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78화
제78화
나는 다시 한번 첫 번째 문구를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프로메테우스도, 그리고 나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이곳은 내 생각보다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김수정이 입을 열었다.
"여기 마을 이름이 디야인가 봐요. 엄청 예쁜 이름이네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트라, 아니 디야는 500년 전 기억 그대로였다.
선원들은 처음 와보는 이곳을 둘러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들이 있을 텐데….
"이게 몇백 년 만의 이방인들인지 모르겠군."
마침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뭐, 뭐야. 백곰이잖아?!"
"두 발로 걷고 있어!"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역시나 있었군.
코카 일족.
그곳엔 갑옷을 입은 채 커다란 양손 도끼를 뒤로 매고 있는 백곰이 서 있었다.
원래 이곳은 북극의 수인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곳이었는데, 그중 코카 일족은 덩치도 크고 사나워 보이지만 타 종족들에게는 호의적인 면이 있었다.
이름 모를 백곰이 입을 열었다.
"인간들이었군. 이곳에 오기 힘들었을 텐데 잘 왔네. 내 이름은 다이베우스. 이곳 디야를 수호하는 전사이며, 이곳의 문지기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지. 그대들의 대표는 누군가."
나는 그의 앞으로 나섰다.
"날세."
"음?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군. 의외인걸."
"그런 소릴 자주 듣지."
"그나저나 이곳까진 어쩐 일이지? 인간들은 이곳의 추위에 적응하기가…."
고개를 돌리던 다이베우스의 눈이 솔라에게 향했다.
"저건…?"
…솔라를 아는 건가?
나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메시지를 보았다.
[강대한 추위가 밀려옵니다.]
[1시간 안에 몸을 녹이지 않으면 동상으로 얼어 죽습니다.]
[솔라의 힘이 주변 10M 내의 추위를 차단합니다.]
사실 솔라의 레벨은 이곳으로 오며 60이 넘은 상태였다.
지속시간은 1시간으로 늘었고, 쿨타임도 1시간으로 동일해졌다.
이제 솔라가 일찍 없어지지 않는 이상은 무한으로 소환할 수 있는 것 이다.
다이베우스가 입을 열었다.
"오오! 전설로만 듣던 '살아있는 태양'이 진짜로 있을 줄이야! 그대는 혹시 500년 전의 약속을 지키러 온 구도자인가!"
500년 전의 약속이라….
이건 말할 필요도 없이 가이아가 남긴 '찬란한 약속'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도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을 지키러 온 사람은 맞지."
"오오! [12월의 침략자] 님을 만나러 온 것인가 보군!"
본 적도 없지만 기억 속엔 또렷한 별명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12월의 침략자.
그것은 내가 언젠가 만나야 할 또 다른 '사도'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이곳의 최북단에 그 녀석이 살고 있는데, 만난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구름의 정령이 없어서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다른 용건으로 왔다. 쌍왕(雙王)을 만나려고."
"음…."
다이베우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었다.
그가 말했다.
"쌍왕이라… 그러고 보니, 그대는 이곳의 상황을 잘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이지?"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 우선 우리 집으로 가지 않겠나? 조금만 있으면 교대시간이거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그렇게 다이베우스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수많은 북극의 수인들이 걸어 다니는 마을을 둘러보며 선원들이 신기하다고 탄성을 질렀고, 털옷과 귀마개를 끼고 있는 케르가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솔라의 곁을 벗어나는 바람에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거대한 이글루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우와 이렇게 큰 이글루는 처음 봐요! TV로만 봤었는데 원래 이렇게 컸었나?"
"거대한 건 우리 중국도 지지 않는데 이건 진짜 성이군."
"오우, 판타스틱한 이글루의 곡선을 보니, 영감이 떠올라요."
"콸."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투덜거립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별 다방이 좁다며 맞장구를 칩니다.]
나는 간접 메시지를 외면하며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강철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보였다.
끼이이이익-
다이베우스가 말했다.
"들어가지. 자동문이야."
"와, 완전 신식이네. 그치 케르야?"
"콸!"
