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63화
제63화
"…여긴 어제 그 동굴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이 맞았다.
나는 푹신한 지푸라기 위에 있었고, 몸을 더듬으며 아까 그 생생함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차라리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내 어깨에 올려진 이 무거운 짐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내 정신은 너무나 또렷했고, 기억 또한 선명했다.
마침 눈앞에 메시지가 뜨고 있었다.
[별 다방(多房)이 없어졌습니다.]
…제길. 역시 꿈이 아니었나.
다방(茶房)같던 다방(多房)이 없어지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또 다른 메시지가 떴다.
[프로메테우스 님에게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선물…? 뭐야 이거.
나는 곧장 선물함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츠츠츠츳-!
"끄아아아악!"
엄청난 스파크가 머리 위에서 튀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은 뒤집혔고, 머릿속으로 엄청난 기억들이 스쳤다.
이, 이게 뭐야…!
뇌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엄청난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 자리에 무릎 꿇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온몸엔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프로메테우스의 기억 업로드 완료.]
"헉, 허억…."
[사도 스킬: 혜안의 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사도 스킬: 통찰의 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능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대체…?"
알 수 없는 지식과 문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선명했다.
분명한 것은 내 기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이었다.
녀석이 살아온 세월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때, 불꽃이 휘몰아치며 솔라가 나타났다.
푸른 눈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프로메테우스인 듯했다.
근데 어떻게 나타난 거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영감. 고생했어."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그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진정해. 선물이니까."
"이런 엿 같은 선물도 있냐?"
"하하.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
"이 개잡놈 같으니라고."
솔라의 얼굴을 한 프로메테우스는 히죽히죽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이것도 가이아 님이 부탁하신 일 중 하나였어."
나는 그를 노려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후우, 혹시 선물 더 있냐?"
"아니. 이제 없어."
스킬 창을 확인해보니, 혜안은 사용시간이 10분으로 늘어나 있었다.
나는 곧바로 통찰에 관한 정보창을 열었다.
[통찰][액티브]
등급: 전설
마력소모: 10 / 쿨타임: 없음.
상대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어째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설명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애매모호했다.
뭐, 차차 알게 되겠지.
어느새 솔라는 사라져 있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 자식이….
실실 웃고 있을 놈을 떠올리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털며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고르바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취익, 잘 잤나. 형제."
"그래. 네 덕분이다."
…사실 잘 자지는 못했지.
"그라라라! 아니다. 근데 윈디아로는 언제 내려갈 건가. 이미 오크 동지들을 모아두었다. 취익."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날 윈디아로 내려가기로 했었지….
기왕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나는 고르바에게 말했다.
"지금 가자."
"알았다. 오크들을 데려오겠다."
거구의 고르바가 오크 장정들을 끌어 모았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오크들을 보니, 충성심이 대단한 듯 보였다.
나는 고르바의 어깨에 올라탔다.
…족장은 족장이네. 키 하나는 무지하게 크구만.
지금 보니 오크 전사들의 두 배 정도 되었다.
하긴, 이 정도는 돼야 여기서 대장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새삼 이 녀석의 능력치가 궁금해졌다.
"통찰."
[통찰 정보]
이름: 고르바 / 레벨: 200
출신: 푸른 이빨 오크 부족장
힘: 170(+0) 민첩: 230(+0)
건강: 320(+0) 지식: 80(+0)
스킬
-강철피부(영웅)
-생존본능(영웅)
약점: 마법 공격에 취약합니다.
-당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호감도: 50% (100% 달성시 동료 영입 가능)
음? 물음표가 없잖아?
전에 있었던 물음표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스킬이 강화되었다는 메시지 때문인 것 같았다.
고르바의 능력치를 보며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왔다.
…내가 이런 놈이랑 붙었다니.
강철피부와 생존본능이라는 스킬을 살펴보니, 더 혀가 내둘러졌다.
이러니 죽어라 때려도 안 죽을 수밖에.
강철 피부는 80%의 물리 데미지를 경감시키는 패시브 스킬이었고, 생존본능은 50% 이상의 생명력이 닳으면 10%를 회복하고 더욱 생존력을 높이는 스킬이었다.
고르바가 외친 건 그때였다.
"출발한다!"
"워우! 워우!"
오크들은 마치 원시인처럼 무기를 들고 가슴을 두드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이게 다 프로메테우스의 기억 때문이었다.
또 한 번 머리가 욱신거렸다.
"큭…."
머릿속으로 오크에 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들의 습성, 과거에 있었던 일.
