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31화
제131화
지나가던 한 성좌.
익숙한 문장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지난 머머리와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 중 갑자기 뚱딴지같이 나타나서는 여장을 하라는 개소리를 짖던 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놈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넌 뭐하는 놈이냐?"
[지나가던 한 성좌가 그건 알 거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ㅇ…. 흡!"
날카로운 웨어울프의 이빨이 서늘하게 맞닿으며 소리를 냈다.
하마터면 목검을 쥔 오른손을 뜯어먹힐 뻔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나가던 한 성좌가 당신에게 과업을 제안합니다.]
"뭔 개소리… 흐억!"
이번엔 날카로운 발톱이 앞면을 할퀴었다.
백무열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가슴이 패이며 피가 철철 흐르고 말았다.
얼마나 강한 공격인지 그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1/3이 닳았다.
"크윽. 이 망할 똥개 놈이…."
거리를 벌린 백무열은 노기 서린 눈으로 웨어울프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이성을 잃은 웨어울프는 광기가 형형하게 어려 있다. 다행히 이곳으로 걸어오지는 않는다.
그래. 걸어오지는.
"크하아앍!!"
"시부럴 놈이 뛰어오네."
엄청난 속도로 뛰어온 웨어울프가 연속적으로 발톱을 휘둘렀다.
한 번 피 맛을 보더니 미쳐버린 모양이다.
백무열은 가까스로 목검으로 공격을 빗겨냈지만, 거기까지였다.
공격도 하지 못하고 수비로만 일관하던 백무열은 또 한 번 베이고 말았다.
투둑.
흘러내리는 피.
이번엔 왼팔이다. 다행히 오른손잡이라 목검은 들 수 있었지만, 그래도 치명상이었다.
어느새 생명력은 절반이 넘게 닳아 있었다.
[지나가던 한 성좌가 새로운 과업을 달성하겠다고 약속하면 힘을 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미친놈이. 과업이고 나발이고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지켜보고만 있냐??"
[지나가던 한 성좌가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씨댕."
콰아앙!
바위를 등진 백무열의 뒤로 서늘한 발톱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웨어울프의 발톱은 바위를 가를 정도였지만, 목검 하나로 그것을 흘려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역량이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나가던 한 성좌가 과업이 싫다면 여장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콰자자작.
날카로운 발톱이 바위를 종잇장처럼 베며 날아들었다.
백무열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웨어울프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런 변태 같은 놈이…. 딴 놈 알아봐라!!"
[지나가던 한 성좌가 당신을 흥미롭게 쳐다봅니다.]
웨어울프는 다시 한번 달려들었고, 그렇게 수십 합을 나누었다.
거의 피하는 것이 전부였고, 정말 위험한 것은 흘리기도 했다.
누가 본다면 기상천외한 일이라며 감탄을 했을 테지만, 정작 공격을 당하는 백무열은 죽을 맛이었다.
퍼어억!
웨어울프의 뒷발차기가 강한 파공음을 낳으며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어느새 생명력은 10%도 남지 않은 상황. 승산은 없었다.
이미 오랜 전투로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크윽. 시부럴…. 설마하니 똥개한테 물려 죽게 될 줄이야."
물론 진짜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산에서 멧돼지도 때려잡은 적이 있는 백무열에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웨어울프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허리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서늘하게 미소 짓는다.
"크르르륵."
"뭘 봐. 이 똥개 새끼야."
딱콩!
그의 손에 쥐어진 목검이 웨어울프의 이마를 때렸다.
[지나가던 한 성좌가 당신의 패기에 폭소를 터트립니다.]
웨어울프는 화가 났는지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벌렸다.
하지만 백무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욱!
"크아아앍!"
오른 눈을 찔린 웨어울프가 괴성을 질렀고, 힘이 빠진 틈을 타 백무열은 빠져나왔다.
제법 치명적이었는지, 웨어울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놈의 오른 시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크롸아악!!"
또 한 번 날카로운 발톱이 날았지만, 원근감이 없어져서 닿지 않았다.
백무열은 놈의 오른 시야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퍼억! 퍽퍽!
"크르르륵!"
"어이쿠 무서워라."
놈이 고개를 돌리자 백무열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연속 공격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신도 죽을 것이다.
현재 남은 생명력으로는 살짝만 스쳐도 죽을테니까.
하지만 그때였다.
