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71화
제171화
처음에 들었던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저 썩을 놈이 언제 캡슐을 사서 이렇게 나타났나 싶어서.
그리고 이어지는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백무열은 달려드는 3명의 참가자를 가볍게 농락했다.
그것도 목검은 쓰지도 않은 채로.
"허허. 미친놈일세."
옛날부터 목검을 든 모습만 봐서 그런지 거의 수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녀석의 손에 쥐어진 것은 웬 꽃다발 하나와 이상한 바리깡 하나였다.
지금 나는 그게 의문이다.
"목검은 어디다 버린 게야?"
저놈이 안 어울리게 '꽃꽂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다.
뭐, 녀석의 선택이니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저 모습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설마 꽃집 할아버지로 전직한 건 아니겠지?
-덤벼라. 이 허접쓰레기들아. 한 수 가르쳐주마.
쿠구구구.
땅을 울리는 진동.
중앙에 있는 백무열의 주위로 거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순간 너무 놀라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아니, 저놈이 어떻게 이런 힘을…?
곧장 초감각을 집중해 녀석을 훑었다.
힘의 파동이 터져 나오는 곳은 녀석이 들고 있는 꽃다발.
그것은 이내 황금빛 오오라에 휘감겼고, 힘의 파동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 기이한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평범한 꽃집 할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앞에 '미친'이라는 단어를 붙여야할 것 같은데.
-간다.
먼저 움직인 것은 백무열이었다.
뛰어간 곳은 경기장의 구석.
녀석은 제일 가까이 있던 참가자 중 한 명과 검을….
아니, 꽃다발을 부딪쳤다.
그런데 조금 놀랍다.
"아니, 무슨 꽃다발이 검이랑 부딪혔는데 꺾이질 않냐."
강한 의문에 다시 녀석의 꽃다발을 살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안에 검은색 목검이 숨겨져 있다.
"그럼 그렇지. 저놈이 목검을 놓을 리가 있나."
백무열은 빠른 속도로 목검을 휘둘렀다.
오랜만에 보는 검세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순식간에 참가자 한 명을 곤죽으로 만들었고, 놀라운 상황을 이어갔다.
그 다음 향한 곳은 5명의 참가자가 있는 곳.
백무열은 꽃다발을 늘어트린 채 살벌하게 뛰어다녔다.
"…여전하구만. 패죽."
젊은 시절 돌격대장으로 활약했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의 백무열은 진짜 강했다.
물론, 내가 조금 더 강하긴 하지만.
-자, 다음.
눈 깜짝할 사이에 백무열은 다섯의 참가자를 탈락시켰다.
아니, 근데 저 목검은 부러지지도 않나보다.
보통 강철이랑 부딪히면 목검이 부러져야 정상인데.
저거 진짜 목검 맞나?
허허. 말세로다.
"아! 기억났다!! 저분 우리 할아버지 절친인데?!"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미도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띄워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가 저 녀석을 알고 있구나.
이거 큰일인데.
"…흐음. 무열이 놈 때문에 일이 점점 꼬이는군."
저놈이 약간의 입만 뻥긋해도 미도는 내 정체를 알게 될 것이다.
친구 등록이 안 되어 있어서 귓속말도 못 보내는데 어떡한담.
"흐음. 만나면 거미줄로 입부터 틀어막아야겠군."
- 견소룡: 저분도 형님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쯧. 이놈은 또 어디로 갔길래 귓속말이지.
주변을 둘러보니, 견소룡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수정구슬에 띄워진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긴 나도 초감각 때문에 이렇게 철창 가까이서 볼 수 있지.
없었다면 나도 저들과 함께 띄워진 화면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 잭슨: 쟤 내 친구다.
- 견소룡: 예???
- 잭슨: 내 친구라고.
- 견소룡: …….
견소룡은 잠깐 침묵하더니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정말입니까?"
"그래. 딱 봐도 내 친구처럼 보이지 않냐?"
"그렇긴 합니다만…."
"잘 봐라. 저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나는 다시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서 백무열은 치열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 * *
백무열은 난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찔러 들어오는 대검을 튕겨내고, 창을 튕겨내고, 날아오는 화살 세 발을 빗겨냈다.
그리고 뛰어오른 그의 손엔 오로지 목검이 있었다.
