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50화
제150화
포트랜드 지하에 위치한 세련된 암시장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바로 <제우스 길드> 의 길드장 데미안.
그는 곧 시작될 경매를 기다리며, 경매장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왜 이리 안 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린 그는 간부인 레이나와 라인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이 길을 잃은 모양이다.
"귓속말을 해야 하나…."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아아아안~♡"
교태가 섞인 콧소리.
이건 분명 레이나가 틀림없다.
그녀는 여전히 야릇한 자태를 뽐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옷이 왜 저래…?'
걸어오는 것은 분명 레이나였지만, 평소와는 복장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전장의 사신이라는 암살자 계열의 직업.
늘 몸에 쫙 달라붙는 레깅스 같은 옷을 즐겨 입던 그녀였지만, 지금 입은 옷은 새빨간 융 드레스에 망사가 섞여 새하얀 허벅지가 살짝 비치고 있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는 것이 가관이다.
"아니, 그 옷은 대체 뭐야?"
"어머~ 우리 길드장님도 내 옷에 반했나봐~?"
레이나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허벅지를 드러냈다.
평소 이런 터치에는 민감한 편인지라, 얼굴이 벌게지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자기 웬 쇼핑이야?"
그녀의 뒤를 보니, 어마어마한 양의 쇼핑백을 든 라인하르트가 서 있었다.
얼마나 많냐면, 거구라고 불리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안 보일 정도.
보나 마나 저건 모두 레이나 것일 거다.
라인하르트가 품에 안은 것을 내려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레이나가 옷 사주면 고백해도 된다고 해서 사줬다!!"
그 말에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너 저번에도 그랬다가 차였지 않냐?"
"음? 레이나! 날 찰 거냐?!"
"후훗, 너 하는 거 봐서?"
"그럼 지금 고백하겠다! 사랑한다 레이나!"
"후훗, 거절할게. 하지만 조금 남자답게 보이기 시작했어."
"우하하! 라인하르트는 사내다!"
레이나가 그의 허벅지에 살짝 등을 기대자, 라인하르트가 콧김을 뿜으며 자기 가슴을 쳤다.
영락없는 고릴라의 모습이다.
'정말이지 못 말리겠군.'
여우 짓이나 하는 레이나의 어디가 좋다고 저렇게 들이대는지 모르겠다.
저거 딱 보니까 저번에 미노타의 해머 입찰 받은 돈으로 산 것 같은데.
"라인하르트. 이거 다 네 돈으로 산 거 아냐?"
"우하하! 그렇다!"
"…불쌍한 놈."
딱 보니 탈탈 털린 것 같다.
근데 미노타의 해머가 얼마에 팔렸더라. 7백만 달러였나…?
사실 해머류의 무기는 많은 값이 나가지 않는 편이다.
보통 검이나 창. 그리고 활.
아니면 지팡이를 선호했고, 무거운 무게 탓에 빈틈이 많아서 쓰는 사람은 보통 대장장이뿐이었다.
그것도 각종 폭탄을 제조해 싸우는 전투계열의 대장장이들.
"아무튼 이제 들어가자. 곧 9시야."
"으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우하하! 레이나 건 얼마에 팔릴지 궁금하구만!"
방송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아. 알립니다. 곧 9시 경매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입찰을 희망하시는 분들께서는 지금 곧 경매장에 와주시기 바랍니다.
"가자. 어디 얼마에 팔리는지 한번 보자고."
데미안은 일행들과 함께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 * *
한편, 나는 에이단의 손에 이끌려 지하의 암시장에 들어와 있었다.
일행들과는 헤어졌고, 조셉은 곧장 내가 말한 대로 수정이가 부탁한 물건들을 사러 갔다.
보석을 암시장에서 팔아 그 돈으로 약초를 사려던 것이었는데, 돈이 생겼으니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망할 키스 놈은 지금 위층에서 여자들이랑 시시덕거리고 있고, 드레인은 함께 암시장으로 들어왔지만, 가는 길이 달라 헤어졌다.
옷감을 보러 가고 싶다나 뭐라나.
그리고 나는 지금 옷가게에 와있다.
그것도 망할 에이단 놈과 함께.
아니, 에이단을 호위하는 놈들도 함께.
"후후. 이건 어떠십니까. 포트렌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고풍스러운 옷입니다."
"아, 예. 허허. 썩 괜찮군요."
눈앞의 에이단이 화려한 옷을 들더니 내게 대보며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최고의 디자이너는 개뿔. 드레인보다 한참 못한 실력이구만.
"코인 10개밖에 안 하는데, 그래도 안 사시겠습니까?"
