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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88화 (88/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88화

제88화

"뽀통령…?"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시퍼런 피부에 노란 모자를 쓰고 있는 안경을 쓴 펭귄 캐릭터.

막내딸 서현이가 외손주를 달래기 위해 이 녀석을 자주 보여준다고 했었다.

이름이 아마….

"뽀노노예요."

김수정이 터질 듯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모습이 그 '뽀노노'의 모습과 비슷했다.

주황색이 섞인 시퍼런 옷.

노랑색의 모자.

펭귄의 부리와 갈기만 없다뿐이지, 지금 내 모습은 그것과 정말 흡사했다.

마침 드레인이 입을 열며 종지부를 찍었다.

"오우, 맞아요! 뽀노노 컨셉의 옷을 한번 만들어봤어요!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지저스!"

…지저스는 개뿔. 넌 뒤졌으.

갑자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나는 재빨리 황제펭귄 정장을 벗으며 드레인에게 던져버렸다.

"좀 더 어른스럽게 고쳐라. 내 나이랑 맞지 않아."

"왓? 노우! 엄청 잘 어울려요. 브라더! 베리 큐티!"

드레인은 계속해서 잘 어울린다며 옷을 들고 따라다녔다.

나는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옆에 있는 다이베우스에게 물었다.

"백야의 나그네는 여전히 그곳에 있나?"

"그렇다네. 이야기는 대충 전해 들었네. 흑야의 나그네님이…."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좋지 않은 기억을 애써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한 성좌를 별의 요람으로 돌려보낸 일이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마음껏 이야기할 수도, 떠들 수도 없었다.

그것이 그를 향한 내 속죄의 방법이었다.

"미안하네. 괜한 이야기를 꺼냈군."

"아닐세.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네. 내가 더 미안하지. 잠시 설산에 다녀오겠네."

나는 그를 뒤로하고 혼자 발걸음을 옮겼다.

드레인이 여전히 옷을 들고 잘 어울린다며 따라왔고, 김수정도 내 뒤를 따랐다.

나는 조용히 따라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토록 원하던 성좌를 가지게 된 소감이 어떠냐."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토록 원했던 건데 이제 보니까 너무 무거운 힘인 것 같아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지. 영화에서 본 대사인데 어디서 봤던 건지 기억은 안 나는구나."

옆에 있던 드레인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미스 킴! 스타 프루츠를 먹은 거예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와우! 콩그레츄레이션! 축하해요! BAAAM!"

"감사해요. 드레인 할아버지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우, 난 괜찮아요. 내겐 오직 패션에 대한 생각밖에 없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해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들은 익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로믈라나가 있는 북서쪽의 거대한 설산이었다.

"오우, 정말 엄청난 눈보라군요. 솔라가 없었다면 얼어 죽었을 거예요."

드레인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애초에 처음 나오는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어느새 분지 근처에 이르렀고, 펜릴이 입을 열었다.

"크륵. 다 왔군."

[늑대성, 로믈라나가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근처에 있던 '영성의 결계'가 일시적으로 약해집니다.]

눈보라에 반사된 백광과 동시에 주변의 정경이 변했다.

드레인이 새하얀 크리스탈과 얼음을 보며 탄성을 뱉었다.

"오 마이 갓!"

…그놈의 영어 시끄러워 죽겠네.

점잖은 한글과 달리 영어는 좀 과장된 표현법들이 있다.

정도껏 해야지 계속 들으니깐 조금 귀찮기도 했다.

안 그래도 수다스러운 드레인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 데려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데려갔다면 누체로 가는 길 내내 우리들은 그의 수다에 시달렸을 테니까.

…뭐, 그래도 착한 녀석이긴 해.

타고난 천성 자체가 나쁜 녀석은 아니다.

다만 나이가 60줄에 들어선 녀석이 좀 수다스러워서 그렇지.

무너지는 정경 속에서 익숙한 모습이 드러났다.

고고한 하얀 늑대의 모습을 한 로믈라나. 이제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버린 외로운 늑대가 서 있었다.

[어서 와요. 기다렸어요.]

…저게 뭐지?

그녀의 주변엔 검은 구체들이 두둥실 떠 있었다.

백야의 힘과는 상반되는 이질적인 기운. 나는 저 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흑야…?"

[맞습니다.]

"어떻게…?"

그런 내 의문에 답변을 하듯 로믈라나가 말했다.

[레무스가 죽으며 남긴 것입니다. 그의 스타피스예요.]

"스타피스!"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설마 성좌가 죽으면 스타피스를 남기게 되는 것인가…?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었다.

500년 전 라그나로크 당시 '죽음의 군단'과의 일전에서도 죽은 성좌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역시 이 녀석도 처음 안 것 같군.

[펜릴. 누체의 주민들에게 내 뜻을 전했느냐.]

"예, 어머니."

[뭐라고 하더냐.]

"그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어머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들이 따르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대체 무슨 뜻을 전한 거지…?

궁금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솔라에게 빙의하며 물었다.

"로믈라나. 누체의 주민들을 어쩔 생각이냐."

[…전 이제 1등성에 올라설 생각입니다. 프로메테우스 님.]

프로메테우스의 푸른 눈이 일렁이며 커졌다.

"뭐? 너 설마…."

[네, 전 지금 더럽혀진 레무스의 스타피스를 정화하는 중입니다. 판도라의 조각이라고 했나요? 정말 사악한 힘이군요. 몰아내기가 쉽지 않아요.]

"내가 도와줘?"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해요. 누군가의 힘이 개입되어버린다면 전 1등성에 오르지 못할 거예요.]

