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97화
제97화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지금 이게 왜 여기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멍한 표정을 짓습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어서 그것을 잡으라고 말합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이 알렉서스의 포크 숟가락을 가지길 원합니다!]
…이놈이 난리를 치네. 하긴, 그럴 만도 한가.
애초부터 알렉서스와 많은 접점을 가진 프로메테우스였다.
그와 함께 여행했었고, 그와 함께 싸웠고, 그와 함께 요리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로 인해 500년의 세월을 어둠 속에서 그의 후예를 기다렸다.
프로메테우스와 알렉서스는 생각보다 깊은 유대로 묶여있는 것이다.
"아버님 이거…?"
옆에 있던 김수정도 눈치를 챈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구나."
"이걸로 하실 거예요?"
"그래야겠지? 프로메테우스가 아우성치는구나. 저걸로 하라고 말이야."
"후훗. 어서 잡으셔야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나는 곧장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알렉서스의 포크 숟가락]
등급: 전설
내구도: 300/300
착용 제한: 요리사 직업 한정
공격력 1~1
솜씨 능력치+50
감각 능력치+50
-미식가의 눈(액티브)(쿨타임: 30분)
매의 눈으로 대상의 식재료 감별을 시작한다. 어떤 대상이라도 미식가의 눈을 피할 수 없다.
-봉인된 스킬입니다.
전설 속 거인들의 광물 중 하나인 '엘바프리움'으로 만들진 포크 숟가락.
과거 아틀란의 왕이었던 알렉서스는 숟가락에 포크를 합치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손잡이 말미에 글이 적혀있다.
"요리사는 불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 알렉서스. A
아이템 창을 읽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알렉서스의 것이 맞았다.
설마 이걸 여기서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알렉서스의 물건을 보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손수건을 건네줍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손수건을 던져버립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손수건을 건네줍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물을 닦고 코를 풉니다.]
사내놈이 울기는 쯧….
김수정이 물었다.
"마음에 드세요? 그런데 숟가락이라 실망이 크시겠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잖아요. 아버님은 요리사이기 아까울 정도로 강하신데, 무기나 방어구도 아니고 고작 숟가락이라니…."
"아니다. 이거면 충분해."
"하긴, 아버님은 발차기면 충분하죠? 후훗."
사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녀 스스로가 오해하고 있었다.
뭐, 이대로 넘어가는 것도 괜찮겠지.
일행들은 각자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골랐다.
김수정은 생명력을 올려주는 반지 하나를 얻었고, 견소룡은 공격력이 달린 좋은 장갑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드레인은….
"뎀잇!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쉣!"
…눈에 차는 게 없는 모양이다.
나는 드레인에게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라. 이놈아."
* * *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들은 다시 서리 오크들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우리들은 미로 속을 거닐었다.
드레인은 결국 옷에 붙일 장신구로 쓸 조그만 보석들을 골랐고, 이곳 북극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이스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골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오우, 어서 이 보석을 옷에 붙여보고 싶군요. 퐌타스틱!"
…바보 녀석. 하필이면 저걸 고르냐.
저걸 고를 줄 알았다면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당연했다. 아이스 다이아몬드는 이곳 북극을 벗어나는 순간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홍홍홍. 큐트한 보석들~!"
뭐, 지금은 기분 좋아 보이니 그냥 내버려 두도록 할까.
나중에 드레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이 녀석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옆에서 김수정의 탄식이 들려왔다.
"아~ 뽀노를 데려가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그렇게 많이 섭섭하냐?"
"네, 엄청 귀엽잖아요. 애교도 많고."
"케르는 어쩌고?"
"케르도 당연히 귀엽죠! 이리와 케르야!"
"콸!"
동굴 구석에서 쉬를 누던 케르가 헐레벌떡 뛰어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김수정의 얼굴은 순식간에 침 범벅이 되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슈벤이 물었다.
"취익. 이제 떠나는 건가?"
"음, 아마 그래야겠지."
"…그렇군."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음, 그게…."
슈벤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부탁을 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한번 들어나 볼까?
"얘기해봐라. 부탁이 있는 모양인데."
"…음, 실은 난 연구를 하는 걸 좋아한다. 취익."
"그래. 네 방을 보니 그런 것 같더군."
"최근 100년 사이 서리 오크들의 문명이 발전한 건 다 내 연구 덕분이었다고 나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옆에 있는 도시에서 부품을 빌리긴 했지만…. 최남단에 있던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건 여기 있는 무두르 님의 피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 지금의 독침부대지. 취익."
무두르의 피…?
아, 그래서 중독이 되지 않았던 건가?
나중에 상태창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 내 몸은 거미 독에 대한 내성이 있는 상태였다.