지금 녀석이 말하는 코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초콜렛 코인 정(情)]
등급: 일반
포트렌의 암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만 초코색 코인. 하지만 그 실체는 무려 하나당 '1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니는 암시장의 비밀 화폐다.
뒤에 새겨진 '정(情)'이라는 글자는 신용을 추구하는 암시장을 상징한다.
-1개당 10만 달러, 10개로 쪼개면 개당 1만 달러.
-포트랜드 카지노 1층에서 달러($) 환전 가능.
설명을 읽고 있자니 기가 찬다.
이거 완전 TV에 나오는 초콜렛 파이 그대로 따라한 거네.
"정말 안 사시겠습니까? 이거 엄청 싼 건데."
그의 물음에 또 한 번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코인 10개면 백만 달러.
이게 무슨 백만 달러란 말인가.
딱 봐도 만 달러도 안 할 것 같이 생겼는데.
"전 옷에는 영 취미가 없어서. 허허."
옷 하나가 바람의 신전 공사비와 똑같다고 생각하니 기가 찬다.
내가 너털웃음을 흘리자, 에이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귀족답지 않게 검소하신 분이군요. 좋아하시는 게 정말 없습니까?"
갑자기 웬 귀족 타령…?
아무래도 이 멍청한 놈은 나를 포트렌의 귀족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 내가 보아도 꽤 그럴듯하다.
가면을 쓰고 있지만, 드레인이 만들어준 옷은 나를 기품 있어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파티를 자주 하며 올라간 카리스마 능력치도 한몫했겠지.
어쨌든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이곳 포트렌은 화려해 보여야 계급이 높아 보이는 모양이다.
"음, 저는 요리를 좋아합니다만."
"오호. 미식을 즐기는 분이었군요."
"혹시 배를 채울 만한 곳이 있습니까?"
슬슬 포만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요리를 하면 좋겠지만, 여기서 그럴 수는 없지.
이럴 줄 알았으면 식재료를 조금 챙겨서 오는 거였는데….
쓰레기촌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 사람들을 위해 가진 식재료들을 모두 내놓았다.
워낙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진 힘이 약해 몬스터나 동물들을 잡을 여력도 되지 않았고, 한번 사냥을 나서면 몇십 명이 다치거나 죽는 건 다반사였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신기하네.
듣자 하니 그들을 몰래 지원해주던 귀족이 있는데, 그가 식량도 보내주고 여러 생필품도 지원해줬다고 한다.
완전 자선 사업가나 다름없다.
"잘 됐군요. 마침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식당이 있습니다. 코스요리를 주 메뉴로 하는 곳인데 가시죠."
그의 안내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뭔가 굉장히 비싸 보이는 고품격 레스토랑.
마침 그곳에 오늘의 메뉴가 적힌 간판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었다.
[오늘의 메뉴(코인 70개)]
-A 코스 특별 정식.
파이브 테일 이글 윙 바비큐.
신선한 가재 크랩 회.
뱀 개구리 알탕.
호박 박쥐 고기 무침.
……
…거, 더럽게 많네.
생각보다 많은 메뉴가 있었다.
무슨 코스요리가 이렇게 많은지 어지러울 정도.
전부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요리라 먹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코인 70개.
미친. 무려 700만 달러짜리 코스요리다.
이거 한 번 먹는데 바람의 신전 7개를 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가격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대체 이걸 누가 사 먹….
"…고 있네?"
식당 안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포트렌의 귀족처럼 보였다.
모두 고운 드레스를 입은 것이 현대판 재벌들처럼 보인달까.
"최근 포트렌에서 가장 잘 나가는 레스토랑 중 한 곳입니다. 암시장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지만, 이곳이 무역도시인 만큼 각종 왕국에서 수입해온 몬스터들을 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죠. 흥미로운 곳입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오늘의 메뉴가 있는 간판을 봤다.
가장 밑에 조그만 글씨로 요리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요리사 랭킹 1위 '미랭' 올림.
…이름이 미랭인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랭킹 1위.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나와 같은 유저라는 뜻.
설마 여길 운영하는 사람이 유저였다고…?
에이단의 말이 이어졌다.
"듣자 하니 이곳의 요리사는 불사의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원래 오르카 왕국의 요리사였는데, 돈이 안 되서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돈은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다.
이곳 같은 자본주의 체제는 그야말로 떼돈을 벌기 좋은 곳이니까.
나는 처음으로 랭킹 정보창을 열었다.
사실 100레벨이 넘고 나서부터 열 수 있었는데, 딱히 순위에 연연하지 않다 보니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곧장 뜨는 메시지가 있었다.
