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60화
제160화
윈디아에 도착해 첫 번째로 한 일은 우선 먹는 것이었다.
일행들은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조그맣고 퍽퍽한 전투식량은 포만감은 채워줬지만, 정신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슬라임 국수를 먹는 중이다.
"후루룹. 어우. 뜨거."
"할아버지. 천천히 드세요. 더 시키면 되니까."
"크흠. 그래. 너도 많이 먹어라."
정현이 녀석의 말에 따르면 많은 유저들이 우리처럼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사냥을 한다고 한다.
생명력은 포션으로 채우면 되고, 포만감은 전투식량이 있으니, 그 두 가지만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짓은 오래 못할 것 같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다.
뭐, 일행들이 그렇다는 말이지만.
"이야. 이거 유명하다더니 진짜 쫄깃하네?"
묵사발의 말에 지킬과 바로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면발을 슬라임 젤리로 만드니까 식감이 괜찮네요."
"바로크…. 맛있다."
현재 자리 배치는 이렇다.
자신과 손자. 그리고 최정현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바로 옆 테이블에 묵찌빠 형제.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빡빡이들이 있었다.
머머리가 국수를 먹으며 감탄했다.
"어허, 시워~언하다."
"휴가 때나 오던 곳인데 역시 맛있어. 안 그래? 머머리."
"그래. 역시 윈디아하면 슬라임 국수지."
"머리털이 빠질 것만 같은 맛이야. 아, 빠질 머리는 없지만."
"그래. 우린 더 이상 빠질 머리털이 없지. 하하하!"
둘은 이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텅 빈 머리를 찰싹거렸다.
특히 머머리의 소리가 찰졌다.
아무래도 타르모는 약간의 머리털이 있었지만, 머머리는 하나도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백무열은 인상을 찌푸렸다.
"찰싹거리지 마라. 빡빡이들아. 밥 먹는데 시끄럽긴."
"커흠. 거, 영감님 좀 봐주십쇼. 그래도 저희 덕분에 이런 맛집도 찾아왔지 않습니까?"
머머리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확 그냥 어깨를 접어버릴까….
"쯧. 그렇긴 한데 조용히 좀 먹으라고."
"큼. 알겠습니다. 그렇게 째려보실 건 없잖아요."
"크흠. 조용히 먹겠습니다."
빡빡이들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어제 던전을 하나 정리하고 또 붙자며 덤비길래 몽둥이 찜질을 몇 번 해주었는데, 그 뒤로 녀석들은 내 눈치를 본다.
'뭐, 그래도 맛있긴 하네.'
이 슬라임 국수라는 건 정말 신기했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맛의 신세계를 경험한 느낌이랄까.
후루루룹.
칼칼한 게 해장으로 딱이다.
갑자기 소주가 당기네.
여긴 술이….
"할아버지. 뭐 찾으세요?"
몇 번 두리번거리자, 눈앞의 백성찬이 물었다.
"아, 소주 없나 싶어서."
"참나. 소주가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남자는 자고로 술을 좀 할 줄 알아야 한다. 손자야."
"흠. 전 써서 맛없던데."
"쯧, 손자가 아니라 손녀였구만."
"뭐라구요…?"
"커험."
손자가 자신을 째려보자, 백무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일행들이 먹은 밥값을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같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춘택이의 둘째 아들 최정현.
"넌 왜 따라오냐?"
"제가 계산하려구요."
"허허, 됐다. 내가 하마. 나 돈 많어."
"얼만 줄 아시구요? 돈 없으실걸요?"
"음?"
곧장 인벤토리를 열어 확인해보았다.
정말 돈이 없다.
백무열은 제자리에 멈춰섰다.
"거보세요. 삼촌은 여기에 대해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에서 돈은 몬스터들이 떨어트린 장비나 가죽을 팔아야 된다구요."
"커흐음. 내가 뭐 어떻게 알겠냐."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아까 식당 들어오기 전에 가죽들 팔아서 돈 있어요."
최정현은 카운터로 걸어가더니, 일행들이 먹은 것을 계산했다.
그가 헤실헤실 웃으며 걸어왔다.
백무열도 돈을 굳혀서 만족스럽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뭘요. 아, 이제 어쩌실 거예요?"
"뭘 말이냐."
"메테우스 마을이요. 아버지 말에 의하면 윈디아 근처에 있다던데…."
"급할 게 뭐 있겠냐. 천천히 가지 뭐. 어차피 바로 옆인데."
"그렇긴 하죠."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마침 일행들도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듯 배를 두드렸다.
백무열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좀 쉬고 움직이자."
"쉰다구요? 진심이십니까?"
묵사발의 말에 백무열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싫으면 나랑 사냥을 가든가."
일행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강력한 거절의 의사였다.
* * *
어젯밤의 소동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이곳 쓰레기촌의 하늘은 너무도 맑고 청명했다.
하지만 그와 대조되게 주변의 건물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고열에 녹아내린 흙벽들.
이곳은 이제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촌장 아이노를 설득한 끝에 겨우 "메테우스로 가겠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수많은 쓰레기촌의 주민들이 있다.
그 수가 자그마치 5천 명이 넘는 숫자.
그들은 모두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헬레나가 내게 다가왔다.
"쉽지 않으신 결정이었을 텐데. 감사해요."
"허허. 뭐,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으니 괘념치 말게."
