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67화
제167화
-선택한 선수가 16강에 진출한 분들 축하드립니다!
관중 대기실에 울려 퍼지는 방송.
이곳 콜로세움은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기 전 약간의 이벤트 같은 것이 있다.
뭐, 이벤트라고 하기도 뭐하다.
사실 그냥 살아남을 것 같은 놈에게 돈을 거는 것이니까.
최불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지는 줄 알았네."
여러 명의 선수들이 있었다.
거진 20명 정도였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수정 구슬에 비친 선수들을 확인하며 각자의 돈을 걸었다.
그렇게 모은 돈들은 살아남은 4명을 찍은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뉜다.
"근데 생각보다 딴 사람이 많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이 라인하르트에 걸었다.
하긴 <제우스 길드> 의 유명인인데, 안 찍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사람이 몰려서 배율이 고작 1.5배였지만, 그래도 만족하기로 했다. 따긴 땄으니까.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거는 거였는데."
혹시나 하는 상황이 있을까 싶어서 50만 달러만 걸었다.
1.5배면 고작 25만 달러.
옛날 같았으면 엄청난 거금이었겠지만, 지금의 최불룡에겐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담배 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어떡한다.'
그 날 그렇게 허망하게 임무에 실패한 뒤, 최불룡은 에이단을 만나지 못했다.
차마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다간 지금 진행 중인 사업조차도 망해버릴 수 있었으니까.
에이단의 성격상 약간의 변명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일단 제복이를 믿는 수밖에.'
아까 전 김제복이 콜로세움에 참가했다.
최불룡은 김제복과 함께 다시 쓰레기촌을 습격할 생각이었다.
그는 콜로세움에서 몸부터 풀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이곳에 데려왔다.
최불룡은 관중석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이곳 세상에서 '매드독'이라는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다.
-위 4명의 선수를 찍은 분은 지금 즉시 돈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수정구슬이 나타나 허공에 4명의 얼굴을 띄웠다.
한 명은 자신이 찍은 라인하르트.
인상이 참 강인해 보인다.
그 다음은 아까 화면으로 봤던 대검을 든 남자.
그리고 잘생긴 남자 마법사 한 명.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아까도 저자는 별로 한 게 없었다.
대검의 사내처럼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았고, 아까 그 마법사처럼 마법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라인하르트가 무대를 무너트렸을 때, 운 좋게 살아남은 것처럼 보였다.
"흠. 그래도 배율이 2배네. 찍은 사람이 별로 없나 보군."
최불룡은 고개를 돌렸다.
2배를 딴 그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져서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니, 저놈은…?"
"이야, 살아남을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연녹색의 갑주를 입고 있는 남자.
그를 보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설마 저 남자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을 로그아웃시킨 미친 기사 NPC.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스벌. 저 새끼가 왜 여깄는 거야."
하루가 지나 다시 접속한 최불룡은 또 쳐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을 또 만날 것 같아서였다.
저번엔 불행 중 다행으로 망우초 담배 한 보루만 떨어트렸지만, 다음에 또 그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가 다가오자, 최불룡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들키면 엿 된다.
"흐흐흐. 또 영감님한테 걸어야지."
그는 자신을 지나쳐 멀어졌다.
돈을 짤랑거리며 걸어갔지만, 최불룡은 돈에 집중하지 않았다.
'영감님…? 설마 그 영감탱이가 이 콜로세움에 참가한 건가?'
방금 저 남자가 돈을 땄다는 건 분명 2조의 사람들 중 영감탱이가 있었다는 뜻인데….
"설마…?"
최불룡은 다시 2조 선수의 얼굴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단 한 명을 노려보았다.
'저 가면이 영감탱이였구나…!'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
아까 지나친 저 남자 때문에 영감탱이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까.
최불룡은 곧장 귓속말 창을 열었다.
* * *
잠깐의 지진이 일었다.
그것은 건물을 통째로 흔드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이내 멎었다.
그리고 곧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놀랍습니다! 순식간에 결론이 나버렸군요! 16강에 진출할 2조의 4명을 소개합니다!
"뭐야. 아까 그게 싸워서 생긴 지진이었나?"
"누구지? 엄청난 위력인데."
"어마어마한 강자가 있는 모양이야."
"흥, 그래도 우리 이카루스한테는 안 된다구요. 오빠들."
아까 시비를 걸었던 일행들의 목소리.
김제복은 저 여자가 계속 신경 쓰였다.
뭔가를 찔렀을 때 비명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저 여인은 굉장한 비명을 질러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얼굴도 제법….
"…츄릅. 너로 정했다."
김제복이 입술을 핥았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수정구슬이 허공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곳엔 4명의 얼굴이 보였다.
'매드독'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김제복은 그곳을 쳐다보았다.
"뭐야. 라인하르트잖아?"
"제우스 길드의 간부가 여긴 왜 나와?"
"저 녀석도 스타 프루츠를 노리는 건가?"
제우스 길드?
뭔지 모르겠다.
자신의 관심사는 오직 무언가를 찌르는 것.
그것이 몬스터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이곳 가상현실의 세상에서는 모두 허락이 되었다.
그래서 김제복은 이곳이 좋았다.
자신의 쾌락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으니까.
- 최불룡: 김제복.
"…아, 뭐야. 씨댕."
