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64화
제164화
최정현은 진료실의 문을 닫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분명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저 사람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담당했던 의사 분이다.
어째서 저분이 여기 있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다시 보니 반가운 기분이다.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서.
'여전히 아름다우시네….'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뭘 하느라 이제 와? 수다 떨고 왔냐?"
별안간 백무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렸을 적부터 생각했던 건데, 삼촌의 얼굴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뭐, 얼굴이 다가 아니니까.
일행들은 신기한지 건물 내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뭘요. 그냥 간단히 고개만 숙이고 나왔어요."
그래도 삼촌은 덜 무서운 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화나면 진짜 무섭다.
다른 가족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
막내인 서현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쫓아다니던 스토커가 있었는데, 길을 가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아버지가 그 스토커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무서웠냐면, 그 날 이후로 한 2주 동안 밤잠을 설쳤다.
아직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오싹한 소름이 끼친다.
"쯧쯧. 그렇게 좋냐?"
"예? 그게 무슨…."
"저 여의사 말이다."
"어? 삼촌 알고 계셨어요?"
최정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알다마다. 춘택이랑 선영이가 얼마나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었는데. 병문안 갈 때마다 귀에 딱지 앉는 줄 알았다."
'선영'이라는 이름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다.
무열이 삼촌은 고아였던 아버지랑 친형제처럼 지냈는데, 어느 날 함께 다방에 갔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어머니를 보고는 아버지가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어쨌든 삼촌은 어머니와도 굉장히 친했다.
"흠. 그때, 네 엄마가 너랑 짝을 지어주고 싶다고 얼마나 그러던지. 그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제 짝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르고 있었냐? 아는 줄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말에 최정현은 혼란스러웠다.
짝이라니.
설마 그때부터 어머니가 저분을 내 짝으로 여기고 있었던 건가?
물론, 그때도 이혼한 상태긴 했지만, 저분은 엄연히 미혼이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듣자 하니 남편이랑 이혼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던데. 험."
"아…. 네? 그래요?"
"그래. 꽤 되었을 거다. 지금 다시 재혼했는지 모르겠다만."
"아하…. 어우. 아니지."
최정현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의사 선생님에게 도박중독자에 애까지 딸린 남자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아니, 잠깐만.
"설마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참한 처자가…?"
중얼거리던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백무열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춘택이가 말한 게 저 처자인 모양이다. 크하하하! 그 녀석 진짜 웃기는 놈이라니까! 하하하!"
백무열이 호탕하게 웃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일행들도 이곳으로 다가왔다.
마침 듣고 있었는지, 백성찬이 반색하며 물었다.
"오오~ 정현이 삼촌 장가가는 건가요오~?"
장난스러운 표정.
말 뒤꼬리를 올리는 걸 보니, 딱 봐도 놀리는 거다.
"얌마. 삼촌 놀리냐?"
"아뇨~? 지금 입꼬리 실룩거리는 걸 보니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 뭣?"
무안해진 최정현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뒤에서 폭소가 터졌다.
"푸하하. 저거 봐. 부끄러워하는 거 보니 좋아하는 거 맞는데?"
묵사발의 말에 지킬과 바로크도 말했다.
"화이팅요."
"바로크…. 응원한다."
별안간 대머리 형제가 자신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
"후후. 저 여자를 꼬시고 싶거든 언제든 말해."
"우리가 머리를 밀어 줄테니까."
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이 두 형제는 제정신인가 싶다.
"생, 생각해볼게요. 하하…."
차마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면 진짜 강제로 밀릴 것 같은 눈빛이라서.
"시끄럽다. 이놈들아. 멀쩡한 놈 대머리 만들지 마라."
백무열의 일갈에 대머리 형제가 헛기침하며 물러났다.
휴우. 다행히 머리는 안 밀릴 것 같네.
"아무튼 정현아. 잘해봐라."
백무열이 자신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살살 좀 치시지. 겁나 아프다.
"삼촌. 아무리 그래도 저분이랑 전…."
끼익- 갑자기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벌써 치료가 끝난 건가?
이름 모를 그녀가 나왔다.
그녀의 양손엔 피가 흥건했다.
백무열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다가갔다.
"치료는 잘 끝났나?"
"네. 다행히요. 저희 병원에서 한번 뵈었죠?"
"음, 기억하는구만. 반갑네. 백무열이네."
"안녕하세요. 김수정이라고 해요. 아, 피가 묻어서 악수는 안 되겠네요. 하하."
두 사람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김수정이었구나.
그런데, 그때였다.
"엇?"
누군가 뒤에서 밀었다.
어느새 자신은 김수정이라는 여자의 앞에 있었다.
뒤를 보니 일행들 모두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고의로 민 거다.
젠장. 누구야. 대체.
"어머, 안녕하세요. 저희도 구면이죠?"
김수정이 생긋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최, 최, 최정현이라고 합니다."
어우 심장이야.
내가 왜 말을 더듬고 있는 거지.
* * *
그 무렵.
나는 계속 수련에 매진했다.
케레노스는 내게 바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말해주었는데, 녀석의 말에 따르면 호흡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다.
그걸로 먼저 바람의 기초를 다져야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걸 해보기 위해 다시 '아네모네'를 발동했다.
