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43화
제143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집안.
이곳은 최정현과 딸인 서희가 함께 사는 조그만 아파트다.
주변에 널린 어린이용 장난감과 인형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최정현은 서희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정신없이 바쁜 아침을 보내고 있다.
"서희야. 야채 조금 남았는데, 마저 먹어야지?"
"시러! 이거 마덥써!"
"먹어야 튼튼해지지. 아~"
"서희는 튼튼해! 이런 것 안 먹어도 으아앍."
최정현은 억지로 서희의 입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서희의 볼이 빵빵해지더니, 우물쭈물하며 꿀꺽 삼켰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자 이제 어린이집 갈 시간이네?"
"웅! 어서 가자~"
우리는 손을 잡고, 어린이집 버스가 오는 도로변까지 걸었다.
저 멀리 노란 버스가 보인다.
썬키즈 어린이집.
서희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이름이다.
"안녕하세요. 서희 아버님."
"네. 안녕하세요."
"안녕, 서희야! 잘 지냈니?"
"웅! 생선님도 잘 지냈어?"
"생선님이 아니라 선생님이지. 호호."
아직 서희는 '선생님'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한다.
4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부모가 옆에서 한글을 가르쳐줘야 할 중요한 시기를 놓친 건 아닌지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은 5살이고, 곧 6살인데 그때부터는 어린이집에서 공부를 가르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 조금 나아지려나….
늘 서희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그만큼 쉽지가 않으니까.
"아빠 안뇽!"
서희가 앙증맞게 손을 흔들자, 최정현도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버스가 멀어지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도 전쟁을 잘 치렀구나'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아빠 노릇 힘들다아아아. 후우."
지난 주말 동안 운영 중이던 태권도장을 정리했다.
사실 운영했다, 라는 말도 쑥스러운 수준이다. 평수도 조그맸고, 다니는 아이들도 단 4명뿐이었다.
시설도 열악하고, 자리가 좀 구석이라 그런지 장사도 되지 않았다.
처음엔 잘되는 것 같더니, 1년 만에 시원하게 말아먹은 것이다.
"후우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그렇게 소파에 누워 각종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데,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인터폰을 눌러 확인해보니, 익숙한 로고가 보였다.
요즘 한창 인기인 '아크 스타'라는 게임을 개발한 유니온의 로고.
"아, 맞다. 내가 아침에 와 달랬지."
제일 널널한 시간대가 이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와달라고 했다.
근데 낑낑거리는 설치기사들이 조금 안쓰러워 보인다.
"에휴. 힘내자. 나만 힘든 건 아닌 것 같네. 다 힘들지 뭐."
최정현은 현관문을 열었다.
* * *
캡슐의 설치가 끝나자마자 최정현은 곧장 아크스타에 접속했다.
이미 사전조사를 한 번 해놓은 상태였기에 튜토리얼은 빠른 속도로 클리어할 수 있었다.
사실 게임도 곧장 좋아하곤 했기에 하루 동안 팬 사이트를 뒤지며 각종 정보를 찾았다.
[당신의 천성은 '친절한 인내의 군주'입니다.]
[건강 능력치 +20이 올랐습니다.]
"흐음. 친절한 인내의 군주네. 분명 이거 하고 맞는 직업이 근접 계열 직업이었지. 근데 건강이라니, 정말 나하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구나."
자신의 장점은 분명한 편이다.
건강.
아버지가 물려주신 튼튼한 육체는 많은 운동을 섭렵하게 만들었다.
태권도, 합기도, 유도, 주짓수 등.
물론, 지금은 옛날 같지 않다.
도박 빚을 지고 나서 상실감에 한동안 운동을 놓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운동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시곤 했는데, 어머니는 반대가 극심했었다.
다른 형제들도 못마땅해 했지만, 아버지만큼은 자신을 응원해주셨다.
그때의 고마움을 최정현은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하아. 아버지도 참. 무슨 선을 이런 곳에서 보신다고…."
아버지는 분명 '오르카 왕국'을 고르라고 했었다.
그 뒤 어디로 오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우선 간단히 체험이라도 해보려고 들어온 상황이다.
아까 아버지한테 오르카 왕국 어디로 가면 되는지 카톡을 남겨놨는데, 바쁘신지 아직 답장이 없다.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습니다.]
