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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95화 (95/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95화

제95화

"오크람…?"

슈벤은 내 손에 쥐어진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빛나는 뼈 조각에 푸른 이빨 문양이 그려진 고르바가 주었던 우정의 표식.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슈벤이 말한 그 오크람이라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이걸 뽀노에게 줄 뻔했군….

슈벤이 다시 물었다.

"그건 분명 오크람이다. 내 기억으로는 분명 남쪽의 꼬마가 가지고 있을 텐데. 이름이 아마…."

"고르바."

"그래 고르… 어떻게 알지? 설마 그를 죽인 거냐? 취이익!"

의심의 눈초리를 한 슈벤이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양손을 내저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해라. 그 녀석과는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친구…?"

"그래. 내가 고르바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적이 있다. 그 녀석이 고맙다면서 내게 우정의 표식으로 이걸 주더군."

"오크람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그건 우리 오크들의 초대 황제였던 무두르 님의 피와 뼈로 만든 물건이다."

"안다. 그 녀석이 설명해주더군. 그리고 주면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고르바의 말을 떠올리며 그대로 얘기했다.

"오크람 제도는 오크들의 분란을 조장하는 악습이라고 말이야."

"악습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서리 오크들은 그 악습을 대대로 이어왔다. 나 또한 그 사람 중 한 명이지. 크륵."

갑자기 슈벤이 정색을 하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늙어서 축 처진 것처럼 보이던 어깨가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처럼 커 보였다.

이거 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젠장.

슈벤이 커다란 발걸음을 옮기며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거 아나?"

"뭘?"

"그대가 가진 오크람은 족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거다."

"…들어 본 것 같은데."

"오크람 제도에 따라 우리들은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 * *

잠시 후.

내가 서 있는 곳은 마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곳이었다.

주변은 온통 무덤이 가득했고, 서리 오크들은 나를 둘러싸며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워우! 워우!"

"오크람 결투다! 취익."

"무두르 님께 영광을!"

그들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하는 것처럼 포효했다.

내가 남쪽에서 만났던 푸른 이빨 부족의 오크들과 하는 행동이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옆에 있던 김수정이 다가왔다.

"괜찮으시겠어요…?"

"아마도."

"여기 있는 오크들이랑 다 붙는다면서요?"

"…아마도."

슈벤이 말한 오크람 제도에 따르면 새로이 족장의 오크람을 가진 자가 나타날 경우.

모든 오크들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결투 신청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생사결을 치르며, 모든 오크들이 승복을 하고 나서야 족장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고르바 이 자식. 이런 건 진작 말해줬어야지….

사실 오크람을 슈벤에게 줘버리고 결투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정의 표식으로 받은 것이라, 빼앗기기도 좀 그랬다.

무엇보다도 슈벤이 결투의 조건으로 내건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꼭 이겨서 어미펭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알아."

그는 내게 결투에서 이기면 어미펭귄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황제펭귄을 찾는 것을 어떻게 아냐고 물으니, 뽀노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며칠 전 이곳에 어미가 왔었는데, 자신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대결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화끈한 결투를 기대합니다.]

"그래. 최선을 다해야지."

그와 동시에 슈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람 결투를 시작하겠다!"

둥! 둥! 둥!

근육질의 오크가 북을 쳤고, 주변에 있던 서리 오크가 발을 굴렀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퍼져나가는 진동.

그 엄숙한 모습에 나와 일행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견소룡이 말했다.

"엄청난 위압감이군요."

"그래.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뒤를 돌아보니 드레인은 겁을 먹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곁은 케르가 지키고 있었고, 뽀노가 그의 바늘을 훔치려 가방을 뒤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두 사람에게 드레인을 부탁한다고 말하며, 텅 빈 모래의 한복판을 걸어갔다.

순간 정적이 흐르며, 오크들의 발구름이 멈추었다.

"누가 저 인간을 상대해보겠는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슈벤의 목소리.

허공을 가르며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오크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시린 찬바람과 함께 정적만이 이곳의 정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마 내 힘을 한 번 보았으니, 쉽게 나서는 사람이 없겠지.

이것 때문에 결투를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한 번 공포를 느낀 약자는 강자를 향해 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도 없는가! 우리 서리 오크 부족은 겁쟁이들뿐인가!!"

오크들을 꾸짖는 것처럼 들리는 슈벤의 호통.

사실 그가 족장이라고 했을 때는 좀 의아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족장이 맞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생각보다 카리스마 있는 녀석이로군.

뭐, 하지만 아무도 없을 것 같으니 금방 끝나겠어.

이제 어미펭귄의 위치만 알게 되면….

"내가 나서겠다!"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오른쪽이었다.

서리 오크들 사이에서 가장 키가 큰 오크 하나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생각보다 큰 키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뭐가 이렇게 커? 전봇대냐?"

이 정도 키라면 고르바와 견줄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르바가 조금 더 컸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카르쉬다! 그대의 이름을 밝혀라!"

"고얀 놈 같으니라고. 어르신이라고 불러라!"

"좋다! 어르신! 내 대검을 받아라!"

다짜고짜 덤벼드는 카르쉬.

이곳에선 제법 강한 녀석인지 몸집에 비해선 움직임이 재빠른 편에 속했다.

레이트라의 '푸른 번개'라면 쉽게 제압이 가능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오크람을 건 결투에서는 육체의 힘만을 사용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만약 마법이나 주술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사용하는 순간, 반칙패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사도 스킬: 혜안을 사용합니다.]