꽃잎을 먹자마자 바람의 마력이 휘돌았다.
"영감님. 여기서 중요한 건 호흡이에요. 자, 천천히 들이쉬세요."
"스으으읍."
케레노스의 말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의 마력을 운용해서 그런지 공기가 굉장히 상쾌하다.
박하사탕을 한가득 입에 머금고 있는 느낌이랄까.
"잘하셨어요. 자, 이제 천천히 내쉬세요. 천천히~"
"후우우우…."
폐부 깊숙이 자리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듯.
그렇게 천천히 숨을 뱉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그렇게 최대한 뱉으면서 마지막엔 숨을 참으셔야 합니다. 최대한 참으셔야 해요."
[당신의 몸에 숨겨진 바람의 재능을 확인합니다.]
[최대한 오래 숨을 참으세요.]
[지금부터 시간을 재도록 하겠습니다.]
[00:01]
녀석의 말대로 나는 뱉을 수 있는 만큼 숨을 뱉었다.
그리고 곧장 숨을 참았다.
현실에선 폐활량이 좋은 편이긴 한데, 여기선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북파공작원이 되기 위한 훈련 중엔 바닷속에서 오래 숨 참는 것도 있었으니까.
"흐으음."
꽤 오래 버텼다.
1분. 그리고 2분.
폐활량을 기르기 위해선 숨을 오래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해녀들은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지만, 폐활량은 크지 않다.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선 꾸준한 유산소 운동을 통해 한 번에 취하는 공기의 최대량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연습을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해왔다.
물론,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
…또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 떠오르는군.
어렸을 적부터 북파공작원으로 길러졌던 나는 많은 훈련을 받았다.
폭파, 독도법, 무성 무기, 생환, 수영, 전투 등.
셀 수 없이 많지만, 어쨌든 그 중엔 잠수도 존재했다.
그때, 내 최고 기록이 15분이었던가.
5분이 지나자, 케레노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영감님. 괜찮으십니까? 잘 참으시네요?"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케레노스는 계속 지켜보았다.
그렇게 지난 것이 7분.
이젠 케레노스도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영감님? 괜찮으세요? 숨 쉬세요. 숨!"
썩을 놈이 집중력 흐트러지게.
"아하하, 괘, 괜찮으시구나. 하하…."
눈을 부릅뜨며 괜찮다는 신호를 하고 나서야, 케레노스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팔짱을 낀 채, 계속해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집중했다.
어느새 9분이 넘었다.
…흐음.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슬슬 힘드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그만해야 할까.
감았던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아직 9분 30초라는 메시지.
그래 10분까지만 버텨보자. 그래도 북파공작원 출신인데 가오가 있지.
[10:08]
"스으으읍!"
별안간 요상한 소리와 함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목 졸려 죽는 게 이런 기분일까.
옛날엔 15분까지 버텼거늘….
허허. 조금 아쉽구만.
띠링-!
[당신이 참았던 숨만큼 바람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음?"
슈와아아악!
별안간 연녹색의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코와 입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그 양이 제법 많아서 나는 흠칫했다.
"영감님. 진정하세요. 좋은 거니까 가만히 받아들이세요."
케레노스의 말에 나는 안심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바람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미약하지만 바람을 만질 수 있었다.
손끝에서 스륵하며 흩어지는 바람 소리가 신기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바람의 기초를 완성하였습니다.]
[1080의 바람의 에너지 최대량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바람 속성의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바람을 느끼고 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만지는 건, 굉장히 많은 숙련이 필요합니다.]
"이건…."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눈이 크게 떠졌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람의 에너지'라는 단어.
이것은 해오름에 있던 '태양의 에너지'와 같은 것이었다.
이거 잘하면 바람의 비각술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고생하셨습니다. 영감님."
"어, 그래. 그나저나 이건 왜 한 거냐? 바람의 에너지인가 뭔가가 내게 생긴 것 같은데."
"그렇죠. 생각보다 오래 참으셔서 놀랐습니다. 영감님이 가진 바람의 재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10분이면 대단하신 겁니다. 저보다는 살짝 못하지만요. 하하."
살짝 못하다는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이놈은 얼마나 참았길래.
"넌 얼마나 참았냐."
"저요? 전 마음먹으면 30분까지도 가능합니다. 하하. 그래도 영감님 수준이면 그래도 부관인 베커 정도는 됩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하신 거라구요."
30분이라는 말에 괜히 심드렁해진다.
썩을 놈 같으니라고.
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향해 발차기를 휘둘렀다.
"하하. 이제 그건 안 통합니다."
"끙."
너무도 손쉽게 피했다.
확실히 이놈의 움직임이 예전하고는 딴판이다.
젠장. 괜히 풍희랑 붙여놨군.
"쯧. 바람의 에너지 끌어내는 법이나 말해라."
"음, 그건 쉽습니다. 자, 보세요."
케레노스가 허공에 손가락을 돌리더니, 10개가 넘는 바람의 창이 나타났다.
그것은 근처의 나무와 바위를 향해 날아가더니, 모조리 꿰뚫어버렸다.
그 위력이 너무도 가공할 만해서 입이 쩍 벌어졌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참 쉽죠?"
뭐가 쉽다는 거지.
목 졸라버릴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