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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93화 (93/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93화

제93화

순간 세상이 슬로우 모션에 걸린 것처럼 느려졌다.

내 손을 떠나간 배추김치는 공중에서 3바퀴를 돌며 양념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것이 향한 곳은 내 앞에 있는 김성태의 뺨다구였다.

퍼억-!

"끄악! 이, 이 미친!!"

그의 회색 정장 재킷과 셔츠가 시뻘건 김치 양념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팍! 하고 터지는 쾌감을 느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김성태가 멱살을 잡으려 하자, 나는 반대 손에 몰래 쥐고 있던 또 다른 배추김치로 그의 싸대기를 날렸다.

퍼억-! 퍼억-!

"악! 악! 그만해! 이 미친 영감탱이야!!"

"이놈이 아직도!!"

한참이나 분이 풀릴 때까지 김치 싸대기를 날렸다.

한 5분 정도는 나도 무아지경에 빠졌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김성태의 얼굴은 김장이 되어있었고, 옆에 있던 며느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온몸이 김장된 김성태가 말했다.

"이, 이익! 내 이 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또 맞을 테냐?"

"크윽…!"

그는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더니 곧장 집을 나섰다.

나는 멍하니 서 있는 며느리에게 말했다.

"아가."

"네, 네?"

"집 앞에 소금 뿌려라."

* * *

[아크스타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홍채를 스캔하는 중입니다.]

[당신의 아이디를 찾는 중입니다….]

나는 아크스타에 접속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불쾌한 순간이 떠오르자, 저절로 욕이 나왔다.

"육시랄 놈 같으니라고."

만약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딴 협박을 하는 건지.

그래도 돈은 걱정이었다.

뭐, 정 안되면 빌리는 수가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며느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던데….

뭐, 일단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지.

일단은 그녀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단단히 말해두었으니, 강현이 녀석 귀에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렵게 만든 김치 같던데 2포기나 못쓰게 되었으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를 해야겠군.

점멸하는 시야와 동시에 세상이 밝아졌다.

익숙한 혹한의 눈보라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비명과도 같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자, 아까 내가 요리를 만들었던 그 공간이 나왔다.

그런데….

"어디 갔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시퍼런 바위와 벽들뿐이었다.

나는 솔라를 불러내 불을 밝혔다.

그때, 프로메테우스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성좌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안 느껴진다고…?"

아까 그 변호사 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내가 분명 금방 오겠다고 말했는데….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안쪽에서 성좌들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안쪽이면 저쪽인가…?"

나는 녀석이 말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백야 속에서만 있다가 오랜만에 마주하는 어둠을 보니, 왠지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빛과 어둠은 서로 끌리는 관계가 아닐까.

그렇게 끝을 모르는 발걸음 끝에 마주한 것은 거대한 갈림길이었다.

"흠. 어디로 가야되지…?"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왼쪽에서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 믿어도 되지?"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한두 번 겪어보냐고 말합니다.]

"하긴, 그렇지. 껄껄."

최근 들어서 종종 잊곤 한다.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이 녀석을 어떻게 불렀었는지 말이다.

"넌 내비게이션이니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 별명을 싫어합니다.]

"왜? 나는 좋은데."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에게 코딱지를 튕깁니다.]

"뭐, 네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마음에 들거든. 정감 있고 말이야."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을 째려봅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프로메테우스와 오붓하게 걸었다.

이렇게 단둘이 투닥거리며 걷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최근까지만 해도 레이트라를 만났고, 로믈라나를 만났고, 카미유를 만났다.

지금 보니 그 짧은 시간 사이 참 많은 성좌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레무스를 포함한 4명의 성좌지만….

그가 떠난 별의 요람을 떠올리며 잠깐 사색에 잠겼다.

머리를 휘저으며 상념을 털어냈고, 나는 오랜만에 프로메테우스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내가 묻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다.

"너 아직도 카미유 좋아하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무슨 소릴 하냐며 당황합니다.]

"흐음, 당황하는 걸 보니 아직도 좋아하나 보네. 네 녀석 의외로 순정파였구나?"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합니다.]

"호오…?"

끝까지 모르는 척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남자다운 면도 있는 녀석이다.

이렇게 당당히 인정할 줄이야….

하긴, 나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 계속 시치미 떼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내 머릿속엔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이 공유되어 있지만, 그의 감정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카미유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물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셀 수도 없이 많다고 말합니다.]

