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14화
제114화
내가 아는 한 미도는 남자친구가 없다.
강현이 녀석이나 며느리에게 듣기로도 미도는 단 한 번도 남자를 집에 들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시커먼 늑대 한 마리가 밥을 먹고 있다.
"잘 먹네. 이것도 좀 들어봐요."
"아, 예. 감사합니다."
며느리는 눈앞의 차진철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반찬을 그놈에게 밀어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유니온에 다닌다구요?"
"예. 입사한지 얼마 안 되서 아직 신입사원입니다."
"호호, 인물이 훤칠하네. 우리 미도랑은 무슨 사이예요…?"
"컥! 컥!"
차진철이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고소를 삼키며 웃었다.
미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이참! 엄마! 오빠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게임상에서 처음 만났고, 그저 우연히 알게 된 사이라구요."
"흐음, 그래? 이상하다…."
미경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미도를 보았고, 미도는 그런 눈빛을 신경질적으로 받았다.
"왜요?"
"네가 우리 집에 남자를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잖니."
"그건 제가 여중, 여고를 나왔으니 당연한 거잖아요."
"그래도 우리 미도가 꿀리는 미모가 아니라서 길거리에서 고백은 많이 받았을 텐데…."
"전 지금 연애 생각 없어요."
…나이스.
드레인이 기분이 좋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차진철이 며느리가 건네준 물을 마시며 가슴을 치는 것이 보였다.
가능하다면 내가 쳐주고 싶었다.
그래. 가급적이면 명치 쪽으로.
"괜찮아요? 내가 너무 갑작스러운 걸 물어서 당황했나 보네."
"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호호, 착하기도 해라."
아무래도 며느리는 이놈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벌써 며느리의 마음까지 홀리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군.
이번엔 옆에 있던 강현이가 반찬을 집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진철 군은 여긴 무슨 일로…?"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아버님. 제가 한참 어린데…."
"하하,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이인데 말을 놓으면 그렇지."
나는 속으로 첫째를 응원했다.
…그렇지 잘한다. 그렇게 거리를 두라고.
하지만 이내,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그게 더 편해서 그렇습니다."
"여보, 말 편하게 해요. 진철이가 그게 편하다잖아."
"큼, 그럼 그럴까…?"
강현이는 며느리의 얼굴을 한번 슥 보더니,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젠장. 이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감사합니다."
…여우 같은 놈.
이런 녀석이 가장 위험한 놈이다.
조만간 이놈은 내 살생부에 이름을 크게 올릴 것 같다.
"그나저나 아버지. 오늘따라 말이 없으시네요? 진철이한테 궁금한 것 없으세요?"
강현이가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고, 젓가락질을 멈추며 그에게 물었다.
"여기 온 용건이 뭐지…?"
나는 일부로 조금 차갑게 말했다.
눈빛은 이글거렸고, 눈썹은 사납게 추켜올리며 호랑이 같은 인상을 만들었다.
차진철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큼. 할아버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뭐…? 날 보러 왔다고?"
"예."
갑자기 이놈이 날 왜 보러왔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한 가지가 떠올랐다.
며칠 전, 나는 이놈을 게임상에서 독살한 적이 있다.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닐까.
…그래.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유니온'을 다닌다고 했으니, 내게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을 거야.
제길. 이놈이 하필 아크스타를 제작한 회사에 다녔다니.
입술을 오물거리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혹시 그 일 때문이라면 내가…."
"죄송하지만, 생각하시는 그 일이 아닙니다."
"잉?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요리 때문 아니셨습니까?"
"큼, 그, 그렇지."
갑자기 미도가 도끼눈을 뜨며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젠장. 큰일 났네.
"오빠. 그때 할아버지가 요리에 뭘 넣은 거죠? 그래서 오빠가 죽었던 거죠?"
갑작스러운 질문 공세에 이마로 비지땀이 흐른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김치찌개에 숟가락을 올렸다.
"크흠! 흠! 오늘따라 김치찌개가 맵구나."
"예? 일부러 싱겁게 했는데요."
"그, 그래? 크흠. 나이를 먹으니 혀가 마비됐나…."
"어머, 아버님. 병원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니세요?"
…젠장.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강현이는 진찰을 해봐야겠다며, 이상한 아이스크림 막대 같은 것을 가져오더니 내 입속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버지,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 알았다."
이비인후과 의사인 강현이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
차진철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아니야. 그때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고맙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던 거였어."
"에? 근데 바로 죽었잖아요. 그럼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내가 코볼트 뼈를 모르고 잘못 삼켜버리는 바람에 질식사한 거야."
"아…. 그랬구나."
휴우. 다행이군.
어떻게든 상황은 모면한 것 같다.
미도가 나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의심해서 미안해요. 할아버지."
