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65화
제65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손녀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가면은 벗은 상태였고, 옷도 요리사 복장을 입고 있었다.
실 하나만 잡아당기면 간편하게 변신할 수 있기에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여기예요. 여기!"
미도가 펄쩍 뛰면서 양손을 흔들었다.
…역시 핑크색 옷을 입고 있구만. 껄껄.
저러고 있으니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도는 한결같이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말이다.
"오래 기다렸니?"
"아니에요. 저도 들어온 지 얼마 안됐어요. 히히."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어딜 가려고?"
"헤헷, 절 따라오세요."
미도는 신이 나는지 디딤발을 디디며 나를 앞질러 걸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남문이 있는 곳이었다.
"지금 가는 곳은 코볼트라는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에요."
"코볼트…? 그런 몬스터는 남쪽에서 보질 못했는데?"
"풉, 정말 할아버지 진짜 많이 모르시네요."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맞다며 맞장구를 칩니다.]
이노무 시키가….
"지금 가는 곳은 던전이라는 곳이에요. 코볼트 광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죠."
"던전이 뭐냐."
"음~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하려나."
사실 던전이라는 개념은 알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나서 모든 것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지금 오르고 있는 바위산은 처음 왔지만,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생생히 그려질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쉽게 설명하면 몬스터가 있는 동굴이라고 보시면 되요."
나는 미도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우리들은 어느새 바위산 중턱의 넓은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도랑 오붓하게 있고 싶은데….
[유저 미도 님이 파티를 신청하셨습니다.]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아직 따라잡으려면 한참이나 멀었네. 151이라니.
미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41레벨! 할아버지. 요리 엄청 많이 하셨나 봐요? 생산 직업은 되게 레벨 올리기 힘든데?"
"뭐, 그렇지. 허허허."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근데 151이라니… 도대체 언제 저렇게 올린거지.
나는 새삼 궁금해졌다.
"넌 엄청 높구나. 도대체 언제 그렇게 올린 거냐. 집에는 캡슐이 없었을 텐데."
"그렇죠. 뭐. 사실 알바해서 번 돈으로 캡슐방에 갔던 거예요. 또 제가 가상현실 학과잖아요. 교수님이 아크스타를 플레이 한 수기를 작성해오라는 숙제도 내주시기도 하고 그래요. 또 선배들이 저 레벨업 시켜주겠다고 도와준 것도 있구요."
선배라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화가 울컥 치밀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 선배라는 놈들의 이름을 물었다.
"선배들 이름이 뭐냐."
"네…? 그건 왜요?"
"그냥 뭐, 궁금하기도하고 나중에 만날 수도 있지 않냐. 껄껄."
나는 태연한 척 연기를 했다.
"음, 누가 있더라. 5명이었는데…."
제기랄. 5명이나 있다니.
"한살 위의 선배는 두 명있네요. 정명수 오빠랑 박현동 오빠가 있고…."
나는 기자에게 뺏은 필기도구로 재빨리 필기를 했다.
정명수, 박현동….
"두 살 위의 선배는 세 명이네요. 아마 할아버지도 보셨을 걸요?"
"뭐? 내가 언제?"
"그때, 기억나세요? 할아버지 캡슐 집에 왔던 날 있잖아요."
"그래, 기억하다마다."
"우리 그때, 공성전을 TV로 봤었는데 거기서 봤었잖아요."
뭐지, 내 기억엔 없는데….
"아마 그때, 한명은 은색 검을 들고 있었을 걸요?"
은색 검? 설마.
"그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푸하하. 맞아요. 그 사람이 세 명 중 한명이에요."
미도가 폭소를 터트리며 배를 잡았다.
분명 김현우라는 이름이었지.
나는 재빨리 종이에 '김현우'라는 이름을 적었다.
"다른 두 명은 누구냐."
"박태준 선배랑 은정혁 선배가 있어요."
박태준, 은정혁…. 공교롭게도 그들은 내가 TV에서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녀석들이었다.
새롭게 두 명이 추가되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이름 밑에 '사형'이라는 글자를 크게 적고 밑줄을 그었다.
…호랑말코 같은 놈들. 걸리기만 해봐라. 아주 혼구녕을 그냥!
"쿡쿡, 선배들한테 요리라도 해주실려구요?"
"음?"
"아니, 되게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적고 계시길래요."
요리라… 그것도 괜찮겠군.
아마 그들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래. 나중에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내가 요리를 대접하마."
"와! 정말요? 좋아요!"
미도가 좋아하니 나도 덩달아 좋았다.
물론, 서로 좋아하는 의미가 달랐지만 말이다.
후후, 그날이 기대가 되는군.
"우리 둘이서만 사냥하는 거냐?"
"네, 저도 오랜만에 오는 곳이긴 한데 아마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일단 들어가보자."
그렇게 우리들은 광산으로 들어섰다.
[코볼트 광산 1B에 입장하셨습니다.]
들어서자마자 광산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과거 북파공작원으로 있을 때, 이런 비슷한 갱도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요즘 자꾸 그때 생각이 나는 것 같네.
