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74화
제74화
다행히도 내가 먹을 거미 다리는 남아있었다.
그래도 이놈들이 의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도 내 것을 남겨놨다니 기특하다.
"음, 여기다가 거미줄을 녹여서…."
나는 거미줄을 녹여 만든 걸쭉한 소스를 구이에 발랐다.
파란 빛깔의 소스가 먹음직스럽진 않았지만, 그래도 냄새는 좋았다.
"이제 먹어볼까."
와그작-!
나는 며칠을 굶은 야생 호랑이처럼 다리 구이를 뜯었다.
"괜찮네."
거미줄이 점점 충전되고 있었다.
한 번 베어 물었는데 무려 100개 이상이 채워졌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도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자식이 나 아직 한 입밖에 못 먹었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식구인데 먹여야지.
"솔…."
"주인아! 요리 내놔라!"
어째 그날 이후로 솔라가 막 나타나는 것 같은데….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물었다.
"야, 프로메테우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너 저번에 나한테 기억 전해주고 난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솔라가 나타나는데 이거 그거 때문이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확실히 그날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내가 이 게임을 바라보게 되는 시선도, 관점도, 어떤 행동을 할 때의 마음가짐도.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살아온 기억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주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녀석이 원하는 것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건데….
자신이 없다.
앞으로 내가 거쳐야 할 고난을, 미래를 알게 되었다라는 건 그리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뒤에서 고르바가 고기를 뜯으며 다가왔다.
"취익. 고맙다. 형제. 우리에게 맛있게 먹는 법을 알려주어서."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하는 고르바.
"뭘, 새삼스럽게. 그나저나 다른 오크들은?"
"곧 올 거다. 난 먼저 구워 먹고 싶어서 왔지. 크라라라!."
고르바가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형제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주고 싶은 것…?"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고르바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푸른색의 이빨이 그려진 조그만 뼈 조각이었는데,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물건처럼 보였다.
고르바가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나의 오크람이다."
"오크람…?"
[푸른 이빨 오크람을 획득하였습니다.]
"취익. 옛날부터 오크들은 힘으로 신분을 나눴다. 싸워서 이기면 상대의 오크람을 빼앗아 더 높은 신분을 가질 수 있지. 특히 부족장을 상징하는 오크람은 더욱 특별하다. 태초의 오크셨던 무두르 님의 피와 뼈로 만들었지."
오크람에 그려진 푸른 이빨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걸 왜 내게…?"
"나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이다. 그리고 우리 부족에게 요리라는 것을 알려준 그대를 위한 나의 성의다. 취익."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고르바의 의리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그가 건네준 오크람을 이리저리 만졌다.
뒤집어도 보고, 옆면을 보고, 태양에 비추기도 했다.
"너 이거 없어도 되냐? 예를 들면 족장의 지위에서 쫓겨난다거나…."
"그라라라!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사실 오크람을 걸고 싸우는 전통은 우리 부족에선 없어진지 오래다. 다른 부족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취익. 선대 족장이셨던 내 아버지, 바탈가 족장께서 오크들 간의 분란을 조장하는 악습이라며 금지시키셨다."
과연, 그 아비에 그 자식인가.
만나보진 못했지만 고르바의 아버지는 꽤나 현명한 지도자였을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로 치면 문과 무를 겸비한 훌륭한 장수이지 않았을까.
역시, 훌륭한 부모 밑에 훌륭한 자식이 나온다는 것은 헛말이 아닌 것 같았다.
새삼, 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손자들에게 좋은 부모였고, 좋은 할아버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고르바. 근데 이건 어디다 쓰는 거지?"
"크륵. 형제처럼 강한 인간은 아마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언젠가 다른 오크 부족을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취익. 오크람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 우리 부족은 오크람 제도가 없어졌지만, 아직 다른 부족은 오크람 제도가 있다. 언젠가 그들을 만나 이것을 보여준다면, 족장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넌 그들에게 족장 대접을 못 받을 텐데?"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과는 1년에 한 번씩 북쪽에서밖에 만나지 않는다. 그곳에 무두르 님의 무덤이 있는데, 그때 오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사실 오크람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그릇이 큰놈이네.
뚝심도 있고, 배포도 있다.
잠깐이지만 이 녀석이 NPC 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내가 잘 굴렸을 텐데.
끙, 아깝구만.
나는 혀를 차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때, 뒤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오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군."
그들은 빠르게 피워진 모닥불로 모였다.
그리고 내가 알려준 요리법으로 고기들을 굽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좋아하는 모습이 보이자, 나도 웃었다.
"고르바. 궁금한 것이 있다."
"크륵. 말해라. 형제."
"너희들은 거미들보다 강하지 않나? 근데 어째서 그들을 천적이라고 말하는 거지?"
고르바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것은 독 때문이다."
"독…?"
"우리들은 독에 취약하다. 500년 전 무두르 님께서도 거미들의 독에 의해 죽으셨지. 그분의 피를 타고난 우리들은 당연히 독에 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미들의 개체수가 워낙 많기도 하고. 거미줄도 굉장히 성가시다."
…하긴, 그렇긴 하겠네.