[시작의 마을 '뮬란'으로 이동합니다.]
[가상현실 세계 '아크스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희파파'님의 무운을 빕니다.]
이곳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은 '서희파파'다.
왜 이렇게 지었냐고 묻는다면 그냥 내가 서희 아빠니까.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슈우우욱.
세상이 밝아지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보이는 걸 보니 진짜 실감이 난다.
사실 튜토리얼에서도 느꼈지만,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완전 새로운 지구라고 불러도 될 수준인데."
허공에 주먹과 발차기를 휘둘러보았다. 쉭쉭. 슉슉.
"큭큭. 저 사람 좀 봐. 방금 시작한 초짜인가본데."
"야 옛날 생각나지 않냐? 너도 저랬잖아."
"아, 내가 언제."
"기억 못하면 말고."
"짜식이 맞을래?"
누군가 자신을 비웃으며 지나갔지만, 최정현은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이런 비웃음과 시선 따위 익숙한지 오래다.
자신은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이혼남에 애까지 딸린 도박 중독자였으니까.
'젠장. 그 도박만 아니었어도.'
도박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평화롭던 가정, 일자리, 돈, 마음의 평화 등 여러 가지.
하지만 얻는 것도 있었다.
비난, 멸시, 주변 사람들의 눈치 어린 시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에휴. 빨리 빚 갚아야지. 이럴 시간이 어딨어."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도움은 받지 않은 채 살고 있다.
그게 최정현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반드시 자수성가해서 서희를 번듯하게 키우겠다는 일념만이 남았다.
물론, 최근엔 그 방법을 경마장으로 바꿨을 뿐.
"크흠. 어디 보자, 그 필로스라는 사람을 찾아가면 퀘스트와 무기를 대여 받을 수 있다고 했었지."
최정현은 수비대장의 막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현이 아니냐?"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순간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무열이 삼촌?? 아니, 삼촌이 왜 여기 있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이다만."
* * *
우리들은 함께 뮬란의 수비대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행이 늘어나니 뭔가 북적거리는 게 기분이 좋다.
백무열은 옆에 있는 최정현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침 그도 필로스라는 놈이 있는 막사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 서희는 잘 크고 있지?"
"그럼요. 이제 5살이에요. 많이 컸죠. 하하."
"하하하. 고 녀석 진짜 귀여웠지. 갑자기 보고잡네."
한 4살 때였나.
서희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울곤 했었다.
무섭게 생겼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때는 몇 번 안아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카톡으로 사진 보내드릴게요."
"카… 그게 뭐냐?"
옆에 있던 백성찬이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 스마트폰 좀 쓰세요. 아직까지 2G폰 쓰면 안 불편하세요?"
"커흠. 원래 그런 건 허접들이나 쓰는 거다."
"나 참."
백성찬이 어깨를 으쓱거렸고, 백무열은 당당하게 걸었다. 옆에서 함께 걷던 최정현이 웃었다.
"사진은 문자로도 보낼 수 있으니까. 보내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필로스의 막사라는 곳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웬 남자가 갑옷을 입은 채 앉아있다.
그가 일어서며 우리를 맞았다.
"음? 자네들은 타르모랑 머머리가 아닌가."
이름이 호명된 두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필로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희 전역했습니다. 여행 좀 하려구요. 일거리 좀 얻으러 왔습니다."
"오~ 그래? 잘 됐구만 하하. 자네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 마침 딱 어울리는 임무가 있네. 그나저나 여기 대표가 누구지?"
백무열이 앞으로 나섰다.
"날세."
"음?!"
필로스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니, 아무리 내가 무섭게 생겨도 그렇지. 저렇게 놀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크흠.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아,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백무열'이라는 분이십니까?"
음? 이놈이 날 어떻게 알지…?
그와는 분명 초면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백무열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그렇네만. 자네는 날 어떻게 알지?"
"역시 그랬군요! 저희 뮬란의 병사라면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울브스 유적에 나타난 웨어울프를 목검으로 때려잡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정말 그 명성대로 풍채가 크시고 외모 또한 호방하시군요!"
"커흠. 뭐, 고맙네."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목검으로 웨어울프를 때려잡다니. 이야.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필로스가 백무열의 손을 양손으로 잡더니 위 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이러는 건지.