"뷰티풀 도어!"
"신기하군."
함께 온 일행들이 한 마디씩 소감을 말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둑이 들어오면 어쩌려고 쯧.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또 다른 문이 하나 있었다.
다이베우스가 벽에 손을 올리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지문인식이냐….
그렇게 안으로 들어선 우리들은 생각보다 넓은 이글루의 내부에 깜짝 놀랐다.
"와, 진짜 TV에서 보던 그대론데요?"
"북극으로 여행은 안가도 되겠군."
"베리 굿잡!"
함께 온 선원들과 일행들은 미로 같은 이글루를 돌아보기로 했다.
다이베우스에게 물어보니, 볼 건 없지만 그래도 된다고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차를 홀짝였다.
다이베우스가 말했다.
"이곳의 특제 '굴라'맛이 어떤가?"
"썩 괜찮군."
굴라는 북극의 수인들이 마시는 전통 차이자 음료였다.
마신 소감은 간단했다.
왜냐면 끓인 콜라 맛이었으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맛있네.
내심 속으로 다음에 콜라를 끓여 먹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 이곳의 상황이 대체 어떤 거지? 혹시 쌍왕(雙王)에게 문제가 생겼나?"
다이베우스가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음, 실은 100년 전 그분들께서는 갈라지셨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미간을 찌푸립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호기심을 가집니다.]
"갈라져? 그들은 부부가 아니었나?"
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쌍왕은 바로 백야의 나그네와 흑야의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초로 둘이 성좌의 힘을 나누어 가진 부부 성좌였다.
물론 인간은 아니지만 말이다.
순간, 나는 마을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문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혹시 이곳의 해가 지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는군. 그래. 맞아. 100년 전 이곳은 원래 '탄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어. 근데 무슨 일인지 두 분이 싸우셨고, 이곳은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낮의 마을'이 되어버렸지."
…이건 뭐 부부 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네.
이래서 가정의 평화는 중요하다.
진짜 피해는 3자들이 보는 법이니까.
"그럼 이곳엔 백야의 나그네만 있는 건가?"
"그래.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밤의 마을 '누체'가 나오지. 그곳엔 흑야의 나그네께서 계셔 그런데…."
다이베우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거 왠지 불길한데….
"왜 그러지?"
"흑야의 나그네께선 어디 계신지 알 방법이 없다. 모습을 감춘 지 꽤 오래 되셨거든."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한숨을 쉽니다.]
젠장. 이러면 일이 꼬이는데….
원래 내 계획은 그 두 사람에게서 스타피스를 받는 것이었다.
알데바란과 척을 진 두 사람이라면 분명 힘을 빌려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문제는 둘의 힘이 나뉘어져 있으니 2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개만 받아서는 판도라의 조각을 가진 미노타에게 맞서긴 조금 힘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읽은 다이베우스가 물었다.
"흑야의 나그네 님을 꼭 만나야 하나?"
"아니, 둘 다 만나야 해. 힘을 빌려야 하거든."
"음, 그렇다면 백야의 나그네 님을 먼저 만나보게. 어쩌면 그분은 행방을 아실지도 몰라."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지. 백야의 나그네는 어디 있지?"
"멀지 않네. 이곳 북서쪽에 조그만 설산이 있네. 그곳 분지에서 생활하시지. 자식들과 함께 말이야."
"음."
그때, 구경을 마친 일행들이 나왔다.
김수정이 물었다.
"아버님, 구경 안 해보셔도 괜찮으세요? 여기 진짜 멋진데."
"괜찮다. 나는 잠깐 가볼 곳이 있어."
"어디로 가시려구요? 저희는 솔라가 없으면 얼어 죽는데…."
"이곳이라면 안심해도 될 거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추위에 관련된 메시지는 안 뜨네요. 그런데 혼자 가시려구요? 같이 가도 돼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뭐, 괜찮으려나….
이곳의 성좌들은 대체로 인간에게 호의적인 자들이었다.
백야의 나그네도 그중 하나. 참고로 이곳엔 얼음땡 요정도 있다.
그는 12월의 침략자를 지키고 있겠지.
