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17화
제117화
[최초로 여신을 영접하였습니다.]
[거룩한 신의 힘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하였습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존재감에 화들짝 놀랐다. 뒤돌아보니, 그곳엔 꼬부랑 머리를 가진 연녹색 머리칼의 여인이 서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우씨,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놀랐다면 미안하구나.]
그녀는 바로 이곳 신전의 주인이었다.
바람의 여신 '후에라'.
프로메테우스의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주위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가 사뭇 기분이 좋다.
"…여신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된단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 보는 사이니까."
사실 프로메테우스 때처럼 곧장 반말을 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나는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었다.
그것도 무려 두 가지나.
잠깐, 그런데 여긴 인간계일 텐데…?
"어떻게 인간계에 강림을…?"
[이곳은 신의 힘이 충만한 곳이란다. 유일하게 인간계에서 금제(禁制)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기도 하지. 물론 전부 강림한 건 아니란다. 그럼 여기가 버티지 못하거든.]
"아…."
그러고 보니,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에 그런 내용이 있다.
신들은 종종 인간계에 신탁을 내리기 위해 신전에 강림한다.
물론, 그것도 생각보다 많은 힘을 소모했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여신의 머릿결이 살랑이는 바람에 찰랑거렸다.
그녀가 산뜻한 눈웃음을 지었다.
[무슨 부탁을 할지 알 것 같구나. 너에게서 바람의 생명이 느껴진단다.]
나는 곧장 아이올로스의 알을 꺼냈다. 그런데 알이 희미한 연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태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에라가 알을 공중에 두둥실 띄우며 말했다.
[이것은 전대 □□의 알이구나. 원래는 유피테르님의 신수였던 아이였지. 인간계에선 아이올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단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아이올로스는 그 녀석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원래는 □□이라는 진짜 이름이 있지만, 아이올로스는 그것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늘 인간처럼 살고 싶었던 그에게 □□이라는 이름은 그저 형식적인 이름이었다.
아마도 플로라에게 불리던 아이올로스라는 이름이 더 좋았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되찾아야 할 이름이겠지.
지금 내 입으로 진명(眞名)을 꺼낼 수 없는 것도 모두 금제(禁制) 때문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숙한 존재가 진짜 이름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 또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깨닫는 다는 건 곧 자신의 격을 되찾는다는 의미였으니까.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말해보려무나.]
"프로메테우스가 금제의 저주에 빠졌습니다."
[뭐? 어머. 혹시, 넌…?]
그녀의 주변으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여신이 놀란 표정을 보는 것은 꽤 묘한 쾌감이 있었다.
잔잔해지는 바람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찬란한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 * *
[성단, '별 다방(多房)'에 입장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후에라 덕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프로메테우스가 위험하다는 말에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고, 나는 스르륵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근데 여긴 여전하네."
띠링-!
[소생과 바람의 여신 후에라가 입장하였습니다.]
소생과 바람이라….
이곳 세상에서 태초의 3신을 제외한 신들은 두 가지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불과 예언이라면, 후에라는 소생과 바람이었다.
그녀는 늘 봄이 올 때마다 소생의 바람으로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여신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디에 있느냐.]
"절 따라오십시오."
익숙한 길을 따라 그녀를 안내했다.
여전히 벚꽃이 휘날리는 곳이었고, 걷다 보니 저번에 프로메테우스를 만났던 곳이 나왔다.
나는 문을 활짝 열어 보였다.
[참으로 흥미로운 곳이구나.]
"아내와 처음 만난 장소입니다."
[원래는 성좌나 신들이 오래 머물던 장소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프로메테우스는 그러지 않았나 보구나.]
"아,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프로메테우스가 머물던 공간이 아니라, 내 추억의 공간이 나왔는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고통을 떠올리기 싫었겠지.
원래라면 '코카서스 산맥'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프로메테우스에게 좋은 기억을 가진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망할 새대가리들에게 간을 뜯어 먹힌 곳이었으니까.
[아직 유피테르님을 원망하고 있었구나.]
"좋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렇단다.]
나는 프로메테우스가 있을 만한 곳을 뒤졌다.
다행히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어찌하여 그는 저런 모습인 것이냐.]
"…글쎄요."
프로메테우스는 하얀 수의를 입은 채 관속에 누워있었다.
그 속에는 빨간 장미들이 가득했고, 이름 모를 꽃들도 잔뜩 있었다.
웃긴 것은 그의 귀 뒤에도 장미가 꽂혀 있었다는 것.
하마터면 폭소가 터질 뻔했다.
한쪽 콧구멍이 큰 걸 보니, 더 그랬다. 누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 모습이다.
"큼. 큼…."
억지로 웃음을 참은 나는 관 아래에 적힌 글을 읽었다.
[나를 위해 별을 따다 준 사랑꾼. 이곳에 잠들다.]
얼씨구.
이건 카미유가 한 짓인 모양이다.