그래도 뭐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춘택이 녀석과는 달리 자신은 이런 인기를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아니, 삼촌. 설마 훈련소 나오셨습니까?"
옆에 있던 최정현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백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기를 준다길래."
"맙소사. 거긴 완전 비효율적이라고 들었는데. 차라리 여기서 무기를 빌리지 그러셨어요."
"잉? 여기도 무기를 주냐?"
"네."
"이 시부럴."
갑자기 나온 거친 발언에 필로스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뭐 거길 전역하셨으면 보너스 능력치는 많이 받으셨겠네요. 시간은 좀 걸려도 나쁘진 않아요."
"큼. 그래?"
어쨌든 보너스 능력치를 얻은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 덕에 이상한 혹을 많이 달았지만, 그래도 일행들을 만난 건 그 덕분이었으니 그냥 좋은 일로 생각해야겠다.
"큼. 사설이 길었군요. 임무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필로스의 말을 경청했다.
* * *
퍼걱-!
[퀘스트 <던전을 파괴하라!> 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던전의 보스 '레바 스컬'의 두개골이 깨졌다.
일행들은 뮬란의 북쪽에 갑자기 발생한 3개의 던전 중 한 곳을 배정받았다.
듣자 하니, 최근에 있었던 화산폭발의 영향으로 생성된 던전이라고 한다.
최정현도 사전조사를 하던 중 알게 된 사실이었고, 그것은 꽤 유명했다.
동영상으로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특히 그 검은 늑대와 거대한 황소의 대결은 진짜 최고였지.'
검은 늑대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도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아.스.라. 커뮤니티에선 그 사람이 '다크울프'라고 불린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최정현도 그런 스타 플레이어가 되면 떼돈을 벌 수 있겠지만, 당장 그는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한 아이의 아빠였다.
그는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용병을 할 작정이었는데, 나름 보상이 쏠쏠하고 좋은 아이템을 획득하면 큰돈에 팔 수도 있었다.
듣자 하니 정말 비싼 아이템은 아파트 한 채 값이라고 한다.
한탕 크게 하면 당분간 생활고는 걱정해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 더럽게 약하네. 안 그러냐. 성찬아."
"그러게요. 이건 뭐 몸도 안 풀리네."
"회장님 던전을 좀 더 센 곳으로 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난 이놈들이 머리칼이 없는 게 마음에 드는데."
"훗. 내 쌍수 단검에 맥을 못 추더라고."
"우리 '묵찌빠 삼형제'한테 이 정도는 껌이지. 안 그러냐? 지킬아?"
"그런 이름은 언제 붙였습니까? 유치하게. 안 그래 바로크?"
"…바로크는 형제 좋다."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 용병은 떼려치워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도저히 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물론, 레벨이 낮은 것도 있지만, 자신의 레벨은 현재 12였다.
나름 맨손 격투에 자신이 있어서 격투가라는 직업을 고른 것이었는데, 이들 앞에서는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많이 녹슬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차이 날 줄이야.
'하아. 어쩌다보니 버스를 타버렸지만. 뭐 나쁘진 않네.'
마침 백무열이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
"자, 정현아 이거 받아라."
"응? 이,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던전을 클리어하고 얻은 건틀렛 하나와 여러 부산물이었다.
건틀렛이야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쳐도, 각종 보석들이나 몬스터의 재료는 받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버스까지 탔는데.
백무열이 조용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요즘 네가 많이 힘들다고 들었다. 서희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아니, 그건…."
"됐고 받아라. 우린 무기랑 방어구만 있으면 되니까."
손에 한가득 쥐여 주고 뒤돌아서는 백무열을 보면서, 최정현은 가슴 한곳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씁. 인생 아직 살만하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죽는 게 뭐가 힘들어. 사는 게 어렵지.'
잠깐이지만 힘든 시기에 안 좋은 생각도 했었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과 함께라면 그 '반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더 어려워 질 수 있을 것 같아서.
"큼."
최정현은 훌쩍거리는 코를 문지르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일행 중 한명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환하고 밝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이 형씨! 빨리 나가자고! 하하."
사람에겐 누구나 각자의 안식처가 있다.
어쩌면 저들은 내 새로운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겠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갑니다~!"
리즈야 다시 갱신하면 되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