누구나 하나씩 잊고 싶은 기억은 있는 법이지만, 그것을 잊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라도 잊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할아버지. 제 뒤를 잘 따라오셔야 해요."
조그만 체구를 가진 미도가 앞장서 걸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도 할애비를 지키겠다고 용쓰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그렇게 우리들은 광산을 돌아다니다가 첫 번째 몬스터를 만날 수 있었다.
[Lv.70 병든 코볼트]
코볼트는 악어를 닮아있었다.
하지만 두발로 걸었고, 꽤나 수준급의 무기를 착용하고 있는 것이 제법 강해보였다.
그때 미도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게 뭐지?
그녀는 붉은 칼 한 자루와 미술 도구들을 꺼냈다.
이게 무슨 조합인가 싶은 순간.
갑자기 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미도.
무언가를 그리는 것 같은데, 굉장히 괴기한 그림이었다.
"지금 뭘 하는 거냐."
"아, 제 직업이 화가거든요. 지금 무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림을 그려…?"
하긴 미도의 취미가 그림 그리기였던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워낙 재능이 없었던 탓에 미대를 포기해야했지만, 나는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나는 또 한 번 물었다.
"근데 뭘 그리는 거냐."
"제가 코볼트를 때려잡는 그림이요."
"아하…."
예술성이 너무 높아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 아마 그럴 거야….
차마 내가 그리면 더 잘 그릴 것 같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근데 왜 핑크색으로 그리는 거니.
"됐다!"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재빨리 미도가 들고 있는 검의 정보를 확인했다.
[피의 도살자]
등급: 영웅 내구력: 250/250
착용제한: 차가운 자비의 군주, 가련한 사랑의 군주
공격력: 580
힘+20 / 지식+20
-공격력의 5%를 생명력으로 흡수합니다.
-피를 흡수할 때마다 공격력이 5%씩 증가합니다. (최대 10중첩)
+현재 웨펀 드로잉 스킬이 적용 중입니다. (코볼트에게 공격력 30% 증가.)
흐미, 우리 손녀가 어찌 이리 흉흉한 물건을….
검에 있는 붉은 빛깔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피에 절여진 흔적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검이 좋은데…?
"그 검은 어디서 난거냐."
"아, 이거 선물 받은 거예요. 현우 오빠가 성기사거든요. 며칠 전에 우연히 하급 뱀파이어 귀족을 잡다가 나왔는데, 필요 없다고 주더라구요."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줬다 이거지…? 근데 오빠라고?
나는 속으로 질투를 했다.
…꼭 저거보다 좋은 아이템을 미도에게 선물해야지.
"이제 바디 페인팅을 해볼까나."
어느새 그녀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날개 달린 신발 하나와 방패가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역시나 예술성(?)이 넘치는 핑크색이었다.
"바디 페인팅!"
촤촤촤촥!
[30분간 이동속도가 1.5배 증가합니다.]
[30분간 방어력이 1.5배 증가합니다.]
"오?"
생각보다 멋진 장면에 감탄이 터졌다.
공중에 뜬 그림들이 흩어지며 나와 미도에게 문신처럼 들러붙더니 버프가 된 것이다.
"헤헷, 아직 놀라긴 이르다구요. 잘 따라와요. 할아버지!"
그와 동시에 미도가 코볼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캬악-!"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코볼트.
낡은 단도 두 자루를 들고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미도가 고전을 좀 하겠는 걸….
아마 금방 비명을 지르고 말리라.
그런데, 반전이었다.
챙! 서걱-!
"캬악-!"
순식간에 한쪽 팔이 잘려나간 코볼트가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눈을 비볐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뭐야. 방금 내가 뭘 본거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칼을 찌르던 코볼트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미도가 그것을 쳐내자마자 더욱 빠르게 휘둘러 녀석의 팔을 잘라내버렸다는 것이었다.
우리 미도가 이렇게 검을 잘 썼나…?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템을 줍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미도야."
"헤헷. 할아버지, 저 봤어요? 완전 멋있죠?!"
그녀는 칭찬받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 마냥 해맑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물었다.
"혹시 어렸을 때 검도 배웠니?"
"검도요? 아뇨. 저 배운 적 없는데요. 아크스타 처음 할 때 말고는 정말 오랜만에 검을 휘두르는 거예요."
"뭐…?"
…세상에. 그게 검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의 검이라고?
"근데 칼 휘두르는 거 생각보다 재밌어요. 어렸을 때 막대기 들고 남자 애들이랑 칼싸움 자주 하곤 했는데. 히히."
미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더 어이가 없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녀의 검술에 감탄합니다.]
…검술이라.
맞다. 명백한 검술이었다.
설마 우리 미도가 검술에 재능이 있었던 건가?
하긴, 어렸을 때부터 조금 드세게 자라 남자 아이들이랑 종종 칼싸움을 하곤 했었는데….
"오늘 할아버지 50레벨 만들어 드릴게요!"
미도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코볼트들은 나타날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서걱-! 서걱-!
"캬아아악-!"
"캬오오-!"
"크아아악-!"
무자비하게 당하는 코볼트들을 보며, 나는 뒤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미도가 확실히 내 손녀 맞네."
새삼 유전자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