"아우우우우-!!"
[은빛 웨어울프, 실버팽이 알 수 없는 힘을 끌어올립니다.]
[실버팽의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1.5배 증가합니다.]
콰아아아아-!
놈의 주변으로 끈적하고 이질적인 것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악몽처럼 지독히도 검은 기운이었다.
백무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건 또 뭐여. 더 잡기 어려워졌네. 크흠."
그냥 도망쳐버릴까.
하지만 변태같은 놈이 말했다.
[지나가던 한 성좌가 당신에게 <몽둥이의 가호> 의 권능을 허락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동의 없이 이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몽둥이의 가호…?"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이 있긴 했다. 쓸 일이 없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
하지만 저 변태 놈이 순순히 힘을 빌려주다니, 조금 찝찝한 것은 사실이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지나가던 한 성좌가 힘을 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꿍꿍이가 뭐냐."
[지나가던 한 성좌가 꿍꿍이는 없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던 한 성좌가 그냥 당신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진짜 변태인가."
백무열이 거머쥔 목검에 힘을 줬다.
순간 엄청난 기운이 그의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
[성좌 스킬, '몽둥이의 가호'를 사용합니다!]
[거머쥔 목검의 공격력이 2배로 증가합니다.]
[나무 목검은 공격속도가 3배로 증가합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한 목검은 부러지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힘이 소폭 상승합니다.]
트득. 트드득.
아래에 있던 땅이 갈라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힘이군.'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몽둥이를 좋아하는 변태라는 것 말고는 이놈의 정체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인간이 아닌 건 확실해. 이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힘이야.'
이런 능력을 자유자재로 줄 수 있는 것은 신이라는 존재밖에 없을 것이다.
새삼 저 변태 놈이 다시 보였지만, 일단 눈앞의 웨어울프 놈이 먼저다.
"백무열 교관!"
발소리가 뒤섞인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가 돌아갔다.
훈련소장 쿤타.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아까 도망쳤던 7조와 8조의 훈련병들이었다.
다른 교관들이 전원 따라왔고, 쿤타가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 하자, 백무열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잠깐. 저놈은 내 사냥감일세."
그가 어리둥절 하자, 나선 것은 뒤에 있던 백성찬이었다.
"안 도와줘도 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저렇게 말할 땐 정말 괜찮거든요."
"정말인가…?"
"네. 저런 말을 할 때의 할아버지는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진각과 함께 백무열이 돌진했다.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웨어울프와 맞부딪히자, 엄청난 파공음이 들렸다.
하지만 압도하는 것은 백무열이었다.
퍽! 퍽퍽! 퍽! 퍼어억! 퍽!
엄청난 희열이 온몸을 휘감는다.
생각보다 몽둥이의 가호는 엄청난 스킬이었다.
공격속도가 3배로 증가하니, 공격 방향을 비트는 것도 가능했다.
웨어울프가 막으려 손을 뻗으면, 더 빠른 속도로 다른 쪽을 후두려 팼다.
퍽! 퍼억! 퍽퍽!
지켜보던 묵사발이 입을 열었다.
"저 영감 대체 정체가 뭐야…?"
지킬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는 확실하네요. 괴물이라는 거."
바로크는 여전히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
그들뿐 만이 아니었다. 다른 교관들의 입은 떡 벌어져 다물지를 못했다.
머머리는 타르모를 업은 상태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머머리. 너 저분이랑 호각 아니었냐…?"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네."
"미쳤다는 말 밖에 안 나오는군. 크윽."
"흥분하지 마. 아직 상처가 심해."
"이걸 보고 흥분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그건 그래."
퍼퍼퍼퍼퍼퍼퍽-!
무자비하다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백무열은 모든 감각이 곤두서며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저번에 술을 마시며, 춘택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열아. 난 오랜만에 그곳에서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
사실 크게 믿진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크롸아아아악!!"
엄청난 몽둥이 폭포 세례에 새끼 웨어울프는 속수무책으로 울부짖었고, 발톱도 휘두르지 못했다.
그저 막기에 급급했지만 막지도 못했다.
휘리리릭. 빠아아악-!
재빨리 궤도가 변경된 목검이 웨어울프의 머리통을 강하게 때렸다.
[강력한 타격에 웨어울프의 뇌가 흔들립니다.]
[일시적으로 '뇌진탕' 상태에 들어갑니다.]