그렇게 프로메테우스를 밀어낼 때는 언제고 이렇게 묘비명 비슷한 글귀까지 새겨 놓다니, 웃음이 나온다.
이런 걸 츤… 뭐라고 하던데.
아무튼 후에라가 웃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여전히 카미유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선 프로메테우스의 상태를 봐야겠단다.]
후에라는 바람에 두둥실 몸을 맡기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눈을 감았고, 잠시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만한 신격(神格)을 소모하다니….]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금제의 저주는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녀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겁니까?"
[지금의 나는 강림으로 인해 약간의 신격(神格)을 소모했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약 없는 잠에 빠진 그를 기약 있는 잠에 빠진 상태로 만드는 것이란다.]
기약 있는 잠이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저에겐 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선택해야 한단다.]
"무슨…?"
후에라가 입을 열었다.
[프로메테우스와 아이올로스의 알. 내게 남은 힘으로는 둘 중 하나밖에 깨우지 못한단다.]
"그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너무나 고민이 되는 문제였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깨우고 싶구나. 그의 못생긴 얼굴이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한 후에라는 자신의 손가락을 프로메테우스의 콧구멍에 넣었다 빼며 장난을 쳤다.
그녀는 재밌다는 듯 쿡쿡거리며 웃었다.
[이건 프로메테우스에게 비밀이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후에라가 꽤 장난기가 많은 여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럼 아이올로스의 알은…."
그녀가 코를 파던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쉿. 그건 내게 생각이 있단다.]
후에라는 계속해서 프로메테우스의 콧구멍을 만지작거렸다.
안타깝게도 프로메테우스의 콧구멍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다.
* * *
불어오는 미풍에 눈을 떴다.
주위를 돌아보니, 익숙한 곳이다.
아까 왔었던 바람의 신전.
결계 밖은 아까보다 더 많은 용암들이 뒤덮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걱정할 것 없단다.]
봄처럼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후에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방금 전 프로메테우스를 깨우는데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했다.
눈앞에 뜨는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불과 예언의 신, 프로메테우스를 덮은 금제의 저주가 한 꺼풀 벗겨졌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깨어나기까지 999시간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현실 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현실 시간 기준이라…."
하루가 24시간이니까 프로메테우스가 깨어나는 데는 약 40일 정도가 필요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후에라가 말했다.
[미안하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최선이란다.]
"아닙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알을 깨워야 할 차례구나.]
"정말 가능한 겁니까…?"
생각이 있다길래 반신반의했지만, 사실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다.
워낙 장난기가 많아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녀가 웃었다.
[신전의 힘을 사용할 생각이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여기 신전은…."
[이제 신전으로써의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되겠지. 바깥에 있는 용암에 뒤덮여 사라져버릴 거란다. 눈물이 날 것 같구나.]
정말 눈물짓는 그녀의 얼굴.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본디 신전이란 신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 그녀를 숭배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신의 힘은 커진다.
하지만 지키는 신이 없다면 신전은 힘을 잃게 된다. 그녀의 결심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대신 너에게 두 가지 부탁이 있단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건 여기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윈디아가 걱정이란다. 윈디아는 매년 신성한 바람을 이곳에서 가져가곤 했는데, 신전이 사라진다면 윈디아는 큰 곤란에 처하게 될 거란다.]
…에드워드가 말해줬던 그 이야기로군.
신성한 바람이 디모르테라는 풍차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신전이 없어진다면 윈디아는 진정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녀가 알을 가리켰다.
[알에서 태어날 존재는 아마 신성한 바람을 타고나게 될 거란다. 네가 매년 윈디아에 들러 신성한 바람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어차피 윈디아의 촌장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매년 마주쳐야하는 입장이었다.
에드워드가 자주 들르라고 했으니 어려울 것은 없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번째 부탁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신전을 새로 지어달라는 것이란다. 오랜만에 신전을 찾았는데, 없어질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날 것 같구나.]
"…그건 제가 할 수 없는데."
[슬프구나.]
띠링-!
[여신 퀘스트 – 소생과 바람의 여신, 후에라의 부탁.]
등급: S
그녀가 자신의 신전을 포기하면서까지 당신을 돕고자 한다. 후에라의 두 가지 부탁을 모두 완수하자.
-완료 조건: 윈디아에 신성한 바람 공급 0/1, 후에라의 신전 건설 0/1
-보상: 소생과 바람의 여신의 축복.
-실패 시: 바람의 저주가 함께할 것입니다.
퀘스트 창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영주에게 말해보겠습니다. 그라면 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기쁘구나.]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울상이 되었다가 다시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저런 딸이 있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딸 바보가 되었을지도.
…갑자기 막내딸이 보고 싶구만. 있다가 영상통화라도 해야겠어.
외손주인 민찬이도 보고 싶다. 고사리 같은 손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또 있단다.]
"예? 제가 받은 부탁은 두 가지인데, 또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또 혼란이 찾아온다.
젠장. 이번엔 또 뭐지.
[이곳에 알렉서스가 남긴 바람의 힘이 있단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