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15화
제115화
누구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해오니, 조금 민망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유민석이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차진철 대리의 상사이지요. 전략기획실이란 곳의 1팀을 맡고 있습니다."
…아, 상사였나. 어쩐지.
전략기획실이 뭐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곳에서 높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최춘택이네."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한 건 없으셨는지…?"
"아주 편히 왔네. 에쿠스가 아주 좋더군."
"다행입니다. 이리 오시죠.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기다리는 분…?
날 보자고 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 젊은이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차진철은 용무가 있어서 헤어졌다.
잠시 뒤, 나는 '부장실'이라고 적힌 곳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민석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잘 정돈 된 사무실이었다. 새하얀 인테리어와 단정한 사무용품들.
그것을 보며, 이 방의 주인이 굉장히 깔끔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중년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서오십시오. 이석준이라고 합니다."
"최춘택일세. 날 보자고 한 사람이 그쪽인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 사실 돌려 말하는 걸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이석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제가 어르신을 뵙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우선 앉으시죠."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한 이석준은 수화기를 들어 비서에게 차를 내올 것을 부탁했다.
잠시 뒤, 비서가 차를 내려놓았고, 나는 눈을 감으며, 향긋한 녹차 향을 음미했다.
"…향이 아주 좋군."
"원하신다면 돌아가실 때 챙겨드리겠습니다."
친절한 유민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그보다 날 보자고 한 연유가 뭔가?"
함께 차를 마시던 이석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실은 어르신께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말해보게."
"한 달 전 아크스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한 달 전…?
한 달 전이라면 내가 처음 아크스타를 시작했을 때였다.
내가 그런 사건을 알 리 만무했다.
"…글쎄. 잘 모르겠군."
"북두의 일곱 별 아래, 진정한 왕이 깨어났으니 새겨들으라."
내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이석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시는 것 같군요. 당시 이것은 예언처럼 아크스타의 모든 유저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엄청난 화제를 낳았고, 진정한 왕의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죠."
그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석준이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혹시 그게 어르신이십니까?"
"……."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지금 내 머릿속은 온갖 잡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의 파도를 헤집으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말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프로메테우스였다.
그는 내게 당분간 정체를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었고, 가면을 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 기간은 내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할 때까지.
물론, 그때보다는 많은 성장을 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게 공유된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아닐세."
"예…?"
"정말입니까?"
재차 묻는 유민석에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르신께서 뮬란의 영웅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도요. 혼자서 지그마를 쓰러트리고, 라그너스까지 물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극에서의 일들도 있었지요."
…젠장. 아주 다 보고 있었구만.
왠지 사생활이 노출된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다.
유민석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는 어르신이 성좌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직접 보기도 했구요. 정말로 아니십니까…?"
이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설마 따라다닌 건 아니겠지…?
나는 다시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잠시 뒤 다시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찾는 그 사람이 아닐세. 그건 내 친구야."
"그게 무슨…?"
눈이 찢어져라 커지는 두 사람.
나는 다시 말했다.
"내가 성좌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모두 그 친구가 알려줬기 때문일세."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두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사실 완전히 틀린 얘기도 아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없었다면 나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었을 테니까.
이석준이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을 소개시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부탁드립니다. 저희에겐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건 곤란하네."
"어째서입니까?"
"그 친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것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민석이 곧 의문을 제기해 왔다.
"믿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성좌들의 힘도 쓰시지 않았습니까?"
…젠장. 그것도 본 건가. 완전 스토커가 따로 없군.
"그랬지. 근데 그건 그 친구가 도와줘서 가능한 거였어."
"그런…."
유민석이 말을 얼버무렸고, 이석준이 턱을 만지며 물었다.
"실례지만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131이네."
"…믿을 수 없군요."
"내가 거짓말해서 뭐하겠나. 정 못 믿겠다면 확인해보게."
나는 당당했다.
뭐, 실제로 그 레벨이 맞았으니까.
원래는 121이었지만, 미노타를 잡은 뒤 10레벨이 오른 상태였다.
지켜보던 유민석이 거들었다.
"그건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뮬란에서 시작하신 지는 얼마 안 되셨으니까요.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음…."
유민석의 말에 이석준이 다시 한번 턱을 쓸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혹, 월드 대항전에 나가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월드 대항전? 그건 또 뭔가."
"쉽게 말씀드리면 올림픽 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 세계인들이 모여서 정해진 룰 안에서 아크스타의 실력을 겨루는 경기들을 하지요."
"호오, 신기하군. 그런 것이 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네."
"…그렇군요. 실은 어르신께서 나가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드리려 했습니다."
"음? 왜지?"
"현재 어르신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 약한데? 131레벨 밖에 안 돼."
"그건 레벨에 비해서 강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대회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너무 밸런스가 안 맞으면 주최자인 제가 곤란하기도 하구요."
