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72화
제172화
백무열은 어안이 벙벙했다.
몽둥이를 좋아하는 성좌.
이 망할 놈이 난데없이 경기 중에 메시지를 보내놓고는 자신에게 퀘스트를 맡겨버렸다.
그것도 거의 반강제로.
그리고는 저기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는 녀석도 힘을 발산하더니, 자신과 같은 힘을 내보였다.
물론 흥미로운 상황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허공에 무언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허허.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로고."
아크스타를 시작한 이후로 언제 가장 신비로웠냐고 묻는다면 단연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젊은이들이 싸우는 걸 본 건 지금이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보통은 일행들을 이끌고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이나, 던전.
아니면 보스 몬스터를 때려잡곤 했었다.
정현이 녀석이 그렇게 해야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벨업이 빠른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우리들 중 마법사는 없었기에 이렇게 화려한 경관을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슈우우욱.
허공에 만들어진 사자 가죽을 쓴 남자의 형상은 이내 흩어지더니, 두 개로 나뉘어 하나는 자신에게 깃들었다.
당연히 남은 하나는 저 빡빡이 녀석.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들의 건투를 빕니다.]
"방금 나타난 건 이 녀석인가."
진짜 무슨 신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이거 재밌군.
"뭐, 뭐야. 방금 그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까 그거 신 아니야?"
남은 경기의 참가자들은 자신과 빡빡이 사이에서 우왕좌왕 거리고 있었다.
하긴 좀 갑작스러웠으니 당황스러울 법도 하다.
백무열은 저 멀리 있는 빡빡이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각자의 몽둥이를 쥐고서.
쿠구구구구.
발걸음만 떼었는데도 서로의 기운이 만들어낸 힘은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것은 파동의 형태를 띄며 가운데 있는 참가자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무열은 발걸음을 옮겼다.
건녀편의 빡빡이도 마찬가지.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넌 이름이 뭐지?"
"크하하하. 마음에 드는군. 휴톤이라고 한다!"
"…그렇군. 난 백무열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알겠지?"
"하하하! 말이 잘 통해서 좋군. 난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
"동감이다."
드드드드.
힘을 끌어올리자, 바닥이 진동한다.
주변은 황금색의 스파크가 요동쳤고, 참가자들은 지진을 피해 구석으로 도망쳤다.
어느새 경기는 자신과 휴톤의 정면대결 구도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우선 가볍게 맞대볼까.'
먼저 검을 뽑은 것은 백무열이었다.
콰아아앙!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
자신과 휴톤은 엄청난 몽둥이를 맞대며 서로의 힘을 가늠했다.
과연 엄청난 힘이다.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들의 대결을 기대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이제 탐색전은 그만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
백무열은 빠른 속도로 목검을 휘둘렀다.
휴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빠른 속도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크기의 차이는 엄청났지만, 속도의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녀석과는 레벨의 차이가 있었다.
'으윽. 애초에 힘에서 밀리는군.'
기술적인 면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계속 이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수비만 취하다가 빈틈을 노리는 공격을 해야 할 것 같다.
백무열은 이를 악물었고, 서로의 몽둥이가 부딪힐 때마다 작은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경기장 전체로 퍼져나가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쾅. 쾅. 콰콰쾅.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였을까.
-겨, 경기 종료! 경기 끝났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무열과 휴톤은 서로의 몽둥이질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우뚝선 채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이런. 쯧."
"하하. 아쉽게 되었군."
우리가 내뿜는 힘의 파동에 구경하던 참가자 중 몇몇이 장외로 나가고 말았다.
백무열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지."
"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좋수다!"
백무열은 그렇게 아쉬움이 남는 작별을 남겼다.
하지만 이놈은 아닌 모양이다.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미간을 찌푸립니다.]
* * *
"우와아아아악!! 대박!!!!!"
경악이 뒤섞인 미도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울린다.
그만큼 방금 전의 경기는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아니, 무슨 몽둥이질 몇 번했다고 무대의 절반 이상이 부서지냐.
미친.
"형님. 저 꼭 저분이랑 붙어보고 싶습니다."
견소룡은 이미 양손의 주먹을 쥐며 전투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싸우면 이곳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였다.
"시끄럽다. 일단 저놈은 내가 먼저 만날 거다. 뭐, 너네가 인연이면 나중에 경기에서도 만나겄지."
"그 말도 맞습니다. 하하."
나는 다시 무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마침 4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대기실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침을 꼴깍 삼킨 채 그들이 오는 것을 봤다.
물론, 나는 한 녀석만 보고 있다.
약간의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백무열.
나는 녀석의 건너편에 마주 섰다.
"음…?"
백무열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녀석에게 말했다.
"춘택이다. 썩을 놈아."
"아? 크하하하! 너 춘…!"
퓨웃.
