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16화
제116화
갑작스럽게 시작된 촌장 임명식은 생각보다 거창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영주의 앞에 고개를 숙였고, 주변에 있던 기자들은 특종을 발견한 것처럼 각자의 카메라로 방송을 송출했다.
한눈에 보아도 생방송이다.
이런 제길.
원래라면 도망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도망을 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촌장 임명식이 거행 중입니다.]
[거룩한 행사를 위해 당신의 몸이 통제됩니다.]
[시스템이 당신의 몸을 움직이는 중입니다.]
…망할 개발자 놈들.
아까 유니온을 방문했을 때 한바탕 욕을 쏟아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정체를 숨겼을 텐데.
옆에서 기자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윈디아의 영웅이 에드워드 영주에게 작위를 받는 중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촌장으로 이것은 최초로 있는 일로…."
"귀족 작위를 받아도 모자란 윈디아의 영웅이 촌장이라는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미덕으로…."
"그가 과연 어떤 마을의 촌장이 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그는 왜 하고 많은 작위들 중 왜 촌장을 맡게 된 걸까요. 젊은 촌장의 행보는 과연 어떨지 기대됩니다."
…완전 멋대로 지껄이는군.
소설도 이런 소설이 따로 없었다.
기자들의 본래 직업이 사실 소설가라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다.
나는 젊은 촌장이 아닌데, 그리고 겸손함은 개뿔….
에드워드가 소리친 건 그때였다.
"윈디아의 영웅. 잭슨이여!"
그 말과 동시에 주변에서 노호성이 터졌다.
"오오! 저 사람의 이름이 잭슨인가 봐!"
"특종이다! 그의 이름은 잭슨이야!"
"카메라! 어서 그의 얼굴을 줌인 해! 어서!"
이 망할 꼬마 놈이 기어코 내 이름을 밝히고 말았다.
나는 눈알을 굴려, 옆에 있는 케레노스를 노려보았다. 움찔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찔리는 모양이다.
"나 윈디아의 영주 에드워드 폰 샤를은 그대의 투철한 용맹과 윈디아를 위해 헌신한 노고를 잊지 않았다!"
…아니, 제발 잊어주면 안 될까.
할 수만 있다면 없던 일로 하고 싶다.
에드워드는 커다란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가며 한참이나 내 업적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야, 고블린 제사장을 잡는데 일조했다고?"
"자이언트 킹 스파이더를 혼자 잡았다는데?"
"퀸 스파이더도 혼자 잡았데!"
"역시 오크들이랑 친한 건 이유가 있었군!"
이건 뭐 대놓고 날 자랑하는 꼴이다.
저 꼬마 놈의 입이 열릴 때마다 내가 유니온에서 정체를 숨겼던 이유가 조금씩 퇴색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잭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라."
"예. 영주님."
제기랄. 입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였냐.
한창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데, 한 병사가 에드워드에게 황금색으로 된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또 한 번 탄성이 터졌다.
"오오! 저건 신성한 나뭇가지!"
"오직 신들을 모시는 곳에서만 자란다는 귀한 나뭇가지야!"
"이 근처에 신전이 있었나…?"
마침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그대 덕분에 바람의 신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여신님의 가호로 신전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대는 바람의 여신 '후에라' 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 말과 동시에 월드 메시지가 떴다.
띠링-!
[World. 윈디아에 숨겨져 있던 고대의 신전이 다시 빛을 되찾았습니다! 그곳은 바람의 여신 '후에라'를 모시는 신전. 오르카 왕국의 많은 신도들이 이곳의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바람의 여신의 미소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동속도를 하루 동안 2배로 증가시킵니다.]
"대박. 여신이 직접 축복을 내렸어! 이런 일은 처음이야!"
"여신이 지켜보고 있나 본데?"
"와씨 부럽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꼴이었지만, 이것은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프로메테우스를 깨우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나는 후에라에게 신격을 나눠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었다.
…아이올로스의 알 때문에라도 가야 하니 잘 되었군.
그때, 에드워드가 황금 나뭇가지로 내 양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까끌까끌한 느낌이 생각보다 기분 나쁘다.
찰싹! 찰싹!
웃긴 건 내가 기분이 나쁠수록 사람들은 정말 부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데.
빌어먹을.
그렇게 모든 의식이 끝났고, 메시지가 떴다.
[윈디아의 동쪽. 이름 없는 개척 마을의 촌장이 되셨습니다!]
익숙한 메시지다. 저번에 거절을 했었던 그것이군.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것 같다.
[촌장의 지위를 거절한다면 윈디아의 영주는 당신을 죽을 때까지 쫓을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제안을 수락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염병하네.
촌장직을 거절하려던 내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려운 취업난 속에 강제로 취직을 하게 됐다.
내 나이 68세였다.
* * *
[낡은 허수아비가 조금 부서졌습니다.]
[힘 능력치가 1 올랐습니다.]
"후우. 덥군."
백무열은 허수아비를 때리던 목검을 내리며 땀을 닦았다.
원래라면 허수아비를 때리는 것은 훈련소를 졸업한 사람만 가능하다.
그것도 하루에 1시간만 가능하고, 이용료도 따로 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24시간 무료다.
유저 최초로 뮬란의 교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늦었습니다."
'해바'라는 이름을 가진 김기태가 인사를 했다.
