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26화
제126화
햇볕을 내리쬐는 태양.
드넓은 창공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이곳은 뮬란의 훈련소.
지난 일주일간 함께 훈련을 받았던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백무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도 모였군. 훈련을 받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오늘은 훈련병들이 모이는 날이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날.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고, 동양인들도 섞여 있었다. 물론, 한국인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지사.
새삼 춘택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종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했었는데, 이제 좀 알 것 같다.
훈련소장 쿤타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지금부터 뮬란의 밤을 시작하겠다!"
"우와아아아아-!"
귀를 찢는 함성 소리.
그 벅찬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떴다.
[제1387회 뮬란의 밤이 시작됩니다!]
[모든 훈련병들은 지금부터 팀 대항전을 시작합니다.]
[우승팀은 조기 전역을 포함한 막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현재 당신은 7조의 교관입니다.]
[훈련병들을 이끌어 우승하십시오.]
'번호가 좋군.'
7은 행운의 숫자다.
조는 8조까지 있었고, 지금 열리는 것은 무려 1387번째 '뮬란의 밤'이었다.
뒤를 돌자 보이는 것은 그동안 함께 특훈을 했던 젊은이들. 제일 앞에 있는 것은 제법 늠름해진 해바의 모습이었다.
그는 비록 공익이지만, 끈질긴 인내로 가혹한 특훈을 모두 마쳤다.
이제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할 것이다.
"여~ 백무열 교관. 훈련병들 실력은 잘 키워뒀나?"
거들먹거리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며칠 전 대결을 제안했던 머머리. 그 옆에 있는 건 또 다른 교관인 타르모 였다.
그는 저번에 버프 포션을 머머리에게 몰래 건네주던 자였다.
참고로 둘 다 머리는 휑했다.
"그래. 그럭저럭 잘 키웠지. 자네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그거 기대가 되는군. 이번엔 지지 않을 거다. 늙은 교관."
"…또 술수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그래 놓고 지면 망신일 텐데."
"큭…."
머머리가 입과 눈썹을 씰룩거렸다. 타르모가 나섰다.
"걱정 말라고 머머리. 저런 멍청이들로는 우리들을 이기지 못한다고. 봐, 몇 명이 없잖아? 아무래도 도망간 모양이야. 교관 주제에 훈련병 단속도 못하다니. 꼴사납군."
그 말에 머머리가 내 뒤편을 훑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군. 아주 기대가 되는 걸? 크하하하!!"
그렇게 두 사람은 멀어졌다.
다음 순간, 뒤에서 형형한 살기가 느껴졌다.
지난 2주일동안 자신에게 특훈을 받았던 7조의 훈련병들.
그들은 눈가에 핏줄을 세우며 분개하고 있었다.
"저 망할 빡빡이 놈들이 뭐…? 멍청이?"
"으으! 내가 오늘 저놈들한테 지면 성을 간다."
"야, 쟤들 몇 조지…?"
"5조랑 8조 같은데?"
"개 같은 놈들. 특훈의 성과를 보여주마."
비장해진 그들의 눈빛을 보며, 백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시간 고생한 보람이 있구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해이해진 정신을 무장하는 것이었다.
백무열은 그들을 굴리고 굴렸고, 정신 무장은 물론 능력치도 소폭 상승했다.
기존에 있던 틀에 박힌 훈련방식을 따윈 던져버리고, 산을 타고 실전을 가르쳤다.
삼청 교육대에 한 번 갔다 왔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받았던 훈련은 아직 뼛속 깊이 잊지 못하고 있었고, 안 좋은 기억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했기에 생생했다. 확실히 정신 무장에는 이만한 훈련법이 없다.
하나 단점이라고 한다면….
'이탈자가 있었지.'
훈련이 가혹하고 힘들어서 나오지 않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누군가는 교관을 바꾸기도 했고, 그렇게 남은 사람은 총 넷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참고 버틴 사람들은 정예 중의 정예가 되었다.
백무열은 이들이 눈앞에 있는 어떤 훈련병과 붙어도 지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빡대가리들."
* * *
훈련소장 쿤타의 연설이 시작됐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연설이었고, 뮬란의 밤에 관한 전통을 술술 읊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은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첫 번째 전통을 시작하겠다!"
[뮬란의 밤. 첫 번째 전통, 일기토를 시작합니다!]
뮬란의 밤에는 특별한 전통이 3가지 있다.
첫 번째가 일기토인데, 이것은 각 조의 훈련병들이 한 명씩 나와 자웅을 겨루는 것이었다.
교관은 일절 관여할 수 없고, 오로지 훈련병들의 무(武)만을 겨루는 것이다.
물론, 이기면 그만한 포상이 주어진다.
"훈련소장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일기토에서 우승하는 조는 전역 시, 전원 고급 무기를 지급하겠다!"
"우와아아아-!"
우렁찬 훈련병들의 함성.
백무열은 그 얘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훈련병을 하는 건데.'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이유 자체가 무기의 부재 때문이다.
그는 이곳의 모든 과정을 수료하면 무기를 준다는 말에 혹해서 들어온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뜨는 메시지는 백무열의 미간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현재 당신은 교관의 신분입니다.]
[일기토에 일절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조에 속한 훈련병이 이길 때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라도 주니 다행이군.'