[당신의 랭킹을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이름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창을 닫으십시오.]
…이름이야 이미 밝혀졌는데 뭐.
사실 그때 윈디아에서 촌장으로 임명되면서 온갖 뉴스와 신문에는 '잭슨'이라는 이름이 도배가 되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같은 이름인 사람이 여러 명이었다는 것.
아크스타는 이름이 중복이라도 고유 코드가 다르다면 다른 사람으로 인식을 했다.
귓속말을 했는데 동명이인이 받는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
[당신의 랭킹이 등록되었습니다.]
등록되자마자 직업 랭킹을 찾았다.
국내 랭킹이나 세계 랭킹은 관심 없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오직 요리사들 중 랭킹이 몇 위인가 하는 것.
그리고 나는 곧장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당신의 요리사 직업 랭킹은 54위입니다.]
…음, 생각보다 높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니 내 위에 53명이나 있다는 소리다.
그들은 아마 나처럼 전투로 레벨을 올린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요리를 통해 올렸을 테지.
순간 경각심이 들었다.
요리를 좀 더 갈고 닦아야겠다고.
"…님? 잭슨 님?"
갑자기 세상이 빠르게 흐르며 에이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집중을 했던 모양이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느라."
"하하, 뭘 먹을지 고민이셨나 보군요."
"…큼. 아닙니다. 저랑은 취향이 안 맞는 요리들뿐이군요."
"예?"
너무 비싸다.
이건 뭐 적당히 해야지 아까부터 바가지 씌우기 좋은 곳만 다니고 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길가에 있는 꼬치 요리를 먹는 게 낫지.
…망할 에이단 같으니라고.
그때, 내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긴…?"
내 시선을 따라가던 에이단의 이마가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뒤틀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포트렌에서 가장 천하고 천한 쓰레기촌의 주민이 쓰레기를 파는 곳입니다. 너무 천해서 입맛을 버리실까 염려되는군요. 그냥 저랑 같이 이곳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쓰레기촌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조그만 포장마차였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파리만 날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이 좋다.
"아니, 이곳은 쓰레기들이 쓰레기를 파는 곳…."
쫑알쫑알 시끄럽네.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에이단은 그냥 무시했다. 그리고 포장마차의 주인으로 보이는 주근깨 소녀에게 물었다.
"이거 전부 얼마지?"
아무래도 난 자선 사업가 체질인가보다.
* * *
잠시 후.
나는 포차에 있던 모든 먹거리들을 팔아주었다.
정확히는 0.5코인이었지만, 그냥 1코인으로 넉넉하게 주었다.
주근깨 소녀는 연신 내게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고, 오늘은 일찍 들어갈 수 있다며 좋아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뿌듯함이 밀려온다.
"아니, 왜 저런 천한 쓰레기촌 주민의 음식을 사주시는 겁니까?"
옆에 있는 에이단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아니, 이놈은 대체 어떻게 자라왔길래 이딴 사상을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할 수만 있다면 골목으로 끌고 가고 싶은데, 녀석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제법 많다.
어쩔 수 없지 대충 변명하는 수밖에.
"큼. 천한 쓰레기촌 주민 따위가 이곳에 들어오니 눈에 거슬리더군요. 그래서 전부 사서 내 눈에서 치워버린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제법 그럴듯한 변명이다. 에이단은 감탄한 듯 박수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랬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잭슨 님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군요. 하하하하!"
쓰레기 같은 새끼….
정작 쓰레기촌에 살아야 하는 건 아까 그 소녀가 아니라 바로 이런 놈이다.
이런 놈은 감방 안에 가둬놓고 군만두만 먹여야….
-아아. 알립니다. 곧 9시 경매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입찰을 희망하시는 분들께서는 지금 곧 경매장에 와주시기 바랍니다.
"경매장?"
이곳에도 경매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바깥에 있는 경매장하고는 다른 건가?
"하하. 마침 잘됐군요. 잭슨 님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갈 곳이 바로 경매장이었습니다. 이곳의 경매장은 바깥의 경매장보다 훨씬 진귀한 물품들이 나오지요."
"…아, 그렇습니까."
"오늘 올라온 것 중 제일 진귀한 게 미노타의 폭염 심장이라더군요. 하하. 저도 얼마에 팔릴지 기대가 큽니다."
순간 눈이 뜨여졌다.
미노타의 폭염 심장.
먹으면 화염 계열로 속성이 고정되지만, 미노타의 강대한 힘 중 하나를 얻을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이 팔린다니 왠지 흥미가 생긴다.
…과연 얼마에 팔리려나.
"어디 구경이나 가봅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