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34화
제134화
조셉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협박했다.
그는 현직 파파라치였고, 비록 돈 때문이지만 몰래 찍은 사진으로 누군가를 협박해 종종 돈을 뜯어낸 적도 많았다.
그는 생각보다 능숙한 협박의 귀재였고,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그, 그게 무슨! 키스를 납치했다구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 사람은 쉽게 잡힐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왠지 그녀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휘청이는 다리를 보니, 정신적인 충격은 꽤 있는 모양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 거짓말이 아니다. 반은….
"거, 거짓말! 증거가 있나요…?"
조셉이 품속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키스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온 사진들.
하얀 붕대를 온몸에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르신이 갑자기 찍으라고 해서 찍긴 했는데…. 이걸 이렇게 쓰라고 하실 줄이야.'
곧장 사진을 건네받은 그녀가 또 한 번 다리를 휘청거린다.
"이, 이건…!"
조셉은 미리 생각해둔 대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 말은 사실이다. 현재 너의 연인 키스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당신을 어떻게 믿죠? 이건 그냥 붕대를 감고 있는 거잖아요. 물론, 키스의 얼굴이 어렴풋이 맞긴 하지만…. 이걸로는 당신의 말을 모두 믿을 순 없어요."
과연 똑똑한 여자다.
키스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참고로 이 정보는 고문을 통해 알아낸 것이다.
일명 간지럼 고문.
물론 고문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어르신이다.
"이봐. 내가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 그야 내가 에이단 백작의 부인이라 어디서 주워들은 거겠죠!"
"그럼 내가 이곳에 어떻게 나타났을 것 같나."
"그, 그건…."
"우리가 키스에게 고문해서 알아냈던 거다."
"고, 고문이라구요?!"
헬레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조셉이 한숨을 쉬며 연기를 이어갔다.
"믿지 않으니 이걸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군."
사실 이것까지 쓰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그녀에겐 조금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셉은 품에서 또 다른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이번에 꺼낸 것은 피를 철철 흘리는 키스의 모습.
이것은 그의 스킬 중 하나인 사진 합성을 통해 조작한 것이었다.
사진엔 여러 흉흉한 고문 도구들이 즐비했고, 오로지 피를 흘리는 키스만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협박의 마지막 단계. 증거 제출.'
평소 그가 즐겨 하는 협박에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가 바로 '공포심 조장'. 그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납치범이라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약점 공략'.
이것은 그녀의 약점이 '키스'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수월히 할 수 있었지만, 이것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화룡점정을 찍을 수밖에 없다.
조셉은 그녀에게 합성한 사진을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 대장님이 이렇게 전해달라더군."
사진을 본 헬레나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돈 내놔. 아니면 뼈와 살을 분리시켜주지."
눈앞의 여인이 휘청이더니 결국 쓰러졌다.
조셉이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너무 심했나…?"
공갈 협박이 난무하는 밤이 깊어갔다.
* * *
다음 날 새벽.
오늘은 일요일이다. 첫째 녀석과 약속한 등산을 가는 날이었는데, 댓바람부터 부엌이 분주하다.
며느리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아버님. 저 때문에 자꾸 늦어져서…."
"괜찮으니 천천히 하거라.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휴. 그래도 빨리 할게요."
며느리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자기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거 색깔이…."
강현이는 여자 옷처럼 보이는 등산복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투덜거렸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분홍색의 등산복이 녀석의 뱃살에 착 달라붙었고, 나는 첫째의 늘어진 뱃살을 꼬집으며 잔소리를 했다.
"살 좀 빼라. 이 녀석아."
"제가 그럴 시간이 어딨습니까."
"쯧. 개인 이비인후과라면서? 그거 닫고 싶을 때 닫고, 열고 싶을 때 여는 거 아니냐? 나 같으면 시간 쪼개서 운동이라도 하겠다. 이놈아."
핀잔에 무안했는지, 강현이가 입맛을 다셨다. 뒤에서 맞장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쵸? 역시 아버님밖에 없다니깐. 여보. 내가 살 좀 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지금 운동하러 가잖아."
"등산 끝나면 힘들다고 당분간 운동 안 할 거면서."
"……."
정곡을 찔린 강현이가 헛기침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
마침 도시락이 완성되었는지, 며느리가 앞치마를 풀고 있었다.
* * *
우리들은 늘 가던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제일 가깝기도 하지만, 사실 서울에 있는 산 중에서 이곳보다 높은 곳은 없기도 했다.
이제 겨울인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고, 차에서 내리니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저거 서희 아니야?"
뒤에 있던 강현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며느리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정말이네요? 근데 도련님이 등산하실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뭐, 정현이도 어쩔 수 없었겠지.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하긴 그렇네요. 그 생각을 못했네."
두 내외가 말을 주고받았다.
반면, 나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 손주가 아장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할아부지이이~!"
폭.
따뜻한 털 오라기의 감촉이 무릎 사이로 느껴졌다.
서희는 온몸에 털옷을 무장하고 있었다.
장갑에 있는 하얀 털장갑이 앙증맞게 느껴진다.
나는 서희를 번쩍 들어 올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으랴아~ 우리 서희 많이도 컸구나. 하하하하!"