일과 돈을 준 것은 고맙지만, 이 놈은 자신을 너무 부려먹으려고 한다.
마치 발밑에 두고, 마음대로 주무르다 필요 없어지면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눈빛.
많은 사람을 찔러오며 김제복은 사람의 눈만 봐도 그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최불룡이라는 새끼는 분명 나를 버릴 놈이다.
"X발. 돈만 아니었어도…."
돈이 아니었다면 찔러버렸을 것이다.
어제 귓속말을 차단했다고 혼났던 것도 간신히 참았다.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서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개 같은 새끼.
단답 해야지.
- 매드독: 예.
- 최불룡: 저번에 말했던 영감탱이 기억나나?
- 매드독: 예.
- 최불룡: 지금 나오는 화면에 검은 늑대 가면을 쓴 사람이 그 영감탱이다.
- 매드독: 아, 예.
- 최불룡: 경기에서 저 영감탱이를 죽여라. 그럼 돈을 더 얹어주마.
- 매드독: …알겠습니다.
곧장 귓속말을 닫았다.
김제복은 아까 그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저 영감탱이가 그렇게 강하단 말이지…?
최불룡이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것이 저 사람이란 사실에 김제복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여기가 선수 대기실인가."
"음, 맞는 것 같군."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사회자도 나타난 걸 보니, 곧 경기가 시작될 것 같다.
그렇게 20명가량 모이자, 입구의 철창이 내려갔다.
사회자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여기 있는 분들은 3조입니다. 룰은 생존입니다. 팀을 짜도 좋고 혼자여도 좋습니다. 장외는 탈락이고….
사회자의 말 따위 흥미 없다.
오직 관심은 찌를 대상뿐.
김제복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방금 전 여인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김제복은 단검의 칼등을 혀로 핥으며, 그녀의 비명을 상상했다.
"우선, 재미 좀 보자고."
* * *
눈을 뜬 견소룡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거의 한 달 만인가?
"뭘 그렇게 목소리를 깔고 그러냐."
"큼. 죄송합니다. 수련하다가 감기에 걸려서."
"…허약한 놈. 어디에서 수련했길래 감기에 걸려?"
"저번에 갔던 북극을 또 갔습니다."
"뭐야??"
이건 뭐 미친놈인가 싶다.
솔라도 없이 거기 갈 생각을 하다니.
굳이 솔라가 없어도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북극에서 그게 쉽겠냐고.
"살아남은 게 용하구만. 쯧쯧."
"큼.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형님이 없으니 힘들더라구요. 솔라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입구 근처에 있는 빙판에서 수련하는 수밖에 없었죠."
견소룡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미련한 놈. 거긴 또 어떻게 간 게야?"
"우연히 지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북극의 바로 옆이 '파르타 공국'이더군요. 운 좋게 그곳으로 가는 마법 포탈을 탈 수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는 뛰어오느라 좀 힘들었지만요. 하하."
견소룡이 쉰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아프면 제대로 싸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너 괜찮냐? 한 대만 쳐도 부러질 것 같은데."
"큼. 괜찮습니다. 걱정 마십쇼. 안 그래도 아까부터 감기에 좋은 약초를 씹어 먹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녀석의 한쪽 볼이 튀어나와 있다.
견소룡은 그것을 반대쪽 볼로 옮기더니 질겅질겅 씹었다.
얼핏 보면 껌을 씹고 있는 불량배처럼 보인다.
"거기서 뭘 한 거냐."
"수련했죠."
"그니까 무슨 수련."
견소룡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레이트라를 만났습니다."
"뭐야? 네 녀석. 설마…."
"예. 얼어 죽을 각오로 주먹을 휘두르다 만날 수 있었습니다."
"…허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진짜 미쳤다.
저번에 듣기론 레이트라 녀석이 말한 대화 조건이 극한 상황에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걸 수련을 통해 인공적으로 가능하게 만들다니.
아니, 진짜 수련에 미쳤기에 가능했던 건가?
"네 녀석도 한 꺼풀 성장했구나."
김수정도 그렇고 케레노스도 최근에 많은 발전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인데….
초조하다.
이대로 젊은이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이 모두가 형님 덕분입니다."
"내가 무슨. 허허. 한 일도 없구만."
철컹!
내가 들어왔던 대기실 입구의 철창이 내려갔다.
바깥은 무대가 훤히 보였다.
아마 1조의 사람들도 이렇게 경기를 봤겠지.
-자, 지금부터 3조의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용감무쌍한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3조의 예선전이 시작되나 보군요. 한번 보시겠습니까?"
"봐야지. 저거 철창 구멍 숭숭 뚫린거 보라고 만들어 놓은 거 아니냐?"
"하하.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우리는 철창 앞으로 다가섰다.
다른 1, 2조의 선수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우하하! 어떤 녀석이 있을지 궁금하구만!"
라인하르트가 철창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흔들었다.
저러고 있으니 진짜 동물원의 고릴라 같다.
바나나라도 던져줘야 하나.
"선수들이 오는 모양입니다. 형님."
나는 시선을 옮겼다.
꽤 좋은 장비들을 착용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저들 또한 이곳의 우승상품을 노리는 건 아닐까.
그렇게 한 명씩 살펴보던 중.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쟤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