"…흐음, 그런 이유라면 잘 알겠네. 어차피 난 나갈 생각이 없어."
"그러시다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분간 더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나는 다시 에쿠스에 올랐다.
이번에는 차진철이 아닌 다른 운전기사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지나가는 도시의 정경들을 훑으며, 떠나기 전 유민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혹, 월드 대항전에 나가고 싶으시면 여기로 전화를 주십시오.'
'응? 자네 상사가 싫어할 텐데?'
'200레벨 이하인 챌린지 리그는 괜찮을 겁니다. 부장님도 설득할 생각이구요. 전 어르신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최고의 스타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회상에서 돌아온 나는 유민석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우선 지금은 생각없다고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궁금증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월드 대항전이라.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아크스타에 접속했다.
내가 있는 곳은 저번에 로그아웃했던 바람의 언덕.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처참하구만.
예전의 평온했던 푸른 들판은 없었다.
그곳엔 회색빛 화산재와 차가운 눈에 시들어버린 잡초만이 무성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바람의 언덕 자체가 워낙 넓어서 전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두르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크륵. 자꾸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냐.]
…이놈은 들어오자마자 시비네.
'언제쯤 싸가지가 없어질 거냐. 무두르.'
[취이익. 내가 이 몸에서 나가면 네놈부터 찢어 발겨버릴 것이다. 새겨두는 게 좋을 거야. 후후.]
'제발 좀 나가라. 이 돌대가리야.'
[취이이이익-!! 이노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윈디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금세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옷이 완전 넝마가 됐네."
다행히 바지 부분은 남아있어서 중요 부위는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의는 완전히 찢어져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드레인이 접속해 있다.
- 잭슨: 어디냐.
- 드레인: 오우, 자랑스러운 우리 브라더! 윈디아의 영웅!
- 잭슨: …뭔 헛소리냐. 갑자기.
- 드레인: 뉴스 봤어요! 지금 윈디아는 난리라구요! 홍홍홍.
- 잭슨: 시끄럽고, 옷이나 수선 해다오. 넝마가 되어버렸다.
- 드레인: 후후. 알겠어요. 광장에서 봐요.
나는 창을 닫으며 생각에 잠겼다.
…윈디아가 난리라고? 왠지 불길한데.
잠시 뒤, 나는 윈디아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굉장히 분주했고, 부서진 성벽과 건물들을 수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병사들의 경계도 철통같아 보였다.
한 병사가 나를 제지했다.
"얼굴을 보여주시오."
…어쩔 수 없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늑대 가면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쓴 것은 백호 가면. 나는 가면을 살짝 열어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병사가 갑자기 당황했다.
"다, 당신은 혹시…?"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하다.
만약 프로메테우스가 깨어 있었다면 이런 메시지를 띄웠을 것이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불길함을 감지합니다.]라고.
그리고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윈디아의 영웅이 왔다!! 윈디아의 영웅께서 오셨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나는 병사의 입을 막을 틈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와, 저분이 바로 윈디아의 영웅!"
"뮬란을 구한 사람도 저 사람이라면서?"
"와, 저 몸 좀 봐! 엄청 탄탄한데?"
"다크 울프님! 여기 좀 봐주세요!"
"꺅-♡ 멋있어! 반할 것 같아!"
…이런 미친.
NPC고 유저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얼굴은 완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다.
[윈디아에 당신의 명성이 가득 퍼진 상태입니다.]
[명성 10,000이 올랐습니다.]
[당신의 명성이 '제법하는' -> '수준높은'으로 바뀌었습니다.]
[칭호 <윈디아의 영웅> 을 획득하였습니다!]
[윈디아의 기사들이 당신을 우러러보고, NPC들이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대체 무슨…."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저 멀리 기자들이 마이크를 쥐고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아예 둘러싸여 빠져나갈 공간도 없었다.
이러다간 고스란히 신문 1면을 장식하게 생겼다.
"뮬란의 영웅이셨다는데 사실입니까?"
"스타 프루츠 능력자라는 설이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북극엔 어떻게 가게 되셨죠?"
"가면을 쓰시는 이유가 뭡니까!"
"왜 랭킹 등록을 하지 않으셨죠?"
…아, 갑자기 더럽게 피곤하네.
순간 중지가 울컥했지만, 참아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중지를 드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든 도망치는 궁리를 하는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비키시오! 에드워드 영주님 행차요!"
갑자기 홍해 갈라지듯 인파가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꼬마 영주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케레노스도 함께 서 있었고, 그 모습이 제법 비장해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에드워드가 소리쳤다.
"윈디아의 주민들은 들어라!"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가 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나는 한없이 불길함을 느꼈다.
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꼬마는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지금부터 촌장 임명식을 시작하겠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