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27화
제127화
백무열은 눈앞의 청년이 자신의 손자라고 확신했다. 목검을 휘두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손자에게 검을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시오. 내 훈련병에겐 무슨 볼일이지?"
"아. 그게…."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4조의 교관 케이아스.
그는 머머리나 타르모처럼 대놓고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교관 중 한 명이었다.
백무열은 사정을 설명하려 입을 뗐지만, 눈앞에 창이 뜨는 바람에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저, '레이벨트'가 당신을 친구로 등록하였습니다.]
'레이벨트…? 내가 잘못 본 건가?'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는지, 곧장 귓속말이 도착했다.
- 레이벨트: 할아버지. 저 맞아요.
- 백무열: 너….
- 레이벨트: 우선 돌아가세요. 제가 귓속말로 다 설명할게요.
백무열은 눈앞의 케이아스에게 사과한 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무대는 5조와 6조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뒤에 있던 해바가 물었다.
"회장님. 저 청년에겐 왜 가신 겁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라서."
"예? 아는 사람이요? 또래분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너도 잘 아는 사람이다."
"제가요…?"
"성찬이."
"예에?!"
해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여기서 성찬이가 나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 레이벨트: 할아버지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저한테 주신 캡슐이었는데, 기태 삼촌이 계속 쓰고 있잖아요.
- 백무열: 너 학교 가야 하는 거 아니었냐?
- 레이벨트: 방학이거든요.
- 백무열: 검도는…?
- 레이벨트: 대회 끝난 지가 언젠데요.
- 백무열: 아…. 그랬지. 참.
나이를 먹으니 자꾸 깜빡하는 일이 잦아졌다. 새삼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 백무열: 어디서 접속한 거냐. 캡슐도 없을 텐데.
- 레이벨트: 친구 집이요.
- 백무열: …넌 왜 그쪽에서 훈련받고 있는 거냐?
- 레이벨트: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왜 교관을 하고 계세요?
- 백무열: 크흠.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순식간에 경기가 끝났다.
승자는 머머리가 속한 5조.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어쩌란 건지.
[세 번째 일기토의 승자는 5조입니다!]
[5조가 4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이어서 네 번째 일기토가 시작됩니다!]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우리가 붙게 될 8조는 타르모 가 이끌고 있었다.
건너편에 그의 매서운 눈빛이 보였다.
"이어서 7조와 8조의 경기를 시작한다! 훈련병들은 앞으로!"
백무열은 뒤돌아 일행들의 면면을 살폈다.
비록 4명뿐이지만, 그들은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이들이 8조에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누가 먼저 나갈 테냐."
나선 것은 앞에 있던 해바였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회장님."
"…좋다."
당당하게 걸어 나간 그는 무기를 골랐다.
역시나 목검이었고, 무대에 오르자 많은 젊은이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건너편에선 제법 키가 큰 외국인 유저가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곧장 징이 울렸다.
과아아앙-!
"이야아앗!"
외국인 유저의 공세가 퍼부어졌다. 해바는 차분히 그의 공격을 받아내며, 기회를 엿봤다.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훈련소를 가득 울렸고, 긴장감이 흘렀다.
딱! 딱딱! 딱!
승패가 갈린 건 순식간이었다.
퍼억-!
"윽!"
약간의 큰 동작에 빈틈을 보인 외국인 유저가 배를 얻어맞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해바의 연속 공격이었다.
"으라차차차!"
퍽! 퍽! 퍼억!
그야말로 일방적인 공격. 경기가 끝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승자는 7조!"
[당신의 훈련병이 승리하였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오. 레벨이 올랐네.'
백무열은 상태창을 열어 고민 끝에 힘에다가 몽땅 투자했다.
지금 그에게 민첩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이미 각종 훈련을 통해 민첩이 많이 오른 상황이었고,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었다.
다시 한번 징이 울렸고, 이어지는 시합도 해바가 이겼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빨리 끝나버려서 조금 시시했다.
시합에서 진 훈련병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타르모에게 호되게 혼나고 있었다.
백무열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당신의 훈련병이 승리하였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훈련병이 2연승을 하였습니다.]
[추가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흐음. 연승을 하면 추가 경험치가 있는 모양이네.'
생각지도 못한 성과다.
가능하다면 무대에 있는 녀석이 계속해서 이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는 다음 경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당신의 훈련병이 패배하였습니다!]
[연승이 좌절되었습니다.]
[다음 훈련병을 무대 위로 올리십시오.]
'쯧. 어쩔 수 없지.'
패배한 해바 녀석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걸어왔다. 그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니다. 잘 싸웠다."
"저희 지거나 하진 않겠죠?"
"당연하지. 이 녀석아."
백무열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네가 이 중에서 제일 약하잖냐."
그는 남은 일행들 중 최약체였다.
* * *
[네 번째 일기토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당신의 조가 4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이어서 다섯 번째 일기토가 시작됩니다!]