거미들의 수가 많기는 했다.
내가 본 것 만해도 오크들의 10배나 되는 숫자였으니까.
킹 스파이더의 동굴을 정리했어도, 아직 남아있는 다른 동굴들도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 퀸 스파이더의 동굴도 있겠지.
불을 응용하지 못하는 오크들에겐 거미줄도 치명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야말로 거미들은 오크들의 천적인 것이다.
그때, 갑자기 뭔가 뇌리를 스쳤다.
"잠깐만, 천적? 천적이라…."
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프로메테우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왜 부르냐고 묻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알데바란에게도 천적 있었는데. 그렇지?"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아들인 미노타에게도 천적이지 않을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아마 그럴 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만나러 가야겠군."
내 다음 여행지가 결정되었다.
* * *
다음 날.
케레노스는 홀로 수련장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갈라지는 바람을 느끼며, 그렇게 상의를 탈의한 채 온 몸으로 폭풍창의 묘리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직 세 번째 초식이 불완전해.'
폭풍창의 맥이 끊어질까 염려한 스승 뮤겐은 자신에게 세 번째 초식을 전수했었다.
하지만 스승과는 달리 케레노스는 완전한 폭풍창의 묘리를 펼치지 못했다.
자신도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스승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알쏭달쏭한 유언만을 남긴 것이다.
'바람은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스승은 이 말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케레노스는 조급했다.
'이러다 죽을 때까지 알아내지 못하면 어쩌지.'
폭풍창은 바람을 이용한 창술이었다.
하지만 바람을 만들지 말라는 스승의 말은 자신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또 한 번 창을 휘두르는데, 부관인 베커가 뛰어왔다.
"단장님!"
"…무슨 일이지?"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
"잭슨 님이요! 오크들을 몽땅 데리고 오셨습니다!"
'영감님이 왔다고?'
케레노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어제 영감님이 그들을 데리고 로크 산맥으로 돌아갔을 때, 오크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인간들을 불신하며 다시 로크 산맥에 눌러앉을 것이라,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웬걸. 보란듯이 그들을 데리고 왔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케레노스가 주섬주섬 갑옷을 입었다.
"가자, 베커."
"예, 단장님."
두 사람은 동문으로 향했다.
* * *
고르바와 나는 오크들을 데리고 윈디아의 동쪽으로 내려왔다.
올라올 땐 로크산맥을 통해 왔지만, 병사들이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정문을 통해서 내려온 것이다.
익숙한 동문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소란스러워 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아직 오크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오크들이 다시 왔어!"
"어떻게 된 거지?! 돌아간 게 아니었나?"
"단장님을 불러! 어서!"
…공사를 하고 있었네?
동쪽의 80%가 새로 복구되었지만, 아직 20%는 남아있었다.
아마 그들은 오크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사를 진행 중인 듯 했다.
"역시 1%도 못 채웠네."
하루가 지났건만 퀘스트 창을 확인해보니, 아직 80%에 머물러 있었다.
이걸 보니 오크들이 얼마나 유용한 인적 자원인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오크들이 일을 잘한단 말이야. 힘도 좋고.
어느새 동문에 완전히 이르자, 나는 고르바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도착한 케레노스가 말을 걸어왔다.
"진짜 저들을 설득해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배고픈 놈들에게 밥을 좀 해줬을 뿐이다."
"예? 고작 그거로 마음을 돌리셨단 말 입니까?"
"그래."
"…영감님이 요리사란 것을 잊고 있었군요. 싸움을 너무 잘하셔서 잊어버렸지 뭡니까."
"싱거운 놈."
나는 피식 웃으며, 고르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르바. 또 허튼 짓 하진 않겠지?"
"취익. 걱정마라. 형제! 오늘 안에 윈디아를 복구해놓겠다!"
호언장담한 고르바가 뒤를 돌며 손을 높이 들었다.
"형제를 위하여!"
"우오오!"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친 오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케레노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요리를 해주었기에 저들이 저렇게 잘 따르는 겁니까?"
"별거 아니었다. 그냥 소스 몇 개랑 오크들에게 어울리는 구이법을 가르쳤지. 근데 저들은 그 평범한 것도 못하고 살고 있더구나."
"…그렇군요."
케레노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불만 있냐?"
"아닙니다."
"쯧쯧. 따라와라."
나는 그를 지나쳐, 영주성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케레노스가 따라붙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영주를 만나러."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겁니까?"
"그래. 바람의 신전에 있는 송아지에 관한 이야기지."
"예? 그걸 어떻게…?"
"어깨너머로 들었다. 매달 처녀를 그놈에게 바친다면서?"
"…부끄럽습니다."
내게 이걸 말해준 것은 수정이였다.
그녀는 저번에 동굴에서 보았던 다니엘이라는 소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알고 보니 소년의 누나인 도로시는 미노타에게 제물로 바쳐질 예정이라고 했고,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했다.
"케레노스."
"예."
"그 송아지 놈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천적.
이 말은 사람이나 몬스터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좌들에게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 핏줄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묻는 케레노스에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늑대들이 소고기를 좋아하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