그는 여전히 훈련병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쯧쯧. 젊은 놈이 게으르긴."
"회장님이 너무 부지런하신 겁니다. 아직 훈련 시작 시간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랬나?"
무안해진 백무열은 헛기침을 했다.
마침 한명씩 접속을 하는 것이 보였고, 모두 그가 담당하는 훈련병들이었다.
오늘은 검술 교관인 그가 처음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날.
"다들 이리로 모이게!"
백무열이 소리치자 모두 반갑게 인사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들의 눈은 초롱초롱했지만, 백무열은 검술에 관해선 엄격했다.
그가 정색하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김기태도 마찬가지.
"이보게들. 난 검술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네. 굉장히 혹독한 훈련이 될게야. 하지만 내게 배우면 적어도 검도 대회는 휩쓸 수 있을 테지. 그래도 배워볼 텐가?"
훈련생들이 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모두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백무열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게."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그곳엔 머머리 교관이 있었고, 유독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물론, 더욱 빛나는 건 저놈의 대머리였지만.
"싫다면 저쪽에서 배워도 좋네. 원한다면 보내주지."
머머리가 웃으며 바리깡을 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러자 앞에 있는 젊은이들이 질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괘, 괜찮습니다! 할아버지께 배우겠습니다!"
"머리를 밀리고 싶진 않아요!"
"저도 할아버지한테 배우고 싶습니다!"
"저번에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저도 가르쳐주세요. 할아버지!"
모두의 대답에 만족스러웠던 백무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이제부터 젊은이들의 검술 교관으로서 말을 놓아도 되겠나?"
젊은이들이 웃으며 동시에 대답했다.
"네-!"
백무열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엎드려뻗쳐 보도록 하지."
* * *
그 무렵, 나는 바람의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전에 영주성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으로 일주일 뒤 촌장으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역시나 거절을 해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고집도 그런 황소고집이 없군. 어쩔 수 없는 건가."
[크륵. 짐은 황소를 좋아한다. 미노타의 고기를 먹자!!]
"미노타의 고기? 너 배고프냐?"
[그렇다! 짐은 배가 고프다!! 어서 황소를 내게 바쳐라!!]
"웃기고 있네. 난 배 안 고프다. 이놈아."
[크아아아악!! 널 먹어버리겠다!!!]
…진짜 성격 개판이네.
툭하면 협박을 서슴지 않는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 저런 성격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익숙한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은 저번에 도로시와 다니엘을 몰래 지켜봤었던 곳이었다.
그곳을 지키던 한 기사가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미리 전갈을 받았습니다. 윈디아의 영웅을 뵙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동굴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봤던 철문은 이미 용암에 녹아 없어진 상태, 매캐한 유황 냄새가 동굴 안에 가득했다.
아직 식지 않은 용암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모든 용암이 식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 소개를 아직 안했군요. 전 실피드 기사단에 소속된 카일이라고 합니다."
"음, 반갑네."
"아직 식지 않은 용암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해서 발을 디디십시오."
카일은 용암 웅덩이가 나타날 때마다 얘기를 해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가볍게 점프해 피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바람의 신전은 여신님의 가호가 작용하는 곳이라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용암 속에서도 건재하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더군요. 제가 그동안 신을 안 믿었는데, 이제라도 믿어보려 합니다. 하하."
"그랬구만."
내 기억이 맞다면 바람의 신전은 500년도 더 전에 지어진 신전이었다.
당시 유피테르의 힘이 세상에 흩어지며, 가이아는 태초의 3신들 말고도 다른 신들을 만들었고, 후에라 또한 그때 만들어진 여신이었다.
뭐, 같은 시간에 태어났으니 프로메테우스랑은 형제라고 해도 무방하려나.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만 통과하면 바람의 신전입니다."
그렇게 어둠을 뚫고 나오자 큰 공동이 나타났다.
하지만 드러난 바람의 신전의 모습은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 이럴 수가! 용암이…!"
그가 말했던 바람의 신전은 용암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래도 넘친 용암이 신전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해버린 것 같았다.
카일의 표정이 아연실색해졌다.
"신전으로 가는 길목이 어찌!"
그는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리 놀라진 않았다.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미노타의 타오르는 뿔을 꺼냈고, 태연하게 용암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위, 위험…!"
카일이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용암이 내 하체를 휩쓸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화염에 대한 내성이 100%입니다.]
[데미지를 입지 않습니다.]
카일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자넨 이만 돌아가 보게. 이곳의 상황을 영주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나?"
"그, 그럼 영웅께서는…?"
"난 잠시 볼일이 있어서."
나는 뒷짐을 지며, 용암을 가로질렀다. 카일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이내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싱그러운 바람이 나를 반기듯 불어온다.
[여신의 가호가 적용되는 곳입니다.]
[바람의 신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이동속도가 10% 상승합니다.]
"흐음, 여기만 멀쩡한 게 신기하군."
연녹색의 결계를 기준으로 바깥은 용암이 흐르고 있었고, 이곳은 마치 봄날처럼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새소리도 들려오는 것이 무척이나 평화롭다.
저 멀리 에드워드가 얘기했던 신성한 우물도 보이네.
…저기서 신성한 바람을 얻는 건가?
그렇게 나는 신전의 주위를 배회하며 구경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서 오렴. 기다리고 있었단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