가 눈앞의 창문을 뚫지 못한 채 미끄러졌다.
구슬픈 레추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 구룩."
얘, 고장 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