얼마 만에 써보는 스킬인지 모르겠다.

사실 레이트라의 힘을 쓰게 되면서 잘 쓰지 않게 된 스킬이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유용한 스킬이었다.

나는 그의 대검을 피하며 말했다.

"이것뿐이냐? 너무 느린데?"

"크윽. 그럼 이건 어떠냐!"

카르쉬가 거대한 몸을 회전시키며 대검과 함께 돌았다.

그 모습이 마치 팽이와 같았다.

"죽어라! 족장의 오크람은 나의 것이다! 크하하하!"

차디찬 바람을 가르며 살을 에는 돌풍이 불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키는 바람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사도 스킬: 통찰을 사용합니다.]

눈앞에 카르쉬에 대한 통찰 정보가 떴다.

잡다한 것은 치우고 나는 핵심만 읽었다.

…약점이 다리인가.

하긴 지금 내 눈에 보기에도 그의 약점은 몸을 지탱하며 회전하고 있는 다리였다.

문제는 저 다리를 쳐낼 만한 힘이 나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걱정하지 않았다.

아까 전 별 다방(多房)에 있는 녀석들에게 미리 해둔 말이 있었으니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사도 버프를 부여합니다.]

[30분간 모든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시작됐군.

[주먹성, 레이트라가 성좌 버프를 부여합니다.]

[30분간 모든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성좌 버프를 부여합니다.]

[30분간 모든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사실 성좌들도 성애자(星愛者)에게 버프를 줄 수가 있다.

꽤 많은 영성(靈星)을 소모하는 것에 비해 효율이 좋지 않아서 쓰지 않을 뿐.

물론 사도 버프보다는 절반에 해당하는 증가 폭이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쿠웅. 쿠웅.

온몸에 있는 근육이 펌프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껴지는 충만감.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하다.

"아직이다. 더 힘이 필요해."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걸로는 저 서리 오크 놈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란 부족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버프의 중첩'.

…영성(靈星)을 좀 많이 쓰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반나절 정도 힘을 못 쓰고 여기서 이기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들도 이해할 것이다.

안 그러면 그 망할 툰드라 드래곤이 활개를 칠 테니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사도 버프를 부여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성좌 버프를 부여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성좌 버프를 부여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80% 올랐습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120% 올랐습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160%….]

셀 수 없는 숫자를 세는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요동쳤다.

마침내 200%에 달했을 때, 나는 한 메시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 상승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한계 돌파를 위해선 레벨 200을 달성해야합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카르쉬를 향해 날았다.

콰아아앙-!

엄청난 진각과 함께 땅이 흔들리는 충격. 그야말로 끝없는 힘이 내 몸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나는 혜안으로 그의 대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카르쉬의 발목을 걷어찼다.

순간 뼈가 부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끄아아아악-!"

비명과 동시에 공중을 한 바퀴 도는 카르쉬.

단 한 번의 발길질에 거체가 회전을 하는 모습은 서리 오크들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건 뒤에서 지켜보던 일행들도 마찬가지.

"세상에 저게 말이 돼?"

"역시 형님은 강하군."

"갓 뎀! BAAAAM!!"

모든 서리 오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 보였다.

나는 뒤에 있는 김수정을 불렀다.

"수정아. 이 녀석 치료 좀 부탁하마."

"아, 네!"

그녀가 서둘러 가르쉬의 발목을 치료했고 나는 서리 오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다음."

* * *

"크아악! 항복! 항복!"

마지막 서리 오크가 팔이 비틀린 채로 항복을 외쳤다.

사실 가르쉬를 압도적으로 쓰러트리면 그들이 무서워서 안 덤빌 줄 알았는데,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너무 압도적인 무(武)가 도리어 그들의 호승심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하긴, 치료해주는 사람도 있겠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싸워보겠냐 싶은 심정이겠지. 젠장. 그래도 힘들어 죽겠네.

"후우. 더는 없나…?"

주변을 둘러보니 더는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하얗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수고했다고 말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당신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당신의 실력에 감탄합니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레이트라 녀석은 신났겠군.

싸움 구경을 원 없이 할 수 있어서 말이야.

[주먹성, 레이트라가 언젠가 당신과 싸워보고 싶어 합니다.]

"뭐…? 난 싫다. 이놈아."

[주먹성, 레이트라가 두고 보라고 말합니다.]

"젠장. 그러던가. 난 오랜만에 힘들어 죽겠네. 에구구. 허리야."

나는 허리를 두들기며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견소룡이 포권을 취하며 다가왔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형님의 실력에 감탄했습니다."

"끙, 아직도 나랑 싸우고 싶냐?"

"네, 지금 모습을 보니 더요."

"너도 참 괴짜 녀석이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썩을 놈. 껄껄."

고개를 돌리니 김수정은 마지막 서리 오크의 팔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래도 팔을 많이 비틀진 않았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뒤에서 슈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는 거지?"

"음?"

그 한 마디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직도 남아있다고? 설마…?

"너도 덤빌 거냐?"

"후후… 난 몸으로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너는 아주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군."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슈벤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젠장. 불길하긴 불길하네.

슈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몸을 훑으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이 자식 변태는 아니겠지?

웃음을 멈춘 슈벤이 외쳤다.

"서리 오크들은 들어라!"

그의 한 마디에 모든 서리 오크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군기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쿠웅! 쿠웅!

"더 도전할 이가 있는가!"

"……."

눈보라를 타고 흐르는 정적.

슈벤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인을 맞이하라."

모든 서리 오크가 나를 향해 부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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