킹 스파이더와 퀸 스파이더의 내단 때문이었는데, 무두르가 거미 독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고르바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피는 당연히 거미 독이 가득할 터.
내가 독침을 맞고 죽지 않았던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랬구만."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말해봐라."
"그대의 몸을 만져보고 싶다."
"뭐, 뭐…?"
나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내 몸을 엑스자로 가렸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묘한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어떻게 만지겠단 건지 궁금해합니다.]
"내 몸을…? 왜, 왜?"
"무두르 님의 피를 그대의 몸에 넣어보고 싶다."
…아, 그런 뜻이었나.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최근 나는 주술로 '무두르 님의 피'를 서리 오크들의 몸속에 집어넣어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우리 오크들의 약점을 없애기 위해서지.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취이익."
이 자식 지금 결투에서 졌다고 화풀이하는 건가…?
진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눈앞에 있는 슈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천재는 괴짜라더니, 그 말이 진짜였네.
"내가 얻는 건 뭐지…?"
"췩.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다."
"흐음, 힘이라…."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슈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보통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따라갔다가 온몸이 개조되서 인조인간이 되는 전개가 있었다.
진짜로 그러면 어떡하지…?
"무리하게는 하지 않을 거다."
"…진짜냐?"
나는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에 이런 메시지가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지금껏 이 메시지를 듣고 한 번도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슈벤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순간. 카미유의 메시지가 나를 멈춰 세웠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무조건 불길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엥…? 아닌데. 맨날 불길했는데."
[반딧불성, 카미유가 그의 예언은 현재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이 말을 들었던 건 처음 프로메테우스를 별 다방(多房)에서 만났을 때였다.
아마 그때 한쪽 팔이 없어서 예언 능력도 예전 같지 않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나…?
마침 프로메테우스의 메시지가 떴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렇긴 하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자식이 그동안 불확실한 예언을 했던 거냐….
갑자기 그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며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니, 프로메테우스의 감정이 느껴졌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합니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하나? 취익."
슈벤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무안해져서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큼, 별거 아니야. 믿어도 되겠지?"
"취이익. 물론이다."
슈벤이 입술을 핥았다.
* * *
일행들과 헤어진 나는 다시 미로 속을 헤메고 있었다.
견소룡은 새로 얻은 장갑의 성능을 시험해보고 싶다며 근방의 몬스터를 잡고 싶다고 했고, 김수정은 함께 따라가겠다고 했다.
지금 내 옆에는 드레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브라더와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뮬란 때 이후로 처음 아니냐?"
"그렇죠. 나한테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 영어 많이 늘지 않았냐…?"
"노우. 아직 멀었어요."
"…망할 놈. 늘었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냐?"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앞장서서 걸어가던 슈벤이 우리들의 대화에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드레인에게 물었다.
"야,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그때, 말이다. 너한테 처음으로 파티신청 했을 때."
"아! 기억나요.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아직도 그때가 선하네요."
"그래. 근데 네가 놀라면서 했던 말 기억하냐?"
"아, 그거 하하하…."
너털 웃음을 흘리는 드레인은 무안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거 무슨 뜻이냐? 내가 그동안 물어보려다 깜박하고 이제야 생각이 나서 말이야."
나는 드레인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왓더박'으로 알고 있던 그것은 욕이었고, 아주 황당한 일이 있을 때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사용하는 서양의 욕이라고 했다.
"그땐 미안했어요.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나온거라."
"괜찮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발음이 뭐라고? 왓-더-벅?"
뭔가 햄버거가 땡기는 발음이다.
젠장. 갑자기 배고프네.
"노우, 마지막 발음을 강하게 해야 돼요. 자 따라해 봐요. 뻑!"
"뻑!"
"굿잡!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굿굿!"
드레인이 엄지를 치켜드는 사이 갑자기 주변의 정경이 변했다.
뭔가 더욱 음침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제 다 왔다. 저기다. 크륵."
슈벤이 가리키는 곳은 또 다른 동굴이었다.
끝도 없는 어둠이 이어진 계단이 보였고, 생각보다 깊은 계단을 보며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젠장. 아무리 봐도 불길한데….
괜히 왔나?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개자식. 이젠 불길하다는 메시지도 안 보내네.
한 번쯤 보낼 만한데도 프로메테우스는 침착한 모습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슈벤의 뒤를 따라 동굴을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우리들은 가장 밑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것이 바로 태초의 오크이신 무두르 님의 피다. 취이익."
슈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옮겨갔다.
그곳에 있는 것은 거대한 피 웅덩이였다.
아니, 피의 강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혈류.
나는 굽이치는 그것을 보며 소리쳤다.
"왓-더-ㅃ…."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