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32화
제132화
툭. 툭. 투둑.
부드럽지만 절제된 움직임.
25평 남짓한 너비의 밭을 문워크로 이동하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나는 아이올리아 씨앗을 골고루 뿌리며 흙먼지 속을 가로질렀다.
그 기이하고도 신기한 모습에 김수정이 웃으며 물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씨 뿌리기네요."
"나도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
"이건 무슨 농사법이라고 불러요?"
"문워크 농사법. 참고로 모두 수작업이지."
"푸하하하!"
내 진지한 농담에 김수정이 배꼽을 잡았다.
신기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미유도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당신의 발재간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당신을 따라 해봅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잘 안된다며 우울해합니다.]
꽤 많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따라 하고 싶었으면 잘 안된다고 우울해하는 건지.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나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카미유. 안 되는 게 당연한 거다. 나도 얼마나 많이 연습한 건데."
[반딧불성, '카미유'가 나중에 자세히 배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참나. 이게 뭐라고 그렇게 열의를 보이는 건지.
"알았다. 자주 보여줄 테니 낙담하지 말거라."
[반딧불성, '카미유'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무두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취익…. 잘 안 되는군.]
'뭐야, 너도 하고 있었냐…?'
[크흠! 이곳이 조금 넓어서 심심했을 뿐이다!]
'이곳? 너 지금 어디 있는데.'
[크륵. 나도 모른다. 그냥 분홍색 꽃잎이 휘날리는 이상한 집이 하나 있길래. 좀 멀리 나와 봤다. 근데 여긴 어딘지 모르겠군. 끝이 없어.]
순간 소름이 끼쳤다. 분홍색 꽃잎이 휘날리는 이상한 집.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만 같았다.
이 자식 설마 별 다방(多房)에 있었던 건가…?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처음부터였는데 그건 왜 묻지…?]
'며칠 전 그곳을 간 적 있거든.'
[아쉽군. 네놈의 사지를 몽땅 찢어버릴 기회였는데….]
'망할 놈 같으니라고. 네놈이 나타나지 않은 거잖냐.'
[크륵. 이곳의 끝이 어디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혹시 빠져나갈 곳이 있나 싶어서 말이야.]
별 다방(多房)의 끝이라….
새삼 나도 궁금해졌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뭐 발견한 거라도 있냐?'
[취이익. 없다. 하찮은 풀벌레들뿐이군. 10일째 뛰었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끝없는 들판과 밤하늘의 별이 전부로군.]
'흠. 그렇구만.'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계속해서 씨앗을 뿌렸다.
김수정이 돕겠다고 말했지만, 그냥 거절했다.
그렇게 모든 씨앗을 뿌리자, 등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고, 허리야."
허리를 두들기며, 밭을 나오는데 김수정이 차가운 물을 건네왔다.
나는 그것을 받아 벌컥 원샷을 했다.
"크아아아-! 조오타!"
"고생하셨어요. 아버님. 농사도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제가 먹는 쌀이랑 야채들이 이렇게 힘들게 나왔을 걸 생각하니, 농부 분들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잘 모를 법도 하지."
"저 이제 밥이랑 반찬도 안 남기고 꼭꼭 씹어서 먹으려구요."
"그 마음가짐이면 되었다. 껄껄."
…참하기도 하지.
심지어 착하기까지 하다.
어른들에 대한 예의도 깍듯하고, 의사니까 머리가 똑똑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 남편과는 이혼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것을 감안해도 1등 며느릿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1등 시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물론, 이것은 내 바람이지만.
"수정아."
"네."
"요즘 만나는 사람 없지?"
"네? 하하…. 그렇죠 뭐."
…빨리 둘째 놈을 만나봐야겠군.
나는 이곳으로 둘째를 끌어들일 생각이다.
조만간 둘은 이곳에서 맞선을 보게 될 것이다.
* * *
사락.
고된 노동 끝에 100평에 이르는 만드라고라를 모조리 뽑아버린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것은 플로라가 건네준 책.
그녀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마력 발아의 비법이 적힌 책이다.
읽어보니 여기엔 오르카 왕실의 정원사로 일했던 그녀의 기록이 약간이지만 남아 있었다.
그녀의 종족은 하이 엘프였고, 그 누구보다 인간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본디 고귀한 엘프의 피를 타고난 다섯 가주들 중 한 명이었는데, 오르카 왕국의 1대 왕인 칼레이의 둘째 공주였던 아이샤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플로라는 태어났고, 결국 오르카 왕실은 그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플로라의 부모님은 왕실의 정원사를 자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난 500년간 대대로 오르카 왕실의 정원을 책임졌고, 플로라 또한 말년에 케레노스를 만나며 은퇴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두꺼운 책을 덮자, 메시지가 떴다.
띠링-!
[비전 스킬, '마력 발아'를 습득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의 종족이 '엘프'가 아닙니다.]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마력 발아'의 성능이 감소합니다.]