"으윽. 미친! 무슨 노인네 힘이!"
꽃다발로 위장한 흑단 나무 목검을 내리치자, 눈앞의 녀석이 인상을 찌푸린다.
하지만 백무열 또한 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다.
"그냥 순순히 죽어라."
퍼퍼퍼퍽!
바람을 가른 목검이 놈이 입은 갑옷을 힘차게 두들겼다.
얼마나 강했는지, 목검 자국 그대로 움푹 들어가기도 했다.
눈앞의 유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로그아웃을 당했다.
그리고 뒤돌자 보이는 것은 아까 창을 들고 달려들었던 놈 하나랑 화살을 쏘았던 놈 하나.
그들은 자신을 보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허허. 어딜 가느냐. 아이들아."
꽤 자상한 말이었다 생각했는데, 그들의 표정에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이런 말투는 안 어울리는 건가.
착하게 살아보려 했는데 안 되겠군.
"이리 와라. 이 썩을 놈들아."
"히이이익!"
"뼈와 살을 분리시켜주마."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공격했다.
아무래도 자신에겐 안 되니 다른 이들을 공격해 살아남으려는 모양이다.
쯧. 이걸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곧장 손에 쥔 목검을 살폈다.
어느새 꽃다발은 없었다.
격렬한 싸움에 꽃들은 시들거나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본 백무열은 마음이 안 좋았다.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 했거늘….
"오늘 그 말을 어기고 말았구만. 크하하하!"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이지만, 호탕하게 웃었다.
이미 많은 참가자들이 정리된 상태였고, 자신에게 덤비는 놈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보자….
한 10명 남았나?
절반 정도를 자신이 탈락시켰으니 나머지 절반은 누가 좀 없애줬으면 좋겠다.
사실 이런 잔챙이들을 상대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어디 쎈 녀석들 좀 없으려나."
그렇게 어깨에 목검을 짊어진 채, 다른 참가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그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백무열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
"……?"
저 멀리 구석에 웬 몽둥이를 든 빡빡이가 팔짱을 낀 채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왜 쳐다보는 거지 기분 나쁘게.
이상하게도 빡빡이들은 자신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다.
근데 저놈은 경기도 안 즐기고 앉아서 뭐하는 거람.
"죽어라! 동료들의 원수! 파이어 웨이브!"
웬 마법사 하나가 빡빡이에게 화염의 파도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놈은 가만히 있었다.
그저 장갑을 낀 왼손만 살며시 들뿐.
"뭐, 뭐야?!"
뜨거운 화염의 파도가 순식간에 장갑으로 빨려 들어갔다.
녀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아, 잔챙이들이랑 싸움은 재미가 없는데."
그렇게 말하곤 다시 장갑을 마법사에게로 뻗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되돌려라. 폭발 장갑."
장갑에서 휘몰아친 화염의 파도가 다시 마법사를 향해 쇄도했다.
마법사는 너무 당황해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콰콰쾅!
자욱한 연기가 경기장을 가득 메운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혈투를 벌이던 참가자들도 그곳을 돌아보았다.
백무열은 흥미롭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호오. 재밌는 녀석이 하나 있었군."
하지만 그 순간 놀라운 메시지가 떴다.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들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음?"
[성좌 퀘스트 – 몽둥이의 가호를 잇는 자들]
등급: S
몽둥이를 좋아하는 성좌는 이곳에 모인 당신들을 시험하고 자 한다. 당신과 똑같이 몽둥이의 가호를 잇는 자가 있다. 그를 쓰러트려 당신의 존재감을 성좌에게 입증하라.
-완료 조건: 몽둥이의 가호를 잇는 자와의 대결에서 승리 0/1
-실패 시: 몽둥이를 좋아하는 성좌는 당신에게서 관심을 거둘 것입니다. (성좌스킬, '몽둥이의 가호'가 사라짐.)
-성공 시: 몽둥이를 좋아하는 성좌는 당신을 더욱 관심 있게 지켜볼 것입니다.
"이 말도 안 되는 퀘스트는 또 뭐지."
실패 시에는 몽둥이의 가호라는 주력 스킬을 잃게 되고, 성공 시에는 별로 내키지도 않는 놈의 관심을 받는다고 한다.
아이씨, 이거 취소 안 되나.