양 무릎을 꿇은 웨어울프의 팔과 다리엔 멍자국이 가득했고, 백무열은 거머쥔 목검으로 수차례 머리통을 강타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은빛 늑대가 쓰러졌다.
쿠우웅.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x4]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칭호 <몽둥이로 웨어울프를 죽인 자> 를 획득하였습니다.]
[늑대 종류의 몬스터들은 당신을 만나면 방어력이 20% 감소합니다.]
[은빛 웨어울프 실버팽의 갈기를 획득하였습니다.]
[은빛 웨어울프 실버팽의 가죽을 획득하였습니다.]
[어둠에 물든 구슬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거, 더럽게 끈질기네."
백무열은 실버팽의 갈기를 손에 거머쥔 채, 쿤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갈기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우승인가?"
"예? 아, 예, 아마도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교관 때려칠련다.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시부랄."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날이 밝자 나는 헨리의 밭을 거닐었다. 어젯밤 키스에게 간지럼 고문을 실시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웠고, 조셉은 현재 포트렌으로 보낸 상태.
우선 그 전에 이곳에 있는 만드라고라를 모두 뽑아낼 작정이다.
근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쑤욱.
"끼야아아악-!!!"
"에이. 시끄러운 놈들."
귀마개를 했음에도 여전히 시끄럽다.
만약 이것조차 없이 그냥 뽑았다면 일시적인 마비증세가 왔을 것이다.
다행히 헨리의 집엔 귀마개가 있었고, 그것은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뿌드득.
재빨리 만드라고라의 머리에 있는 잎과 열매를 뜯어 커다란 바구니에 담았다.
앞서 말했듯 잎은 수면효과가 있고, 과실은 마약의 주재료가 된다.
그리고 이 시끄러운 몸통은….
"이건 깍두기로 만들어야겠군."
사사사삭.
순식간에 깍둑썰기로 썰려버린 만드라고라의 몸통이 또 다른 바구니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수정이 물었다.
"이걸로 깍두기가 될까요?"
"된다. 무처럼 생겼잖냐."
"하긴 광고에 나오는 무 과장이랑 닮긴 했어요."
"잘 버무리면 맛있을 거다."
그렇게 총 4개의 밭 중 하나를 완료했을 무렵. 김수정이 물었다.
"근데 여기 밭에는 뭘 심으실 생각이세요?"
"글쎄다.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나는 부직업으로 '농부'가 된 상태였다.
처음엔 밭이 생겨서 좋았는데, 막상 해보니 노동도 이런 노동이 없다.
옛날에 장인어른 농사일도 도와드리고 그랬는데, 지금의 나는 나이가 들어버린 상태다.
오랜만에 하려니 힘들어 죽겠네.
"아이올리아 어때요?"
"아이올리아…?"
"저번에 케레노스에게 들었어요. 아이올리아 씨앗을 받으셨다구요."
"음,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구나."
"윈디아가 그런 일을 겪고, 아이올리아가 많이 사라진 걸 보면서 조금 슬펐어요. 물론 지금은 풍희 덕분에 많이 좋아졌지만요."
"푸우우웅♡"
머리 위에 있던 풍희가 두둥실 떠올라 김수정에게 날아갔다.
새하얀 털을 부비는 모습이 제법 애교가 넘친다.
"아, 너무 귀여워. 어떡해~"
참고로 풍희는 바람으로 장막을 만들어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막았다.
그래서 지금 아무렇지 않지만, 새삼 그런 힘이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금 놀란 상태였다.
…하긴, 바람의 신수인데 당연한가.
그러고 보니, 풍희가 아이올리아를 좋아하던 것이 떠올랐다.
종종 아삭거리며 씹어먹곤 했는데, 아무래도 아이올리아가 바람과 관련된 식재료라 그런 것 같았다.
요즘 풍희를 집중적으로 키우는 중인데, 아이올리아는 녀석에게 건강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바람의 비각술은 어떡하지….
알렉서스가 남긴 500년 묵은 아이올리아를 풍희가 먹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안타깝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키기 어렵다.
그것을 쓰기 위해선 10년 된 아이올리아가 필요한데….
흐음, 일단 내가 직접 키우는 수밖에 없나.
"일단 아이올리아를 심어봐야겠군."
나는 곧장 플로라가 주었던 아이올리아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촤롹. 촤롹.
문워크를 추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