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61화
제161화
그야말로 찰나였다.
갑자기 몸속에서 바람의 마력이 용솟음치더니, 이내 갈무리되지 못하고 폭발을 일으켰다.
잠깐 사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는 하늘을 보며 누워있었다.
아니, 허공을 날고 있다.
"뭐, 뭐야. 으윽…."
온몸이 움찔거렸다.
자세히 보니, 무수히 자잘한 상흔들이 내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생명력을 확인해보니, 무려 절반 이상이 닳아있었다.
옷도 이미 넝마가 되어 조금씩 너덜거렸다.
…드레인한테 한 소리 듣겠네.
그렇게 계속 허공을 향해 떠오르던 나는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거….
나는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오금이 다 저리다.
"으어억, 이 무슨…!"
마치 저번에 아이스 실크로드를 탔던 느낌이랑 비슷하다.
물론, 그땐 나름 안전했지만, 이건 아니다.
지금 땅에 박히면 난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일 콜로세움은…!
[크하하! 또 사고 한번 크게 쳤구나!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
'으익. 시끄럽다. 이놈아!'
[큭큭. 그나저나 궁금하군. 네가 죽으면 난 어떻게 되려나. 나도 죽게 되려나?]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저번에 절벽을 뛰어내렸을 땐 거미줄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그것마저도 쓸 수 없다.
점점 가까워지는 땅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젠장. 아무래도 약속을 못 지키겠….
"푸우우웅~!"
"……?"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풍희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짐짓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풍희야! 여긴 위험…."
하지만 빠르게 내게 도달한 풍희는 주변을 날며 작은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제법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떴다.
[바람의 신수, '풍희'가 주인의 위험을 감지하며 새로운 하위 능력을 각성합니다.]
새로운 하위 능력…?
[바람의 신수, '풍희'가 '레비테이션'을 사용합니다.]
후우우우욱.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땅과의 거리는 불과 1미터 남짓.
나는 풍희와 똑같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조금씩 다가오던 죽음의 그림자가 걷히는 기분이다.
휴우, 간신히 살았네.
"푸우우웅~♡"
"허허, 고맙다. 풍희야."
녀석은 내게 하얀 털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레비테이션'의 설명을 읽으며 풍희의 콧잔등을 쓸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살짝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는 스킬이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케레노스는 인상을 쓰며 입에 달라붙은 거미줄을 떼어냈다.
"에이, 이놈의 거미줄. 진짜 없애든가 해야지. 거, 왜 그렇게 성급하게 구십니까? 제가 주의사항을 말씀드리려고 했더니."
"쯧. 그런 건 빨리 말했어야지. 이놈아."
"에휴. 영감님 고집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다시 거미줄로 입을 막아야 하나.
"크흠. 어쨌든 지금부터 설명해 드릴 테니 잘 들으십쇼. 또 괜히 못 들었다가 하늘 날지 마시구요. 전 안 구해드릴 거니까."
케레노스가 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귀를 후비며 들었다.
* * *
그 무렵 김수정은 메테우스 마을 부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을은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전보다 활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
멀리서 봤음에도 이 정도다.
확실히 마을이 완공되고 나니 많은 유저들이 몰려든 것 같다.
"여기가 그 화제의 인물이 촌장으로 있는 곳인가?"
"근데 생각보다 별거 없지 않아?"
"그러게. 윈디아를 구했는데 보상이 이거라니."
"뭐, 이것도 기념인데 사진이나 찍자. 자기야."
"그래. 자기야. 이리 서 봐."
찰칵찰칵.
그들은 메테우스를 배경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커플인가보다.
괜스레 옆구리가 시리네.
"와, 근데 이 많은 NPC들은 뭐지?"
"뭐하는 사람들일까?"
"엄청 많은데?"
커플들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많은 NPC를 이끌고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그 순간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났다.
팡팡!
"당신은 누구시죠?!"
"누구신데 이 많은 NPC들을 이끌고 오셨습니까?!"
"혹시 잭슨이라는 유저와 무슨 관계시죠? 연인입니까?!"
김수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하긴 마을이 완공되었으니 기자들이 들어올 수 있는 건 당연하긴 한데….
이상하게 짜증이 난다.
그녀는 곧장 귓속말을 했다.
- 크리스탈: 아버님. 기자들이 마을 내에서 활개 치는데 어떻게 할까요?
- 잭슨: …썩을 놈들 같으니라고. 베커에게 말해 입구에 기자와 몬스터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내걸어라. 그리고 다 쫓아내버려.
- 크리스탈: 네. 그렇게 할게요.
"왜 말씀이 없으시죠? 시인하시는 걸로 알아들어도 되겠습니까?"
"레벨은 몇입니까? 직업은 어떻게 되시죠?"
"언제부터 이 게임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계기는…."
끝없는 질문 공세다.
마침 아이노를 부축하고 있던 헬레나가 다가왔다.
그녀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메테우스가 많이 달라졌네요. 이렇게 갑자기…."
"오오, 새로운 미인 NPC다! 이 정도면 마담 라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겠어!"
"허허, 대박이로군. 내일 1면에 크게 실어야겠어."
또 한 번 플래시의 세례가 퍼부어졌다.
이젠 참기 힘든 수준이다.
사람이 정도가 있지.
이 정도는 사생활 침해 수준이다.