[이 퀘스트는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성좌 퀘스트 – 몽둥이의 가호를 잇는 자들'이 강제로 시작됩니다!]
"…시부럴."
이거 어째 잘못 엮인 거 같은데.
[몽둥이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들의 싸움을 기대합니다.]
"웃긴 놈일세."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자신과 같은 스킬을 가진 놈이 있다.
대체 누구지?
아마 몽둥이를 들었을….
"잠깐만. 아까 그 녀석…?"
백무열은 아까 그 빡빡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과 똑같이….
아니, 더 거대한 몽둥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는 길에 만났던 바헬 숲의 오우거와 닮았다.
마침 그 녀석도 아까 자신처럼 허공을 두드리고 있었다.
분명하다. 저놈이 틀림없다.
"이거 재밌구만."
마침 빡빡이도 자신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저놈은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빡빡이가 말했다.
"크하하하! 이거 재밌구만! 몽둥이의 가호!"
쿠구구구구.
아까 같은 힘의 파장이 녀석의 몽둥이에서 퍼져 나왔다.
저놈이 들고 있는 거대한 몽둥이를 보니, 왠지 손에 쥔 목검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은 이게 더 좋았다.
츠츠츠츳.
황금색의 스파크가 허공에서 뒤엉키더니 거대한 힘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아무래도 목검에서 뻗어 나온 기운과 빡빡이의 기운이 상충되며 그런 것 같았다.
뒤엉킨 황금의 아우라는 어떤 형상을 갖추었다.
"뭐야. 이건 또…?"
그것은 거대한 사자의 가죽을 뒤집어 쓴 남자였다.
* * *
백무열의 싸움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목검에 깃든 황금색의 아우라와 그것에 비례되는 녀석의 힘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옷을 우그러트리는 목검이라니.
저건 너무 비상식적인 힘이다.
"저 녀석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럴 때 통찰을 쓸 수 없다는 게 아쉽다.
그럼 순식간에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을 텐데.
젠장. 망할 프로메테우스 놈 같으니라고.
일어나면 왜 이렇게 늦잠 잤냐고 잔소리를 퍼부어야겠군.
"대단합니다. 역시 형님 친구분입니다."
옆에 있는 견소룡은 흥분한 듯했다.
아무래도 호승심이 이는 모양이다.
하긴 이런 나도 녀석과 붙어보고 싶어서 근질거리는데, 이놈은 오죽할까.
이미 미도는 충격의 아이러니에 빠져있었다.
"아니…. 무열이 할아버지가 이렇게 강할 리…. 아니, 대체 뭐지 진짜? 와, 이거 초대박이네. 우리 할아버지도 아시려나?"
알고 있단다. 미도야….
"형님. 근데 저자는 왜 가만히 앉아있죠? 아, 지금 일어서는군요."
견소룡이 말한 거구의 남자.
나는 저자를 잘 알고 있다.
사실 저번에 한 번 붙어본 적도 있다.
저놈의 폭발 장갑 때문에 해오름이 통하지 않아서 한바탕 곤혹을 치렀었으니까.
"이름이 휴톤이랬나…."
어째 이곳 콜로세움은 싸움을 좋아하는 녀석들만 모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하하하! 이거 재밌구만! 몽둥이의 가호!"
휴톤의 외침과 동시에 아까 백무열과 똑같은 힘의 파장이 경기장을 울렸다.
백무열은 절제된 힘이었다면, 휴톤이 발산하는 힘은 사나움이었다.
그런데 몽둥이의 가호라고…?
잠깐만. 설마?
츠츠츠츳!
허공에 황금색의 스파크가 튀더니, 어떤 남자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사자의 가죽을 쓴 미남자.
나는 저자를 잘 알고 있다.
"미친…. 무열이 저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닌 게야."
"형님. 저거 혹시…?"
"그래. 네가 생각한 게 맞다."
옆에 있는 견소룡도 눈치챘듯이 이건 성좌의 힘이다.
특히 저 망할 사자 가죽을 쓴 녀석은 한 놈밖에 없다.
남자를 여장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미친 성좌.
나는 저놈의 별명을 기억한다.
"최초의 여장남자…."
별명은 좀 변태 같지만, 무시해선 안 된다.
무려 1등성의 성좌였으니까.
"헤라클레스가 여긴 어쩐 일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