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빼고 다 젊은이-96화 (96/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96화

제96화

찰나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군가에게 충성을 받아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과거 무각회에 몸을 담고 있던 시절. 함께하던 동생들에게 이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사람.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향한 경외심.

그리고 굳게 믿는다는 신뢰감.

지금 내 앞에 부복하고 있는 서리 오크들도 그때의 동생들과 다르지 않은 눈빛이었다.

오로지 무(武)를 숭상하는 서리 오크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크랜드에 길이 남을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칭호 <서리 오크들의 경외를 받는 자>  를 획득하였습니다.]

[서리 오크들은 당신을 경외하며 따를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치 <카리스마>  가 개방되었습니다!]

"카리스마…?"

나는 상태창을 열어 카리스마 능력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카리스마(0): 누군가를 휘어잡고 통솔하는 힘입니다. 이 능력치가 높을수록 어떤 집단을 더욱 쉽게 다룰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집니다.

NPC나 유저들에게 더욱 위엄있는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통솔할 때마다 랜덤한 수치만큼 자동으로 오릅니다.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능력치다.

누군가를 휘어잡고 통솔한다는 것은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에 도움이 될 만한 능력치라면 당연히 좋은 것이 분명하다.

슈벤이 다가왔다.

"이제 귀인을 족장에 준하는 대우를 하겠다. 취익."

"그것 참 고마운 일이군."

"귀인의 일행들도 마찬가지."

슈벤의 흥분한 표정을 보며 나는 물었다.

"우선 자네가 알고 있는 어미펭귄의 위치부터 말해주겠나?"

"물론이다. 다들 날 따라와라."

일행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가 향한 곳은 마을 뒤쪽에 위치한 거대한 동굴. 그곳은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처럼 미로로 되어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공손해진 서리 오크들을 보며 김수정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랑 태도가 완전 딴판이네."

견소룡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싸울 걸 그랬나."

하지만 드레인은 여전히 무서운 듯 보였다.

"히익!"

저렇게 몬스터를 무서워하면서 가죽은 어떻게 만지는 건지.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콸."

…케르 녀석은 여전히 겁을 상실했군.

조그마한 몸집을 가지고 서리 오크들의 뒤꿈치를 물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뽀노는 또 훔칠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 녀석도 참 여전해."

뽀노가 이상행동을 보인 건 그때였다.

"뀨~? 뀨뀨! 뀨우!!"

"왜 그래 뽀노야?"

김수정이 물었지만 뽀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잠깐 응시하기만 할 뿐.

잠시 후, 뽀노는 그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어? 어디가 뽀노야!"

"뀨우~~!"

그녀가 쫓아가려했지만, 슈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취익. 괜찮다. 자기 어미를 찾아간 것이니까."

자기 어미를 찾아가…?

"어미 펭귄이 이곳에 있었나?"

"그렇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냅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묻습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한숨을 쉬며 안도합니다.]

별 다방(多方)의 녀석들은 화를 내기도 했고, 안도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그들을 납치했지? 이 사실을 들킨다면 그대들은 멸족할지도 몰라."

"납치…? 크라라라라!"

갑작스런 그의 폭소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슈벤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우리들은 납치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곳을 찾아온 건 어미펭귄이었지."

"제 발로 찾아왔다고? 왜지?"

"후훗. 그건 가보면 알거다. 췩."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납치가 아니라고 하니 우선 믿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들은 한참이나 미로를 통과해 드디어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어미펭귄을 보는 순간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아…!"

그랬구나. 그것 때문이었어.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뒷목을 잡으며 헛웃음을 짓습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생명의 신비에 미소 짓습니다.]

"마마~♡"

뽀노는 어미의 품에서 한껏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왕관을 쓰고 있는 어미 펭귄의 배는 남산만큼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프로메테우스가 이곳에 있는 '4번째 사도'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황제펭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 황제펭귄은 자웅동체야.'

'뭐? 그게 무슨 뜻인데.'

'무식하긴. 혼자서도 애를 낳을 수 있다고.'

그렇다.

황제펭귄은 10년에 한 번씩 스스로 아이를 갖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아이는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물론 툰드라 드래곤이 뒤를 봐주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니… 나도 멀었군.

"와, 배가 남산만 해요! 쟤 혹시 임신한 거 아니에요?"

"맞다. 황제펭귄은 자웅동체야.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구나. 10년마다 한 번씩 아이를 가지는 시기가 있는데, 지금이 그 시기였어."

"엄청 신기하네요. 그런데 뽀노는 어쩌다 길을 잃은 걸까요?"

순간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서였다고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 뽀노는 어미를 만났고, 어미도 뽀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구나."

"취익. 오해는 풀린 것 같군."

뒤에서 우리들을 지켜보던 슈벤이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크륵. 아니다. 그럴 만하지. 뭐, 사실 오크람 결투에서 우리가 이겼어도 어미를 찾아줄 생각이었다. 질 줄은 몰랐지만. 그라라라!"

그때 뽀노의 말을 듣던 어미 펭귄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우우웅- 하는 진동과 함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어? 어미 펭귄은 말을 할 수 있나 봐요! 신기하다."