무서워서 게임도 못하겠네.
[반딧불성, '카미유'가 미간을 찌푸립니다.]
"이봐요. 누구 허락받고 마음대로 찍으시는 거예요?"
"거, 깐깐한 아가씨네. 사진도 마음대로 못 찍수?"
"아니, 초상권 몰라요? 초상권?!"
뭐가 그렇게 뻔뻔한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 같이 왔어야 했는데….
다들 각자의 할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
현재 이곳으로 온 건 자신뿐이다.
"허허, 드센 아가씨네. 그럼 옆에 있는 NPC나 좀 찍지 뭐."
그렇게 말한 중년의 기자는 헬레나를 찍기 시작했다.
헬레나의 미간이 또 한 번 찌푸려졌다.
쓰레기촌의 주민들도 마찬가지.
그들의 기분이 엄청 나빠 보였다.
가뜩이나 이곳에 정착시켜야 하는 사람들인데, 저 사람 하나 때문에 다 떠나게 생겼다.
"…왔군. 연락은 미리 받았다."
마침 옆에서 베커와 실피드 기사단이 나타났다.
김수정은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베커 아저씨."
"응, 아저씨? 갑자기 그런 호칭은…."
"뭐, 어때요. 잠시 귀 좀 빌려줘요."
"커험."
김수정은 베커의 귀에 몇 마디 속삭이며 기자들을 가리켰다.
중요한 건 눈앞에 이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
그녀는 과감하게 그들을 쫓아버릴 것을 베커에게 부탁했다.
"음, 알겠다."
베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실피드 기사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기자로 보이는 자들은 모두 마을 밖으로 내쫓는다."
"예! 알겠습니다!"
실피드 기사단이 기자들을 향해 무기를 빼 들었다.
순간 기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뭐야?!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어?!"
스릉.
베커가 그의 목에 검을 겨눴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 * *
[반딧불성, '카미유'가 조용해진 마을에 만족스러워 합니다.]
다행히 기자들은 무사히 밖으로 보낼 수 있었다.
혹시 반항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실피드 기사단들을 도울 생각이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들을 치워줘서 고마워요. 크리스탈 님."
헬레나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다행히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아버님께서 명령하신 거세요."
"아? 아버님이라면…."
"잭슨 님이요."
"아하. 혹시 딸이세요?"
"네? 아하하…. 딸은 아니고, 뭐, 비슷한 거죠?"
"그렇군요. 대충 알겠어요."
대충 알면 안 되는데….
아니, 제대로 이해는 한 건가?
"그럼 저희는 약속대로 메테우스 마을을 발전시키도록 할게요."
"아, 넵."
헬레나가 뒤를 돌더니,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뭘 해야 할지 알죠?"
그녀의 말에 많은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빼빼 말랐지만, 제법 탄탄해 보였다.
마치 작은 거인 같다고나 할까.
"남자분들은 흩어져서 힘쓰는 일과 노동을 맡아주세요."
"하하, 걱정 마라. 헬레나. 우리가 이래봬도 노동에는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야."
"이야. 오랜만에 몸 좀 풀겠네."
"여긴 밥은 잘 나오겠지?"
그 많던 NPC들 중 절반이 흩어졌다.
남은 것은 어린아이들과 여인들.
"여자분들은 돌아다니시면서 힘쓰는 일 말고 도와주실 것이 있으면 도와주시면 되세요. 과일 따는 것도 괜찮고, 손재주가 있으신 분들은 수공예를 해서 팔아도 좋으실 것 같아요."
그때, 헬레나의 치맛자락을 잡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언니, 우리는요…?"
헬레나는 싱긋 웃었다.
"너희는 놀아도 돼."
"정마알~?"
"그래. 대신 엄마 도와드리고 놀아야 한다?"
"웅!"
[반딧불성, '카미유'가 흐뭇하게 미소 짓습니다.]
그렇게 쓰레기촌 주민들이 모두 흩어졌다.
남아있는 것은 헬레나와 키스.
그리고 촌장인 아이노였다.
김수정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와, 헬레나님. 사람들을 진짜 잘 다루셔요. 대단하세요."
"네? 아~ 뭐, 자주 했던 일이니까요."
"자주 했던 일이요?"
헬레나가 싱긋 웃었다.
"저희는 포트렌의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니까요."
"아~ 혹시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잘 몰라서요."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헬레나는 포트렌의 계급 체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을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와 돈이 없어서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는 크게 3가지의 계급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들은 수저의 색깔로 계급을 나누었는데 금, 은, 동수저가 그것이었다.
색깔은 신분의 차이를 상징하고, 그 색깔에 따라 대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의 숫자가 달라진다고 한다.
마법이 걸린 수저라 많은 돈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수저의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어쨌든 금수저 위에는 상왕(商王)의 다이아 수저가 있는데, 이건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5년에 한 번씩 대선 때마다 주인이 바뀌긴 하지만요. 저도 아직 한 번도 못 봤네요."
"아~ 설명 감사해요. 아버님께도 알려드려야겠네요."
"뭘요. 별거 아니에요."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수정이 물었다.
"그런데 쓰레기촌의 주민들은 수저가 없나요? 포트렌의 주민이라면 다 가지고 있다면서요."
"음, 있긴 한데…."
망설이던 헬레나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