나는 저들을 모두 메테우스 마을로 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한 정착이 아니라, 임시로 머물 것을 원했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헬레나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그건 바로….
"약속대로 먹이고 재워주시면 저희는 메테우스 마을을 발전시켜 드릴 거예요."
사실 어떻게 발전시켜줄 것인지는 묻지 못했다.
옆에 있던 조셉이 다짜고짜 허락하라고 귓속말을 했기 때문이다.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빈말을 하는 놈은 아니니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잘 부탁하네. 조심히 가게나."
나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헬레나는 싱긋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마침, 옆에 있던 키스 놈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를 째려보고 있었는데, 포크 숟가락을 들자 금세 눈꼬리를 내리는 모습에 폭소가 터질 뻔 했다.
저놈도 은근 쫄보라니까.
"아, 저기…."
헬레나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왜 그러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탁…?"
"네."
갑작스러웠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뭐, 자다가도 떡고물이 떨어지는 게 NPC의 말이라고 조셉이 누누이 그랬으니까.
"말해보게."
"실은 저희를 도와주는 귀족분이 계세요."
"알고 있네. 근데 그게 왜?"
"그분께 저희가 거주지를 옮겼다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대신 말을 전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굳이 왜 내게?
"그런 건 자네들 중 누군가가 직접 전하는 게 낫지 않나?"
"원래는 제가 그분과 연락을 담당했었어요. 근데 전 지금 아버지 대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야 해서 힘들 것 같아요.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분과 만나는 방법을 모르기도 하구요. 워낙 비밀리에 만나와서 보안이 꽤 철저하거든요."
흠. 뭐 그런 이유라면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내일 콜로세움 때문에라도 포트렌에 가야 하니, 가는 길에 전해주면 되겠지.
그나저나 퀘스트 창이 뜰 때가 되었는데… 아, 마침 뜨는군.
[쓰레기촌의 구원자]
등급: E-
포트렌의 귀족 중 쓰레기촌을 뒤에서 지원하고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헬레나는 메테우스로 돌아가 아이노 대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녀 대신 쓰레기촌의 소식을 구원자에게 전해주자.
-완료 조건: 쓰레기촌의 소식을 구원자에게 전달 0/1
-거절, 또는 실패 시: 헬레나와의 호감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쓰레기촌의 주민들이 메테우스를 떠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보상: 쓰레기촌 주민들의 메테우스 정착 가능성이 상승.
이건 뭐, 거의 협박이네.
쓰레기촌의 주민을 마을에 정착시켜야 하는 내가 이것을 거절한다면 바보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 * *
얼마 가지 않아 헬레나를 포함한 쓰레기촌 일행들은 떠났다.
가는 편에 수정이도 함께 보냈다.
아직 완치가 덜 된 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빨리 치료를 끝내고 콜로세움 경기 날짜에 맞춰서 오겠다고 했는데, 이제 콜로세움이 시작되는 날짜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특훈을 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쓰레기촌에서.
[바람의 신수, '풍희'가 아네모네를 만들어냅니다.]
[아네모네의 생성 횟수가 1번 남았습니다.]
허공에 연녹색의 마력이 휘몰아치더니, 풍희가 연녹색의 꽃잎을 만들어냈다.
마침 옆에 케레노스가 나타났다.
"이걸 드시면 곧장 바람과 호흡하실 수 있을 겁니다. 드셔보면 아실 건데 사실 바람은 그리 쉽게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이놈이 서 있는 이유는 바람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때 케레노스가 보여준 움직임이 바람의 비각술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르쳐 달라니까 싫다고 했는데, 10만 달러 준다니까 부리나케 허락했다.
이걸 익힌다고 해서 정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해야지 뭐.
"아웁. 음, 먹을 만하네?"
곧장 다른 꽃잎들을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온몸에서 연녹색의 마력이 휘돌았다.
슈슈슈슛!
[바람의 아네모네를 섭취하였습니다.]
[마력의 근원이 바람과 호흡하기 시작합니다.]
[주변의 바람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보았다.
정말로 바람이 느껴진다.
현실이 아니라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섬세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이거 어쩌면…?
"자, 영감님. 호흡하세요.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호흡은 개뿔. 저리 비켜라. 이놈아."
나는 케레노스를 밀치며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사실 바위가 아니라 무너진 건물의 잔해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훈련하는데 써도 상관은 없겠지.
"아니, 영감님 이거 정말 중요한 거라니까요? 이거 안 하면 내부에서…."
퓨웃.
거미줄을 발사해 케레노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곧장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람의 신전.
그곳 우물 속에서 보았던 벽화의 동작을.
팟. 팟팟. 팟.
지금 내가 추고 있는 것은 바람의 춤.
온몸의 바람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어쩌면 진짜 될지도 모르겠다.
허허. 되면 완전 대박인데….
벽화에 적힌 글에 따르면 바람의 비각술은 해오름처럼 횟수의 제한이 있다.
하지만 지금 '아네모네'를 이용해 그것을 재현할 수 있다면 공격 횟수의 제한이 없어진다.
본래는 몸속에 바람의 마력을 담아두고 사용하는 것이지만, 아네모네를 이용하면 외부에서 마음껏 빌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천기상무(飛天氣狀舞)."
슈우우우욱.
심장의 마력이 바람과 융합되며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나는 알렉서스를 뛰어넘는 바람의 비각술을 펼칠 수 있다.
다시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카…."
콰아아아앙!!!!!
갑자기 내 몸이 폭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