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39화
제139화
그 후로도 제법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은 '앵그리 몽키'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몬스터들이 있었다.
기괴한 표정을 한 나무 괴수들.
'스크림 엔트'가 그중 하나였고, 그들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뿌리로 우리들을 위협해왔다.
하지만 나무의 속성을 가진 그들에게 태양의 불꽃은 완벽한 천적이었다. 우리들은 너무나 간단히 그들을 제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에요. 저기가 바로 쓰레기촌이에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은은한 달빛에 비친 허름한 마을이 있었다.
그 이름처럼 쓰레기가 가득하거나 그렇지는 않았고, 조금 못사는 마을처럼 보였다.
마을 주변에는 석궁들이 제법 있었는데, 아무래도 몬스터의 침략을 막으려는 의도인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낡았군. 진짜 포트렌이랑 차이가 심하긴 하네.
입구는 역시 누군가가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그곳으로 다가가자, 그가 경계하듯 외쳤다.
"누구냐!"
우리를 향해 겨누어지는 창. 그 끝이 녹슨 걸 보니 더 안타깝다.
그들의 골격과 외형은 삐쩍 말라 TV에서나 보던 기아나 난민들을 직접 대면한 것 같았다.
"델마 아저씨! 저에요. 헬레나예요!"
"아니, 너…? 여긴 어떻게?"
"아저씨 죄송한데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요. 아버지를 뵙게 해주세요."
"이, 이 시간에…?"
"급한 일이에요. 마을 사람들의 생사가 걸렸어요."
"어, 그,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델마는 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는지, 빠르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아직 늦은 시간이라 눈을 비비며 나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소란에 아이들이 함께 깨버린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새삼 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헬레나. 이게 얼마 만이냐. 그동안 고생 많았지?"
"우와, 헬레나 누나 완전 이뻐!"
"못 본 사이에 정말 아름다워졌는걸? 하하."
마을 사람들은 헬레나를 맞이하며 웃기 바빴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풍족해 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갑자기 인파가 갈라지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낡은 회색의 헝겊으로 눈을 가린, 지팡이를 짚은 노인.
"아버지. 저 왔어요."
"오오, 헬레나!"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흑흑….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네가…."
"아니에요. 아버지. 전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두 부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도 제법 코끝이 찡해졌다.
메테우스에서 그녀의 사연을 들었지만, 참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이야기다.
마을의 보전을 위해 딸을 팔아야했던 장님의 아버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지혜로운 딸.
두 사람의 모습은 한편의 영화가 보여주는 처절하도록 슬픈 장면이었다.
"아버지.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떠나야 한다니."
"실은…."
헬레나의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헬레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 그런…."
"죄송해요. 제가 멋대로 일을 벌여서…. 하지만 이분들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마을 사람들이 정착하도록 도와주신다고 약속했거든요. 지금 야밤을 틈타 도망치면 에이단도 모를 거예요."
아니, 저기 난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그녀는 내 눈치를 한 번 보더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분들 엄청 강하세요. 아마 저희 마을 사람들을 잘 지켜주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직접 봤어요."
완전 제멋대로인 여자다. 일단 데려오겠다고는 했지만, 지켜주겠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헬레나의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은 채 골몰하더니 말했다.
"그건 안 된다."
"네? 아버지. 하지만…."
"우리가 떠난다면 그분께서 곤경에 처하신다."
그분…? 누구를 말하는 거지?
"너도 알지 않느냐. 그분께서는 귀족의 지위를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남몰래 후원해주셨다. 우리가 지금껏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 덕이지. 만약 우리가 떠나버린다면 이번 대선에서 그분은 곤경에 처하게 될 거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는 알겠다.
헬레나의 아버지는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같은 생각인 모양.
헬레나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단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우리도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 제발 다시 생각해주세요. 제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개만 푹 숙였다.
당장 그들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음에도 그들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새삼 그들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진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들에게 이토록 진심 어린 충성을 받는단 말인가.
누군지는 몰라도 한 번 만나보고는 싶다.
"딸아.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가 왜 이곳을 지키는 것인지. 아직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아버지. 제발…. 그런 오래된 미신 따위 잊어버려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따위…."
하지만 그때였다.
초감각으로 올라간 청력이 거친 쇳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였고, 철부츠가 땅과 맞물려 나는 소리였다.
제법 많은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심상치 않았다.
발걸음이 분주한 걸 보니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보게들. 미안하지만 곧 이곳에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네."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
"벼, 병사들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헬레나가 묻자,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 늦은 모양이다.