"…크흠. 아니다. 그럴 수 있지."
"그때, 할아버지. 요리 진짜 최고였어요. 뿅뿅-♡"
한껏 애교를 부린 미도의 손가락 하트에 나는 이미 넘어가고 말았다.
"껄껄껄. 뿅뿅-♡"
* * *
그렇게 파란만장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는 넓은 안방에 앉아 며느리가 내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차진철이 함께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까는 고마웠네."
"아닙니다. 손녀 사랑이 지극하신 것이 보기 좋습니다."
"껄껄. 그나저나 무슨 일로 내게 찾아온 겐가. 그때 내가 한 요리 때문이 아니라면 짐작이 안 되는데. 아, 일단 차부터 들지."
"예.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동시에 차를 홀짝였다.
원래라면 커피를 마셨겠지만, 요즘은 건강을 위해 차를 많이 마시게 된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차진철이었다.
"실은 오늘 개인적인 용무로 온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용무가 아니라고?"
"예. 오늘은 제가 다니는 유니온을 대표해서 왔습니다."
"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머리에 물음표가 생겼다.
차진철이 계속 말했다.
"아이디가 잭슨 맞으시죠?"
"내 아이디를 어떻게 알았지…?"
"제가 다니는 곳이 유니온이지 않습니까."
"아, 그래. 그렇겠군."
나는 빠르게 그의 말을 납득했다.
아크스타를 만든 회사인데, 한낱 유저의 아이디 하나 알아낼 수 없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저는 어르신의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이유는 모르지만요."
"흠…."
순간 차를 입에 대려던 것을 내려놓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들은 유저들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지요. 사실 어르신이 가지신 힘은 저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이긴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어르신을 찾기 위해 야근도 서슴지 않고 하고 있구요."
이거 뭔가 불길한데. 설마 내가 게임을 못하게 하려는 건가…?
"본론을 말하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내가 게임을 하지 않길 바라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차진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지?"
"한 가지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부탁…?
내 미간은 점점 더 찌푸려졌다.
눈앞의 그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도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보게."
"그건…."
* * *
다음 날.
오늘은 아침 일찍 어딘가를 갈 예정이다.
오랜만에 낡은 정장을 꺼내 입었고, 한껏 멋지게 차려입었다.
운동을 꾸준히 해와서 그런지, 웬만한 젊은이들 못지않게 정장이 잘 어울렸다.
그런 내 모습에 며느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진짜 멋쟁이세요. 이거 정말 소화하기 쉽지 않은 옷인데."
"껄껄. 내가 이래 보여도 왕년엔 인기 많았다."
"그러셨을 거 같아요. 어머님이 많이 노심초사하셨겠어요."
"아니, 그래도 내가 여자 문제로 걱정시키는 일은 없었어."
"그건 강현 씨도 마찬가진 거 같아요. 호호. 그건 아버님을 닮았나 봐요."
"그래. 그건 날 닮은 게 맞다."
"호호호!"
우리 두 사람은 폭소를 터트렸다.
그때 미도가 눈을 비비며 아침을 먹기 위해 거실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엄마, 할아버지."
"우리 딸. 잘 잤어?"
며느리가 그녀의 머리칼을 쓸자 미도가 며느리의 품에 폭 안겼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으, 졸려. 엄마~"
"얘도 참. 다 큰 애가 이러면 못써요."
"흐으으응."
…아직도 애기구만.
여느 부모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했던가.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아침을 먹었고, 잠시 뒤,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잘 들어갔나?"
"예. 덕분에 든든하게 들어갔습니다."
눈앞에 있는 청년은 어제 집을 방문했던 차진철이었다.
나는 어제 그에게 '유니온'에 방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젯밤 그는,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고, 나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부릉-!
검은색의 기다란 에쿠스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근데 이거 꽤 비싼 차 같은데….
"이거 자네 차인가?"
"아닙니다. 어르신을 모셔오기 위해 회사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랬구먼."
차는 어느새 도로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널따란 시가지가 나왔고, 익숙한 정경들이 보였다.
근데 새벽 운동을 갔다 와서 그런지 노곤함이 밀려온다.
"미안하네. 잠깐 눈 좀 붙이겠네."
"괜찮습니다. 도착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잠깐 눈을 붙였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에쿠스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남인가.
고풍스러운 빌딩들이 많이 보였다.
역시 강남은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다웠다.
차진철이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그에게 고맙단 말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차 키를 주차요원에게 맡기며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그를 따라 들어간 빌딩의 입구에는 '유니온'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있었다.
그 밑으로는 '본사'라는 글자가 있었고, 아무래도 다른 지사도 있는 것 같았다.
신분을 확인하며 엘리베이터에 탄 나는 거의 꼭대기나 다름없는 60층에 도착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런데,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