[5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집니다!]
"으으으! 이 멍청한 놈들!! 고작 저딴 놈들한테 지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훈련병이야!!"
타르모는 진 것을 인정할 수 없었는지, 한바탕 훈련병들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8조의 훈련병들도 그가 사라지자, 뒷담화를 까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저놈은 훈련병들과의 신뢰도가 바닥이었던 모양이다.
부장 라칸이 또 한 번 외쳤다.
"지금부터 4강전을 시작하겠다! 4강부터는 단체전이니 1조와 4조의 훈련병들은 모두 올라와라!"
우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인파가 무대로 쏠렸다.
그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분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열의를 태웠다.
그 사이에 끼인 라칸이 말했다.
"룰은 똑같다. 장외는 무조건 탈락으로 간주하고, 항복하거나 전투 불능 또한 탈락으로 본다. 단, 4강부터는 3판 2선승제니 유의할 것. 이의 있나?"
양 교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내려가자, 곧장 징이 울렸다.
과아아앙-!
그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무수한 인파들.
엄청난 수의 목검과 목봉, 그리고 갖가지 무기들이 서로를 향해 겨누어졌다.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목검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빛나는 것은 단연 손자인 백성찬이었다.
"이야. 지금 보니까 성찬이 맞네요. 실력이 점점 일취월장합니다."
헛웃음을 짓는 해바의 모습에 백무열도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저 녀석은 조만간 날 뛰어넘을 게야. 껄껄."
전형적인 손자바보 미소를 짓는 사이, 경기는 어느새 끝이 나버렸다. 역시 예상대로 4조의 승리. 이어지는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일방적인 공세에 1조는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결승전은 가뿐히 2승을 쟁취한 4조가 올라갔다.
[다섯 번째 일기토가 끝이 났습니다!]
[4조가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일기토가 시작됩니다!]
"우리도 질 수 없지. 가자."
경기가 끝나자마자, 우리들은 곧장 무대를 향해 올랐다.
상대인 5조의 훈련병들도 올라왔고, 그들은 1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4명밖에 없었다.
부장인 라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백무열 교관. 7조는 4명이 끝인가?"
"…그렇습니다."
"인원이 안 맞아도 경기는 진행되네. 그래도 상관없나?"
"이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방법이 없다.
지금에 와서 새로운 훈련병을 보충할 수도 없는 노릇.
건너편에 있는 머머리가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늙은 교관이 싫어서 도망쳤나보군. 푸하하!"
그 말에 5조의 훈련병들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기존에 있던 훈련병들이 도망친 것은 교관들 사이에도 소문이 파다했다.
백무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썩을 놈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백무열과 머머리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곧장 징이 울렸다.
과아아아앙-!
"가즈아!!"
"으야아아악!!"
경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때리고 찌르고,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고, 그야말로 악바리 가득한 근성이 넘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첫 대결은 우리들의 패배였다.
[당신의 훈련병들이 패배하였습니다!]
[4강은 3판 2선승제입니다.]
[다음 경기에서도 진다면 완전한 패배를 하게 됩니다.]
돌아온 일행들이 모두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들은 제법 지친 모양새였다.
"으어. 젠장. 더럽게 쌔네. 수적으로 불리해도 이길 줄 알았는데, 만만치 않잖아?"
"쟤들도 우리처럼 훈련을 빡세게 한 모양이야."
"허억. 어우 숨차."
"빨리 포션부터 먹자고."
그들은 각자 구비된 포션을 마셨다. 생명력이 차올랐고, 백무열은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포션을 마시던 해바가 다가왔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
백무열은 말없이 이빨을 질끈 깨물었다.
건너편에 있는 머머리가 민머리를 찰싹 때리며 혀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화가 울컥 치밀었다.
'어우. 저 망할 빡대가리 놈.'
할 수만 있다면 저번처럼 목검으로 쥐어 패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사실상 이것은 결승전이나 다름없었고, 퀘스트의 보상이 걸린 일이었다.
'기필코 이긴다.'
결승전은 져도 상관없다.
손주 녀석이 4조에 있는 한, 아마 모두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놈한테만은 질 수 없었다.
그걸 떠나서 이건 자존심 문제다.
백무열은 쉬고 있는 일행들에게 성큼 걸어갔다.
"똑바로 해라 이놈들아! 내가 그리 가르쳤드냐!"
"크흠. 죄송합니다~"
"눈매가 엄청 무서우시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
기강이 풀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백무열은 곧장 품에서 어떤 아이템을 꺼냈다.
[마력 이발기]의 날카로운 이빨이 섬뜩하게 빛났다.
"지금부터 지면 털이란 털은 모조리 밀어버릴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 말에 일행들이 모두 침을 꼴깍 삼켰다.
"요즘 TV에 그런 노래가 나오더라고. 위, 아래, 위위, 아래."
찰칵.
위이이이잉-!!
다음 경기에서 7조는 압도적으로 이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