꺄르르- 웃는 손녀를 보니 피곤이 싹 가신다.
서희는 똘똘하기도 하지만 유독 나를 잘 따라서 더 좋았다.
앞에서 정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
"그래. 넌 요즘 어떠냐."
"저도 잘 지냈죠. 근데 등산복 누가 골랐어요? 왜 모두 핑크색으로…."
"미도가 골랐다."
"아하."
녀석은 금방 수긍하는 듯했다.
둘째도 미도의 분홍색 사랑은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근데 서희는 어쩌자고 데려온 거냐. 등산하려면 힘들 텐데…?"
"하아.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버렸더라구요. 맡길 사람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죠 뭐."
밑에서 서희의 귀엽지만 당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도 뜽산 할 수 이써!!"
그 모습에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서희도 다 컸지. 암!"
"내가 앞장썰 거야! 다들 서희만 따라와!"
제법 위풍당당한 모습에 미소가 만개한다.
정현이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아기들 업을 때 쓰는 띠였다.
"그거 쓸려고? 서희는 걸어서 올라갈 기세 같다만."
"아마 곧 쓰게 될 거예요."
우리들은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희가 있다 보니, 속도 조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희는 당찬 걸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혹시 넘어지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정현아."
"예. 아버지."
"재혼 생각은 없는 거냐?"
"……."
"서희 생각도 해야지."
둘째인 정현이는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말았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정현이 잘못이다.
녀석은 지금 태권도 도장을 간신히 운영 중이고, 도박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물론, 이혼의 사유도 그 도박 빚 때문이다.
"뭐, 좋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제가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라서요. 또 저도 나이가 있는데, 어디 만나기가 쉬운가요."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망할 놈이 도박만 안 했다면 제법 괜찮은 조건이었을 텐데….
"쯧. 술로 인한 숙취는 술로 해장하듯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는 법이다."
"어째 비유가 조금 이상한데요. 아버지."
"말이 그렇다는 거야. 이놈아. 외모만 보지 말고 착한 사람을 골라. 차가 밖에서 보면 다르지만 안에서 보면 다 똑같아요."
"아이, 진짜. 저도 안 만나고 싶어서 안 만나는 게 아니라구요. 거참."
욱하는 마음에 뒤통수를 한 대 갈기려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서희의 목소리였다.
"왜?"
"어부바 해조!"
* * *
결국, 서희는 내가 업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서희가 나한테 업히고 싶단다. 물론,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버지.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업을게요."
"아니다. 평소에 단련을 해둬서 괜찮다."
"에이. 그래도…."
"괜찮다니깐. 이놈아."
아직도 집에서는 내가 등산할 때 10kg 모래주머니를 찼던 것을 모르고 있다.
물론, 오늘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오지 않았다.
대신 손녀를 차고 있지만.
"이랴! 이랴!"
허리에서 요동치는 서희의 바운스가 느껴진다.
정현이가 안절부절못하며 서희에게 말했다.
"서희야, 그러면 할아버지 다치니깐 얌전히 있어야지?"
"시끄러 몽총아!"
"아니, 서희야 아빠한테 그런 말 쓰면…."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맞는 말 했구만. 뭐."
"하아. 아버지…."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젓는다.
뒤를 보니, 여전히 헉헉대며 올라오는 강현이가 보였다.
며느리는 뒤에서 그의 등을 떠밀며 올라오고 있었다.
…쯧쯧.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해두지.
어째 애를 업고 올라가는 나보다도 체력이 안 좋다.
오늘을 계기로 녀석이 운동을 좀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나는 다시 정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이놈은 멀쩡하구먼….
사실 허우대는 멀쩡한 놈이다.
나를 닮아서 그런지 운동을 곧 잘했고, 각종 운동도 섭렵했다.
물론, 몸은 튼튼한 만큼 정신도 튼튼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 생각이지만 이놈은 똑부러지는 여자를 만나야한다.
그래. 수정이처럼.
"너 만나는 여자는 없지?"
"아이 진짜.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귀에 딱지 앉겠어요."
"야 이놈아. 너 소개해줄 여자 있어서 그러는 거야!"
퍼억-!
신랄한 돌려차기가 그의 엉덩이를 강타한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서희가 꺄르르- 거리며 좋아했다.
정현이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소, 소개요…?"
"그래. 아크스타 알지? 일단 그거부터 시작해라."
"예? 그걸 왜요?"
"거기서 만날 거니까."
"아니, 그러니까 왜 하필 거기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이놈아!"
그렇게 정현이는 두 번 더 엉덩이를 맞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내가 며느리로 점찍은 아이니까. 잘 좀 해봐라. 또 도박하다가 탕진하지 말고 이 썩을 놈아. 엉? 그 뭐시냐? 젊은 친구들처럼 데이트도 하고, 동물원 같은 곳도 가고? 엉?"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도 동물원 가본 적 있어!"
나는 자상하게 웃으며 서희에게 물었다.
"그래? 재밌었니?"
"웅! 재밌었어! 아빠랑 갔었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
"오, 그래? 동물들도 많이 봤겠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말밖에 없었어! 하지만 말들이 막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어! 아빠가 돈 벌었다고 엄청 좋아했어!!"
정현이가 뒤로 걷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