"쳇. 두루뭉술하게 말하기는…."

카미유는 이런 코딱지나 튕기는 돌싱 놈이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어디선가 파르르 떨리는 진공음이 들려왔다.

내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그것은 카미유의 반딧불이 하늘을 날 때 내는 소리니까.

어딘가에 숨어있었는지, 반딧불은 오른쪽에 있던 벽면에서 나타났다.

반딧불을 만지자, 머리 위로 조그만 스파크가 튀었다.

츠츠츳-!

그와 동시에 폭탄처럼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큰일 났다고 말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고 뺨을 때립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뺨을 만지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사랑싸움 할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젠장. 또 사랑싸움이냐.

눈꼴사나워 죽겠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나도 갑자기 마누라가 보고 싶다.

아마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두 사람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이 됐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우리들은 많이 싸웠지만, 금방 화해하기도 했으니까.

싸우면서 정드는 거지 뭐.

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레이트라에게 말했다.

"레이트라.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라. 최대한 간단하게."

사실 성좌에게 '기억 전이'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상당한 영성(靈星)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영성(靈星)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레이트라가 말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서리 오크들이라고 말합니다.]

"뭐…? 그놈들은 남쪽에서만 활동할 텐데?"

그러고 보니 영역을 확장했다는데 어디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론 그놈들이 있는 곳은 원래 백야와 흑야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곳이었는데….

아니, 이제는 백야만 있는 곳인가?

[주먹성, 레이트라가 그들이 동굴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엥…?"

갑작스런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아직도 간접 메시지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이놈들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헛기침을 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이제야 좀 잠잠해졌네.

나는 깔끔해진 하늘을 보며, 다시 물었다.

"서리 오크가 확실하냐?"

[주먹성, 레이트라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자신도 봤다고 말합니다.]

"흐음."

카미유도 저렇게 말하는 걸보면 거의 확실하다는 얘기인데….

만약 진짜 '서리 오크'들이라면 조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곳 북극에서 가장 무(武)를 숭상하는 오크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닥치지 않고 잡아먹는 잡식으로도 유명했다.

500년 전 기억으로는 말이다.

"서둘러야겠는데."

조급해진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또 다른 것을 물었다.

"대체 어떻게 당한 거냐? 그래도 소룡이 녀석이 있어서 쉽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주먹성, 레이트라가 그들이 독침 같은 것을 쏘았다고 말합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그것을 맞자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려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그들의 독침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독침이라…."

프로메테우스의 기억 속에도 '서리 오크'들이 그런 것을 사용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하긴, 이미 500년 전의 기억인데 지금에 와서 그들의 문명이 발전했어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오른쪽을 가리킵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정면을 가리킵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왼쪽을 가리킵니다.]

나는 착실하게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뛰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며, 잠시 후 드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오크왕 무두르의 무덤에 입장하셨습니다.]

진짜 서리 오크들이잖아?

잠깐. 근데 무두르라고…?

하늘에 뜬 메시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려 버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다섯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너비를 가진 길이었고, 그 아래로 서리 오크들의 마을이 듬성듬성 보였다.

"설마 고르바 녀석이 말한 무두르의 무덤이 여기였던 건가?"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북쪽에 있다고만 들었지, 그게 설마 이곳 북극에 있다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충격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뿌우우우우-

"침입자다! 취이익."

저 멀리 망루 위에 올라있는 서리 오크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뿔나팔을 부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 전에 날 어떻게 본거지…?

망루와 나 사이의 거리는 굉장히 멀었다.

초감각으로 올라간 시력으로 확인해보니, 오크의 손에 조그만 망원경 같은 것이 들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놈들 무슨 망원경까지… 진짜 문명이 개화하기라도 한 건가?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커다란 정문이 열리며 서리 오크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쥐고 내게로 달려왔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자신의 힘을 빌려줍니다.]

[푸른 번개가 당신의 몸에 흐르기 시작합니다.]

츠츠츠츳.

레벨이 오르며 더욱 많은 푸른 번개가 온몸을 관통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차오르는 힘을 느끼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를 느꼈다.

이 힘만 있으면 서리 오크들에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얼음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반딧불성, 카미유가 일행들을 보호하느라 영성(靈星)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래? 그럼 넌 쉬어라. 이젠 내 차례니까."

다음 순간 푸른 번개가 온몸에서 터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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