"쳇. 알았다."

그렇게 말한 프로메테우스가 빙의를 풀었는지 다시 솔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솔라는 기분 좋은 듯 해해거리며 내 주변을 공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로믈라나에게 물었다.

"1등성에 오르는 것과 누체의 주민은 무슨 상관이지?"

[전 그들에게 흑야를 약속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레무스의 힘을 흡수해 1등성에 오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그전에 당신에게 힘을 빌려줄 생각입니다. 알데바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지요.]

"어떻게 빌려준다는 거지?"

[제가 이걸 정화해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온전한 힘이 담긴 레무스의 모든 것이 담긴 스타피스입니다. 당신이라면 사용할 수 있겠지요.]

온전한 힘이 담긴 스타피스라는 말에 동공이 커졌다.

확실히 그것을 받을 수만 있다면 미노타는 문제가 아니었다.

애매한 스타피스 두 개보다는 온전한 스타피스 하나가 좋은 법이니까.

"혹시 대가가 있나…?"

[눈치가 빠르신 분이군요. 큰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알데바란을 발견하게 되면 제게 알려달라는 것뿐입니다.]

띠링-!

[성좌 퀘스트 - 로믈라나의 복수]

난이도: SS

북극을 지배하고 있는 성좌 중 하나인 로믈라나가 남편인 레무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당신에게 알데바란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다. 훗날 알데바란을 발견한다면 그녀에게 알려주도록 하자.

-완료 조건: 알데바란의 발견 0/1

-보상: 로믈라나와 웰시 울프족 전체의 도움.

오랜만에 보는 퀘스트 정보창이었다.

무려 SS 난이도의 퀘스트였지만, 내겐 나쁠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미노타를 없애게 된다면 알데바란과는 자연히 척을 질 수밖에 없을 터.

언젠가 그와 싸우게 된다면 지원군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 * *

설산에서 내려온 우리들은 다이베우스의 이글루로 돌아왔다.

김수정은 자신의 성좌인 카미유와 대화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드레인은 황제펭귄 정장을 좀 더 멋있게 만들어보겠다며 다시 고드름 바느질을 시작했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열흘이라….

로믈라나는 레무스의 스타피스를 완전히 정화하는 데 열흘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진행 중인 퀘스트는 17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바다를 건너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이틀인 것을 떠올리면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돌아갈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뭘 하느냐가 문제인데…."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요리를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묻습니다.]

"요리…? 너 배고프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절대 배고파서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자식 이거 배고픈 거 맞는 거 같은데….

"싫다. 이놈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습니다.]

사실 이곳에선 요리가 힘든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곳의 환경은 솔라에겐 아주 취약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솔라의 레벨이 조금 더 높았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화력으로는 이곳에서 요리는 어림도 없었다.

구름의 정령을 얻어서 '눈의 요리술'을 배운 상태였다면 모를까.

이미 배에서 많은 음식을 만들어 두었기에 식량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었다.

마침 뒤에서 다이베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고민을 그리 깊게 하시나."

"그냥 열흘 동안 여기서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그럴 땐 굴라가 최고지. 자 들게."

나는 그가 건네주는 굴라를 마셨다.

그런데 약간 쌉쌀한 맛이 느껴졌다.

왠지 익숙한 맛인데. 이거 혹시…?

"술인가…?"

"오, 알아보는군. 맞아. 우리들은 굴라를 술과 섞어 먹기도 한다네."

생각보다 술과 섞은 굴라의 맛은 좋았다.

데운 콜라와 술의 조합이라니.

어쩌면 현실에서도 이렇게 먹으면 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젖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당신을 노려봅니다.]

"…맛있군."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나저나 열흘 동안 할 게 없다면, 사냥이라도 해보는 게 어떤가? 마침 이곳 남쪽에 '아이스 재규어'들이 난동을 부려서 말이야. 자네들이 도와주면 좋을 것 같군."

띠링-!

[아이스 재규어를 퇴치하라!]

난이도: A-

낮의 마을 '디야'의 남쪽에 '아이스 재규어'들이 난입하며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다이베우스는 날렵한 그들을 잡기가 힘들어 처치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는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아이스 재규어'를 잡도록 하자.

-완료 조건: 아이스 재규어 0/100

-보상: 경험치 5%, 굴라 특제 마력 포션(대)

-반복 퀘스트입니다. 레벨 150이상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퀘스트 완료 시 몬스터의 내용이 바뀔 수 있습니다.

호오…?

생각보다 보상이 꽤 짭짤했다.

안 그래도 내 레벨은 90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레무스와의 싸움 이후 무려 20이나 레벨이 오른 것이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잘됐군. 그놈들을 처치하겠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고맙네. 자네들의 실력을 기대하지. 12월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렇게 웃으며 굴라를 마시는데 '견소룡'이 접속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도 마침 이곳에서 로그아웃을 했는지, 금방 나를 발견하곤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에게 말했다.

"소룡아."

"예.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는 됐고, 레벨업이나 하러 가자."

그와 동시에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펑-! 펑펑-! 퍼엉-!

멀거니 들려오는 수인들의 환호 소리.

디야의 주민들은 하늘을 보며 포효하고 있었다.

코카 일족은 목청껏 울었고, 바다 표범 같이 생긴 녀석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다이베우스가 말했다.

"하루가 지난 모양이야."

나는 그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 북극은 하루가 지났음을 오로라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오로라를 보며 말했다.

"…이제 16일 남았나."

퀘스트 완료까지 남은 시간 앞으로 16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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