곧장 손목에서 발사된 거미줄로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이놈은 이렇게 선수를 쳐두지 않으면 내 정체를 온 동네방네에 까발려버릴 녀석이다.
나는 그대로 백무열을 거미줄로 칭칭 감은 채, 으슥진 골목으로 데려왔다.
이건 뭐 거의 납치네.
"무열아."
"으으읍!"
백무열이 노기어린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 이러니까 좀 미안해지긴 한다.
하지만 아직 입을 풀어줄 순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나는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백무열의 입에 붙은 거미줄을 떼주었다.
녀석은 "에이 시부럴 놈."이라든가.
"퉤퉤."를 몇 번 반복하며 입 주변을 슥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쯧. 어쨌든 반갑다. 춘택아."
갑자기 백무열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놈이 왜 이러지.
생전 안하던 포옹을 다하고.
"너 무슨 일 있냐? 갑자기 왠 포옹이여."
백무열은 포옹을 풀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별일은 무슨. 크하하하! 그냥 이렇게 새로운 세상에서 봤으니, 기념으로 한번 해본 거지!"
아, 그런 뜻이었구만.
"싱겁긴 쯧."
우리 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더 주고받았다.
백무열이 처음 아크스타를 시작한 것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둘째인 정현이 녀석을 만났고, 손자인 백성찬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까지.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녀석도 재밌게 즐기고 있었다.
"무열아. 너 근데 그 몽둥이의 가호는 어떻게…."
"아, 그거? 하하! 그건 말이지…!"
"아, 여기 계셨네. 무열이 할아버지!"
백무열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도였다.
"오, 미도야! 오랜만이구나! 하하하!"
백무열과 미도는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미도는 어렸을 때부터 무열이 녀석을 좋아했었다.
뭐, 조금 질투는 나지만, 그래도 나를 더 좋아할 거다.
아마도.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네! 무열이 할아버지도 엄청 잘 지내신 것 같은데요?! 경기 봤어요! 어쩜 그렇게 강하세요?! 짱!"
왠지 나만 가면을 쓰고 있으니 무안해진다.
미도는 아직 내 정체를 모르니까.
하아, 이거 참 난감하네.
가면을 벗으면 내 아이디가 드러난다.
그럼 사람들은 내 정체를 알게 될 것이고, 소문은 금세 퍼져나가 기자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아마 다음날 방송에도 대문짝만하게 나가겠지.
난 그게 싫은 것이다.
"하하. 내가 손자 녀석한테 검도도 가르치잖냐. 그거로 어떻게든 한 거지 뭐."
"오오오~! 짱짱!"
미도가 백무열을 향해 양 엄지를 추켜세웠다.
"아! 다크 울프님도 계셨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두 분 아는 사이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난감하군.
뭐라고 말해야 되지.
"뭐, 그냥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하하!"
별안간 무열이 녀석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눈치가 없지는 않다.
역시 이 녀석에게 미도와 내 관계를 얘기해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 그랬구나. 아, 참 우리 할아버지도 이 게임 하고 계신 거 아세요?"
"아~ 그래~?"
백무열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다.
저 썩을 놈이 또 장난기가 발동했구만.
"몰랐구나. 허허허."
쯧.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안내 말씀드립니다. 콜로세움의 16강전은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참가자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맞다. 원래 콜로세움의 본선은 내일부터 시작한다고 해요. 우리 얼른 숙소로 가요!"
미도가 백무열에게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 예. 예…."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입꼬리가 뒤틀렸다.
"원래 저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했는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마침 벽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을 기다리던 견소룡이 걸어왔다.
"꿩대신 닭이라고, 저라도 팔짱 껴드릴까요?"
"…죽을래?"
* * *
조금씩 저무는 노을.
무역도시 포트렌은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지만, 노을 또한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바다를 끼고 있었기에 이곳은 아름다운 해돋이나 노을에 물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최불룡은 마침 항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젠장. 백무열 그 영감탱이는 또 어떻게 이 게임을 시작했지."
아까 마주쳤을 때는 진짜 오금이 저리는 줄 알았다.
그 영감탱이가 지금은 은퇴를 했기에 망정이지.
한 2년 전에 마주쳤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싸움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성격이 많이 죽었다.
뭐, 대신에 '마석두'라는 놈이 3대 회장을 맡고 있지만.
"에이씨, 요즘 마가 꼈나."
최불룡은 진지하게 점이나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콜로세움을 빠져나온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에이단의 저택.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잘 돼야 할 텐데."
아까 콜로세움에서 이프리트의 팔찌를 뺏어간 그 영감탱이를 보는 순간.
최불룡은 바로 이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새삼 자신의 머리가 이렇게 좋았나 싶기도 하다.
그는 양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찰싹 때렸다.
짝짝.
어우 아파라.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최불룡은 비장한 얼굴로 저택으로 들어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