절그럭. 절그럭.
갑작스러운 쇳소리에 모든 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을 입구 너머로 횃불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것은 단단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
헬레나가 저들을 알고 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에이단의 사병들이에요. 역시 여길 먼저…."
마침내 그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것이 제법 실력자들처럼 보였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헬레나. 역시 여깄었나."
"…에이단."
"쯧. 여전히 말버릇이 없군. 낭군님이라 불러도 모자랄 판에."
"제가 말했죠. 전 당신을 내 남편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비록 당신의 아내가 되었어도 전 당신을 섬기지 않을 거예요."
나와 일행들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근데 낚싯대를 든 키스가 조금 이상하다.
아까부터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불안하다.
그는 나서면 안 된다.
그럼 여기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키스의 떨리는 손목을 잡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이내 떨림이 멎은 키스의 손.
우리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헬레나. 너는 이제 나의 아내다. 왜 자꾸 이 쓰레기촌에 들락날락거리는 거지? 쯧. 여전히 여기는 더럽군. 형편없고."
"내가 내 아버지를 만나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그리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
잠깐이지만 뒤틀린 에이단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후후. 좋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순순히 돌아가자. 헬레나."
"……."
"내가 왜 병사들을 이끌고 왔는지 모르나?"
그제야 헬레나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대신 마을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요."
"물론이지. 너만 잘 따라와 준다면 말이야. 후후."
헬레나가 뒤돌며 마을사람들을 굽어보았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저 가볼게요. 아버지."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들이 선택한 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조심히 가거라. 딸아…. 그리고 미안하구나. 크흑."
"울지 마세요. 저 또 올 거예요."
"그래. 난 언제든 여기 있을 거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했고, 마을 사람들과도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우리가 있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키스였지만.
"……."
"……."
둘은 그저 바라만 본 채로 서로의 마음을 전달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헬레나는 빠르게 시선을 돌려 에이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사뭇 슬퍼보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이 되었을까.
"잠깐!"
시부럴….
결국, 이 망할 놈이 사고를 칠 모양이다.
혹시나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내 뒤에 있던 키스였다.
갑자기 하늘 위로 찌가 날았다.
쉬이이익-!
그것이 향한 방향은 에이단의 뒷덜미.
저 썩을 놈이….
하지만 그의 바늘은 주변에 있던 한 병사로 인해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애초에 왜 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에이단을 인질로 잡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넌 뭐냐. 하찮은 낚시꾼 주제에."
에이단의 물음에 키스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헬레나의 연인이다!"
"연인…?"
"그렇다. 그녀와 나는 사랑하는 사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보는 키스.
그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뭐 어쩌라고.
아놔, 환장하겠네.
사고는 자기가 저질러놓고 왜 나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하아. 어째 일이 점점 꼬여간다.
"헬레나…. 역시 바람을 핀 거였나! 네년이 감히!! 감히!!!"
에이단의 눈이 광기에 휩싸인다.
꼭지가 돌아버린 모양인데.
그럴만하다.
젠장 미쳐버리겠네. 어떡하지…?
"크으으윽.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 여봐라!"
"옙!"
"당장 저놈과 헬레나의 아버지를 내 눈앞에 데려와라!!"
병사들이 각자 검을 뽑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협했다.
너무나 순순히 잡힌 헬레나의 아버지가 에이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서 키스도 무릎이 꿇려졌고, 헬레나가 눈물을 흘리며 에이단을 향해 빌었다.
"미, 미안해요. 에이단. 다신 안 그럴게요. 두 사람을 제발 용서해줘요. 제발. 제발…."
손바닥이 닳을 정도로 빌고 비는 그녀를 보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저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설마, 아니겠지.
진짜 죽일 리가….
"헬레나. 똑똑히 봐라. 네가 한눈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에이단이 거칠게 한 병사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그게 맞는 것 같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제발! 에이단 제발!"
그녀가 꿇었던 무릎을 피며 에이단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손쉽게 내팽개쳐졌다.
에이단이 다시 한번 검을 들었다.
…쯧. 어쩔 수 없지.
퓨웃!
나는 손목에서 거미줄을 발사해 칼을 튕겨냈다.
"큭. 누구냐! 대체 누가…!"
"넌 입 좀 다무는 게 좋을 거다."
"뭐, 뭣…?! 네놈은 대체 누구냐!"
"나 말이냐?"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일행들이 모두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옆 동네 촌장이다. 이 썩을 놈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