조그만 무대가 마련되었고, 심판을 보는 것은 부장인 라칸이라는 자였다.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각 조의 훈련병은 한 사람씩 올라와 이곳에서 자웅을 겨룬다! 무대의 바깥으로 떨어지면 장외 패가 되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먼저 1조와 2조의 훈련병은 올라오도록!"
1조와 2조에서 각각 한 명씩 올라왔다.
각자 원하는 무기를 들었고, 잠시 뒤, 징이 울렸다. 그들은 곧장 나무로 된 무기를 부딪치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단번에 끝내주마!"
"지지 않는다!"
딱! 딱딱! 딱!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꽤 치열한 싸움. 그들은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이다. 시합은 오래 이어졌다.
"이야아압!"
딱! 퍽퍽!
1조 훈련병의 공세가 이어졌고, 2조의 훈련병은 막기에 급급해 보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승자는 1조의 훈련병이었다.
2조의 훈련병은 분하다는 듯. 주먹으로 땅을 치며 분개했다.
"젠장!"
이어서 올라오는 것은 2조의 또 다른 훈련병이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다들 제법이로구만. 그래도 아직 부족한 부분은 많지만 말이야.'
긴 싸움 끝에 첫 번째 일기토는 1조의 승리로 끝났다. 눈앞에 메시지가 뜨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 일기토의 승자는 1조입니다!]
[1조는 4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일기토를 시작합니다!]
"3조와 4조의 훈련병은 올라와라!"
이어서 올라온 것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와 평범한 체격을 가진 남자.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엄청난 체급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뒤편의 일행들은 하나같이 거구의 사내가 이길 것이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백무열의 생각은 달랐다.
'저 청년…. 목검을 쥐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군.'
한눈에 보아도 작은 체구의 남자는 검을 배운 적이 있는 듯했다.
그 범상치 않은 기세에 백무열은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했다. 뒤에서 해바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회장님은 누가 이기실 것 같습니까? 당연히 저 커다란 남자겠죠?"
"글쎄…. 난 저 조그만 청년이 이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예…? 정말이십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 백무열의 말에 다른 훈련병들은 갸웃거렸지만, 일단 보기로 했다. 잠시 후. 징이 울렸고, 일기토가 시작되었다.
"크하하하! 아주 조그만 친구로군!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거구의 사내는 기다란 봉을 아래로 내리치며 휘둘렀다.
하지만 평범한 체격을 가진 청년은 발을 살짝 놀리며 가볍게 피했다. 그는 구석으로 몰리며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다.
"쥐새끼 같은!"
거구의 사내가 다시 한번 거머쥔 봉을 커다랗게 휘두르며 전진했고, 공격은 매서웠다.
빈틈은 많았지만 강력했다. 하지만 조그만 청년은 계속해서 막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딱! 따닥! 딱!
결국, 그는 장외의 위기에 놓이고 말았고, 그 모습을 본 거구의 사내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크하! 자! 이제 마지막이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저 움직임은…?'
수세에 몰린 조그만 청년이 너무나 익숙한 보법을 밟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거구의 사내 앞으로 움직였고, 단 한 번. 일격의 목검을 휘둘러 그의 정강이를 강하게 때렸다.
빠아악!
"끄악!"
순식간에 중심을 잃어버린 거구의 사내가 휘청거렸다.
조그만 청년은 가뿐하게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고, 결국 거구의 사내는 허무하게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순간, 엄청난 함성이 훈련 교장을 뒤덮었다.
"와아아아-!"
뒤에서 지켜보던 일행들이 각자 한마디씩 했다.
"정말 이겼잖아?"
"이야, 저 남자가 거구의 사내를 단방에 넘어뜨렸네."
해바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회장님의 안목은 놀라우십니다."
하지만 백무열은 웃지 못했다.
그는 지금 미간을 심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경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승자는 4조! 3조의 다음 차례는 누구지?"
"접니다!"
의기양양하게 올라온 3조의 또 다른 훈련병.
하지만 이어지는 경기들은 무참했다. 아까 올라간 그 조그만 청년이 3조의 훈련병들을 모조리 꺾어버린 것이다.
두 번째의 일기토는 너무도 허망하게 '4조'의 승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두 번째 일기토의 승자는 4조입니다!]
[4조가 4강에 진출하였습니다!]
4조의 함성이 떠나가라 크게 울려 퍼졌다.
모두가 4조를 경계하는 듯 침을 꼴깍 삼켰고, 4조는 순식간에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무대에 있던 조그만 청년이 목검을 어깨에 들쳐 메며 말했다.
"뭐야. 시시하게 벌써 끝이야? 재미없네."
그는 머리에 쓴 투구를 긁적이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어서 세 번째 일기토가 시작됩니다!]
세 번째는 머머리가 속한 5조와 6조의 대결. 하지만 지금 백무열은 그것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어이, 늙은이. 지금부터 우리 애들이 하는 것을 잘 보…."
백무열은 걸어오는 머머리를 그냥 지나쳤다.
"크으윽…."
성난 머머리를 뒤로하고, 백무열은 아까 그 청년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방금 전 보았던 보법과 검세.
그것은 분명 백무열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청년은 4조 훈련병과 교관의 환대를 받으며 금의환향했고, 마침내 백무열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있었다.
턱.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성찬아."
이놈은 내 손자가 틀림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