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빼고 다 젊은이-86화 (86/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86화

제86화

그 한마디에 별 다방(多房)에 있던 성좌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프로메테우스의 감정이 가장 크게 와 닿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시리도록 아픈 감정이 내 심장을 송곳처럼 찔러왔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레무스는 죽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그를 막지 않는다면….]

로믈라나는 뒷말을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김수정도, 견소룡도 눈을 질끈 감았다.

예정된 비극의 결말은 눈사태처럼 몰려왔다.

우리들은 작은 희망이 있기라도 바랐지만, 그건 어느 때라도 꺼내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김수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정말 이 방법밖엔 없는 거예요?"

"……."

"정말, 정말로…."

프로메테우스도, 레이트라도, 그리고 그녀의 성좌가 된 카미유도 침묵만을 지켰다.

때론 침묵이 무언의 긍정이 되기도 한다. 그 잔혹한 침묵 속에서 김수정이 울먹거렸다.

"이건 너무 비극이야. 이건…."

나는 그녀의 천성(天星)이 왜 '간절한 희망의 군주'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이제 곧 벌어질 이 비극이 웃어넘길 수 있는 희극이 되기만을 바라면서.

하지만 때론, 그 모든 것을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에게 사도 버프를 부여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붉어진 눈시울로 당신에게 힘을 빌려줍니다.]

프로메테우스, 레이트라….

그들의 태양과 번개가 내 다리에 깃들었다.

해 오름은 이 비극의 결말을 향해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이 비극을 끝맺길 바라고 있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자신의 반딧불을 빌려줍니다.]

카미유의 반딧불이 내 몸을 감싸 안았고.

[늑대성, 로믈라나가 당신과 백야의 힘을 공유합니다.]

로믈라나의 백야가 몸속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이제 남은 것은 선택뿐이었다.

나는 김수정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선택을 한 것이다.

자신이 위험해지더라도, 누군가를 죽일 수는 없다고 외치는 정의의 사도처럼.

순간 별 다방(多房)을 떠날 때 '프로메테우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감은 더 이상 선택 받은 사람이 아니야. 이젠 선택할 수밖에 없어. 이왕이면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랄게.'

그렇구나.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구나.

그래. 만약 이게 나의 최선이라면….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로믈라나의 거대한 등을 향해 뛰어올랐다.

로믈라나가 백야의 힘을 발산하자, 온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엄청난 과부하가 내 몸속을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버텨내야 했다.

[백야가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현재 당신의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힘입니다. 2분의 지속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힘을 사용하고 나면 이틀간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왠지 겁을 주는 것 같은 메시지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가상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게 붉어지는 눈시울은 이것을 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딱 2분. 내가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로믈라나."

[…알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로믈라나는 달렸다.

판도라의 조각의 영향으로 더욱 거대해진 흑야랑들이 덤벼왔지만 괜찮았다.

지금의 내겐 이것이 있으니까.

[성좌 스킬, '반딧불 협주곡'을 사용합니다.]

[초당 5%의 체력을 지속 회복합니다.]

[사방 100미터를 보호막으로 감쌉니다.]

"깨갱! 깨갱!"

보호막을 뚫지 못하는 흑야랑들은 무참히 떨어져 나갔다.

우리들은 레무스와 맞붙었고, 그는 은밀하게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뇌룡각."

파지지지직-

내겐 카미유의 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리에서 뿜어진 레이트라의 푸른 번개가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그 틈에 로믈라나의 발톱이 레무스의 가슴을 할퀴었다.

콰아아악.

레무스가 포효했다.

[크워어어억!]

이어지는 공격은 생각보다 무참했다.

나는 계속해서 번개를 뿜어냈고, 로믈라나는 마비된 레무스를 공격했다.

하지만 힘이 조금씩 딸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돕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견소룡이 뒤에서 뇌룡 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엄청난 속도의 번개가 발현되며 레무스의 상처가 더욱 벌어졌다.

우리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계속해서 공격해 나갔다.

그것은 로믈라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보.]

덤덤하게 말하는 로믈라나의 말이 더욱 슬프게 들려왔다.

그녀의 가슴은, 마음은, 이미 망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걸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신의 반려자와 싸우는 건 그만큼 비정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생각보다 냉정했다.

이럴 때는 지혜롭다는 것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도 이걸 원할 거라 생각해요.]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을 감습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입술을 질끈 깨뭅니다.]