"지저스! 아름다운 목소리!"

놀라워하는 김수정과 드레인을 뒤로 하고 나는 어미 펭귄의 앞에 섰다.

"그저 우연이었네."

[아닙니다. 제가 사례를 하고 싶지만 몸이 이래서….]

"몸조리가 먼저지. 우리들은 괜찮네."

그 순간 어미 펭귄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남산만한 배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띠링-!

[히든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나에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김수정도, 견소룡도, 드레인도 같은 메시지를 받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장 퀘스트 창을 열었다.

[히든 퀘스트 – 황제펭귄의 산란을 도와라!]

난이도: S

이곳 북극은 10년마다 한 번씩 황제펭귄의 산란기가 찾아온다. 그때 마다 모든 북극의 종족들은 어미 펭귄의 체력을 위해 먹을 것을 바치곤 한다.

그리고 지금 이곳엔 당신들과 서리 오크들이 있다. 어미 펭귄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구해주자!

그렇다면 그대들에게 보상이 있을지도.

-완료 조건: 황제펭귄의 건강한 산란 0/1 (남은 시간 : 3일)

-보상: 황제펭귄이 가진 물건 중 하나를 선택해서 받을 수 있다.

-이 퀘스트는 10년에 한 번 가능한 특수한 퀘스트입니다.

-현재 어미 펭귄이 먹고 싶은 것은 [킹콩 설인의 살코기]입니다.

…역시 이거였군.

'4번째 사도'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10년에 한 번 찾아오는 북극의 경사랬나."

[주먹성, 레이트라가 어미 펭귄의 상태에 당황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어디 아픈 것 같다며 반딧불을 준비합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들에게 북극의 경사를 설명합니다.]

[성단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와, 대박! 10년에 한 번 가능한 퀘스트래요!"

"오우, 나한테도 떴어요!"

"저도 떴군요."

호들갑을 떨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요리는 내가 담당하마."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우리들은 어미 펭귄의 수발을 들며 밤낮없이 지냈다.

나는 식재료를 그냥 내어주지 않고 요리를 해서 내어주었고, 어떨 때는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것을 원할 때도 있어서, 직접 찾으러 가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슈벤이 미리 구해놓은 것들도 있어서 쉽게 넘어갈 수 있었고,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우웅- 우웅-

[황제펭귄의 산란이 임박합니다.]

기다려왔던 순간이 찾아와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아니, 마치 내가 산란이 임박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힘들었지만 보람된 순간이었어요."

김수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어미 펭귄의 배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그래. 미역국 끓이느라 혼났지."

"후훗. 아버님이 제일 고생하셨죠."

이곳으로 올 때 아틀란 해를 가로질러 오며 식재료인 미역을 구한 적이 있었다.

배를 타고 오며 보이던 암초에서 자라던 것이었는데, 나는 암초가 보이면 멈춰서 미역을 챙기기도 했다.

나는 지난 3일 동안 미역국을 푹 고아 어미 펭귄에게 먹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경이롭구나. 어머니란 언제나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사랑이란 건 한없이, 아낌없이, 한 사람을 위해 쏟아내는 것이 아닐까.

그 대상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든, 뱃속에 있는 아이든, 중요한 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다.

[황제펭귄이 산란을 시작합니다!]

다음 순간 엄청난 알들이 어미 펭귄의 입속에서 쏟아졌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쏟아냈고, 우리들은 그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생각과는 조금 다른 산란 방식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독특한 방식에 신기해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충격적인 장면에 번개털을 떨어트립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멍한 표정을 짓습니다.]

함께 지켜보던 김수정이 입을 열었다.

"독, 독특하게 낳네요…?"

"…그러게 말이다. 일단 지켜보자."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메시지가 떴다.

[황제펭귄의 산란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히든 퀘스트 - <황제펭귄의 산란을 도와라!>  를 완료하였습니다.]

[북극을 수호하는 '겨울의 균형자'가 황제펭귄의 성공적인 산란을 전역에 알립니다.]

[모든 북극의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

…겨울의 균형자. 역시 그 녀석도 알고 있었던 건가.

겨울의 균형자는 저번에 언급한 툰드라 드래곤을 칭하는 말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균형자도 있다.

그들은 각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곳에 있는 녀석이 겨울의 힘을 가진 것뿐이다.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산란을 마친 어미펭귄이 말했다.

그녀의 곁엔 무수히 많은 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저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겠지.

그것이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대들에게 내가 가진 것들 중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어미 펭귄의 배가 꿀렁거리며, 다시 한번 무언가를 토하기 시작했다.

하나씩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빛.

…기대되는군. 과연 뭐가 나오려나.

황제펭귄의 뱃속엔 종종 엄청난 아이템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긴 드래곤에게 진상하는 물건들인데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나는 그 소문이 진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도 고생했는데, 보상은 확실하게 받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나씩 나오는 아이템들을 훑으며 정보를 살폈다.

김수정도, 견소룡도, 드레인도 마찬가지.

그런데 한 아이템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지?"

[알렉서스의 포크 숟가락]

이건 알렉서스가 쓰던 요리무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