"그래. 같이 가자. 괜찮을 것 같구나."
"저도 가겠습니다. 형님."
견소룡이 다가오며 말하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와준다면 더 없이 안전이 확실해지기 때문에 더없이 든든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북서쪽에 있는 설산으로 움직였다.
나머지는 이곳 이글루에서 대기하기로 했고, 우리들은 그곳을 나와 북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벅 서벅.
…눈 밟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군.
발목까지 오는 눈이 제법 차가웠지만, 버틸 만했다.
원래라면 동상에 걸려야 했는데, 솔라 덕분에 괜찮았다.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김수정이 물었다.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누굴 좀 만나야 한다."
"그게 누군데요?"
"성좌."
"예…?"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건 견소룡도 마찬가지.
하긴 두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니, 저런 표정도 당연하다.
나도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렇게 침착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이어서 말했다.
"이곳엔 제법 많은 성좌가 있다. 우리는 그중 하나를 만나러 갈 거야."
"그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아시는거세요?"
"…공부했지."
김수정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고, 견소룡은 입꼬리를 올리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떤 성좌에요?"
"2등성의 지위를 가진 녀석들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날카롭고 차갑다."
"혹시 미노타를 해치우기 위해서 만난다는 늑대들이…?"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웰시 울프 족이다."
그 말과 동시에 눈발을 헤치고 달려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컹! 컹컹!"
…아무래도 다 온 모양이군.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견소룡의 푸른 번개가 사그라졌고, 김수정의 신성력이 손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앞에 당도한 늑대들의 무리. 그들은 200레벨이 넘는 웰시 울프들이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귀여운 늑대들을 보며 웃습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오랜만에 보는 늑대들을 보며 낄낄거립니다.]
"아버님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걱정 마라. 그들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해치지 않는 이들이니까."
"근데 늑대치곤 귀여운데요? 웰시 코기처럼 다리가 짧은 게… 풉. 저게 뭐야."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빛이 제법 귀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을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이들의 이빨과 발톱은 엄청난 냉독(冷毒)을 가졌으니까.
그때, 푸른 눈의 솔라가 앞으로 나섰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솔라의 몸에 빙의합니다.]
"백야의 나그네. 나다. 프로메테우스."
그 순간 하늘에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것은 모두가 볼 수 있는 전체 메시지였다.
[2등성, '백야의 나그네'가 깜짝 놀랍니다.]
[2등성, '백야의 나그네'가 당신들을 안내합니다.]
[근처에 있던 '영성의 결계'가 일시적으로 느슨해집니다.]
순간 주변의 정경이 바뀌었다.
결계가 약해지며 일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와! 정말 성좌가 있었잖아?"
"…놀랍군요."
원래 성좌들은 인간계에선 보통 숨어서 지낸다.
누군가는 이렇게 결계를 치기도 하고,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숨어 살기도 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뻔하다.
…귀찮은 놈들이 찾아와서겠지.
천궁에 사는 궁좌들을 제외한 나머지 성좌들을 종종 찾아오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성좌는 아닐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강대한 힘을 쌓은 자들.
우리를 둘러싼 웰시 울프들이 허리를 숙인 건 그때였다.
"타라는 건가?"
"괘, 괜찮겠죠?"
그들의 다리는 짧았지만, 덩치는 제법 커서 사람이 탈 정도는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등에 올라타며 말했다.
"뭐해. 안 타고."
"아. 넵!"
그렇게 모두가 올라타자, 웰시 울프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짧아서 느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엄청 빨랐다.
우리들은 순식간에 눈발을 가르고 거대한 분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고, 주변은 차가운 북극의 냉기로 만들어진 하얀 크리스탈들이 반짝였다.
마치 거울의 세계에 와있는 것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 멀리 새하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씩 웃었다.
"저깄군."
눈앞에 거대한 하얀 늑대가 고고히 서 있었다.
마치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모습. 다리는 짧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2등성, '백야의 나그네'가 진명(盡命)을 드러냅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차가운 눈보라의 정경속에서 고고한 늑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로메테우스 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