모두가 비통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망연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성좌 스킬, '반딧불 협주곡'의 지속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당신은 1분 뒤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젠장. 벌써 시간이…."

보호막이 부서진다면 로믈라나도, 나도, 그리고 견소룡도 치명상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만큼 레무스가 뿜어내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벌써 절반의 생명력을 깎았지만, 아직 절반이 남아 있기도 했다.

사라져 가는 보호막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반딧불 협주곡."

파아아앗-!

사라져가던 보호막이 다시 원상복귀 됐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아래쪽이었다.

김수정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나는 잠자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누군가의 죽음에 무감각해졌다고,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그렇게요."

[반딧불성, 카미유가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젠 알겠어요.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그리고 잘 보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걸요."

그녀의 양손이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저건…."

성좌의 등성은 '3'까지 있다. 그리고 카미유는 3등성의 성좌. 그들은 최소한의 공격 능력은 가지고 있다.

김수정의 입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형화무연(螢火無煙)."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두 개의 거대한 반딧불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명백했다.

일직선으로 기다란 폭격을 가하는 대공습 성좌 스킬.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야광 빛을 보며, 침음했다.

펑! 퍼펑! 퍼퍼펑!

두 마리의 반딧불은 무차별적으로 야광 빛을 폭격했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범위 스킬이라 하나하나의 데미지는 작았지만, 그것이 거대한 단일 타겟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이름처럼 정말로 반딧불에는 연기가 없었다.

[크워어억!]

레무스가 몸부림쳤다.

다행히 우리들은 보호막을 쓰고 있어서 데미지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은 웃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여보…. 미안해요….]

로믈라나의 발밑에 있던 자식들도 눈물을 흘렸다.

특히 첫째였던 펜릴이 가장 크게 울었다.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늑대의 울음소리는 제법 슬픈 면이 있다.

그저 누군가에게 위압을 주기 위한 것인 줄 알았던 울음소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아우우우!"

그 광경을 보며, 우리들은 엄숙해졌다.

나는 견소룡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부축을 받고 있었고, 마침내 레무스의 생명력은 5%가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늑대성, 레무스의 정신이 돌아옵니다.]

[로믈라나….]

순간, 레무스를 향해 휘두르던 로믈라나의 발톱이 멈췄다.

하지만 폭격은 계속되고 있었고, 이미 시작된 것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우리들을 슬프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여보.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잘했소. 역시 내 아내구려….]

레무스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도,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펜릴에게 돌아갔다.

[많이 컸구나. 펜릴….]

"아버님…!"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안타깝구나.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다. 이제는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 어머니를 지켜라.]

펜릴을 포함한 모든 웰시 울프들이 울부짖었다.

지금 그들의 포효는 맹세의 울음소리였다. 그것도 아버지를 향한 처절한 진혼곡이었다.

레무스는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나는 그의 목숨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대한 늑대의 미소를 보며, 내 마음이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일말의 미련도 이제 남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자유를 얻어서 홀가분하다는 해방감.

"아우우우우!"

레무스의 마지막 포효소리와 함께 흑야가 폭발했다.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가족을 향한 마지막 배려였다.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죄책감을 지우지 않았다.

그것이 로믈라나를 향한 레무스의 사랑이었다.

쿠구구구구.

세상이 점멸한다. 빛과 어둠, 푸른 번개, 야광의 반딧불.

모든 것이 뒤섞이며 새하얀 빛을 만들어 냈다.

우리들은 그 눈부신 광야에 눈을 뜨지 못했다.

주변의 정경을 가득 메운 눈이 모든 것을 반사시켰고, 세상이 빛에 잠겼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반딧불성, 카미유가 하늘을 보며 기도합니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슬픔 속에서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들이 눈을 뜬 것은 찰나가 지난 뒤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별똥별이 세상을 역행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것이 레무스의 성혼(星魂)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별의 요람'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프시케와 정체 모를 노인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세상 모든 별과 친구가 되어 외롭지 않길 바라는 희망적인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레무스는 별의 요람으로 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와 함께할 많은 별들이 있을 테니까.

나는 레무스의 성혼(星魂)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잠시 뒤, 하늘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World. 세상을 수호하던 성좌 하나가 '별의 요람'으로 돌아갔습니다.]

먹먹한 마음과 함께 나는 입을 열었다.

"레무스. 별의 가호가 함께 하길…."

그리고 눈을 감으며 쓰러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