[추후, 당신이 가진 비전서를 엘프들에게 넘겨줄 시, 그들은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니 플로라가 떠오르는군.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이올로스를 만나 함께 성유계에서 지내고 있겠지만, 걱정이 조금 되었다.
며칠 전 후에라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이올로스는 강하니까 괜찮겠지."
성유계가 천계와 명계의 전장이 되었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곧장 마력 발아의 정보창을 열었다.
마력 발아
등급: 영웅
마력 소모: 10%
고귀한 엘프의 피를 가진 다섯 가주 중 하나였던 매그너스의 고귀한 힘 중 하나.
그는 모든 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또한 모든 식물들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정 범위에 있는 식물들의 성장을 빠르게 촉진 시킵니다.
-식물을 성장시킬 때마다 자연 에너지가 축적 됩니다.
-소모되는 마력이 늘어날수록 범위가 증가합니다.
*현재 당신은 엘프가 아니라서 성능이 절반으로 감소한 상태입니다.
종족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일단 이 스킬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시험 해보기로 했다.
[비전 스킬, '마력 발아'를 사용합니다!]
[당신의 몸이 자연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책에 적힌 내용대로 땅을 짚자, 엄청난 생동감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자연이 살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 이것이 아마 [자연 에너지]라는 것일 거다.
생전 알렉서스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는데….
어쩌면 그와 나는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갈지도 모르겠다.
그와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니깐.
전방에 뿌려놓은 씨앗의 자연 에너지가 느껴진다. 오밀 조밀하지만 느껴지는 작은 기운.
…이건가 보군.
손에서 퍼져 나간 마력이 밭으로 퍼져 나갔다.
아까 내가 씨를 뿌렸던 25평을 간신히 만족하는 범위.
조금씩 싹이 트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내가 알고 있던 아이올리아 꽃밭이 완성되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아이올리아가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식물의 성장에 성공하였습니다!]
[특수 능력치 '자연 에너지'가 추가되었습니다.]
[당신에게 394의 자연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깜박이는 상태창 표시를 보며, 나는 오랜만에 그것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 잭슨
레벨: 131 [수준높은] 날씨 요리사
칭호: 뮬란의 영웅 외 8개
힘 252(+120) / 민첩 252(+125)
건강 138(+135) / 지식 354(+110)
솜씨 214(+0) / 초감각 227(+0)
카리스마 109(+0)
-자연 에너지 : 394
능력치 포인트: 0
무게: 71/100
화염 속성 내성 +100%
거미 독 내성 +100%
얼음 속성 내성 +50%
"자연 에너지라…. 어디에 쓰이는 건지 알 길이 없구만."
프로메테우스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듯, 신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카리스마가 언제 이만큼 오른 거지.
"파티를 많이 해서 그런가? 흠. 근데 한 달 반 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군."
이렇게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가 20개의 추가 능력치를 가졌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발전 속도였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이 정도로는 프로메테우스가 얘기했던 기준치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조금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소룡이와의 대결도 준비해야 되겠지."
"으음…."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던 김수정이 눈을 떴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이 커다래졌다.
"우와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
흙이 묻은 오른손을 쥐었다 피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그는 포트렌으로 보냈던 조셉이었다.
* * *
아삭.
우리들은 함께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마침 헨리의 농장에는 제법 많은 과일들이 남아 있었고, 우리들은 그것을 합당한(?) 자격으로 먹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됐냐."
"우선 어르신이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의뢰한 그 귀족에게는 아직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음, 잘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곳은 넓은 밭이 한꺼번에 보이는 원두막.
나와 조셉. 그리고 김수정은 그곳에 앉아 아이올리아를 뜯어먹는 '풍희'를 구경했다.
"푸우우우웅~♡"
[바람의 신수, '풍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음, 조금씩 더뎌지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잘 오르는군.
풍희의 레벨은 방금 48을 찍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덩달아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만개한다.
처음 미도를 품에 안았을 때가 떠오른달까.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조셉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가 말이냐."
"끙. 조금 더 돈을 벌 방법을 알려주신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제가 귀족의 의뢰도 반쯤 포기하고 온거구요."
"내가 그랬나…?"
"…저 화낼 겁니다? 우리 쌍둥이들 분유 값이 걸린 일이라구요."
조셉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정색을 했다.
이놈에겐 농담도 못하겠다.
"쯧. 재미없는 놈. 농담도 못하냐?"
"제가 기자라 팩트를 좋아해서요."
"확 그냥. 팩트로 조져버릴까 보다."
입안 가득 과일을 넣고 오물거리던 김수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오우으예요."
"…뭐라고?"
그녀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더니, 과일을 꼴깍 삼켰다.
"저도 궁금하단 말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일단 포트렌으로 가야겠지. 가서 그 바람난 귀부인을 만나 볼 거다."
"오~ 귀부인을요? 그리고요…?"
김수정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저런 눈빛을 한다는 건 진짜 궁금하단 뜻이었다.
나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기를 쳐야겠지."
우리는 그녀를 등쳐먹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