심지어 500년 전 라그나로크 전쟁에 참여했었던 것까지.
아려오는 두통 속에서도 앞을 봤다.
발걸음을 옮기는 오크들의 뒷모습이 제법 사내다웠다.
잠깐, 근데 여기는 윈디아로 가는 길이 아닌데…?
"원래 저기로 나가야하는 것 아니냐?"
나는 처음 들어왔던 문을 가리켰다.
고르바가 그곳을 보며, 피식 웃었다.
"취익, 저긴 후문이다. 우리와 천적인 거미들 때문에 잘 나가지 않는 곳이지. 우리는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갈 거다."
…얼핏 기억이 나는군.
커다란 나무와 해골 장식을 엮어 만든 문이 하나 있긴 했다.
그땐 빨리 지도를 완성해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차마 문이라고 떠올리진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들은 어느새 산을 내려왔다.
"동문이 있는 곳이네."
저 멀리 부서진 성벽이 보였다.
무너진 동문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 저긴 시장이 있었던 곳 같은데… 저런 모습이 되어있으니, 약간의 비감이 들었다.
"우리가 저렇게 만든 것인가…."
"너의 잘못이 아니다. 고르바."
"그건 알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나도 저곳이 원래는 어땠는지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괴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성을 잃었어도 그가 저곳을 파괴한 장본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아마 고르바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에게 어떤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일단 가자."
고르바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뗐다.
다른 오크들도 마찬가지.
그렇게 천천히 폐허가 된 동문으로 다가가는데, 초감각이 발동했다.
"저건…?"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유저들.
근데 왜 저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거지?
나는 발달된 시력으로 그들을 훑었다.
정황상 저들은 윈디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유저들 같았다.
왜 저들이 아직 있는 건가 싶었는데, 순간 어떤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아크스타에서 하루는 현실에서 6시간이에요.'
정도 녀석이 내게 해준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가 이곳에 온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좀 귀찮아지겠는데.
유저들도 어느새 나와 오크들이 다가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고함을 치는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이다! 정말 오크들이 왔어!"
"카메라 팀 뭐해! 어서 찍어!"
"근데 저 사람은 누구지?"
"오크 위에 사람이 타고 있어!"
"정말? 어디어디!"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재빨리 가면을 썼다.
누군가 달려오며 자신을 찍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정 구슬 같은 것이 공중에 맴돌았는데, 누가 봐도 정황상 카메라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귀환석으로 영주를 먼저 만나는 거였는데."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든 유저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저 멀리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선두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예! 단장님!"
다행히 케레노스의 발 빠른 대처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어느새 나는 동문에 이르러 고르바의 어깨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케레노스가 다가왔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노고는 무슨, 내 이야기가 새어 나가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내 이름과 정체가 알려져선 안 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귀찮은 일은 사절이야. 두 번 말 안 해도 되겠지?"
케레노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경계를 철통같이 서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넌 왜 아까부터 존댓말이냐?"
"영주님의 지시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쯧쯧."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고르바가 말을 걸어왔다.
"우린 무엇을 하면 되겠나. 형제!"
순간,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깜짝 놀랐다.
"뭐? 형제라고?"
"지금 저 오크가 같이 온 사람을 형제라고 부른 거야?"
"어떻게 유저가 오크 족장과 형제를??"
"야! 카메라 찍고 있지?!"
"예! 찍고 있습니다! 생방입니다!"
…젠장. 생방송이었나.
수많은 의문들이 주변에서 메아리쳤다.
그들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라."
"알겠다. 취이익-"
나는 곧장 귀환석을 사용해 포탈을 열었다.
주변은 또 한 번 탄성이 터졌다.
"귀환석?!"
"어떻게 저리 비싼 것을!"
"저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쯧쯧. 한심한 놈들.
고개를 저으며 포탈을 향해 몸을 던지니,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어느새 나는 영주성 근처에 와있었다.
"잘 있었나. 랄프."
"헛! 영주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그가 갑자기 거수경례를 했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인사를 받았는데,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어색함이 들었다.
"윈디아를 구해주신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랄프도 알고 있었나보군.
하긴, 그 난리가 일어났는데, 병사인 그가 모르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아마 병사들 사이에선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져 있을게 뻔했다.
나는 그에게 출입패를 내밀었다.
"윈디아의 영웅이신데 출입패는 당치도 않습니다. 영주님은 안에 계시니 바로 들어가 보시지요."
이러면 출입패를 받은 의미가 없는데….
"큼. 고맙네."
그렇게 잠시 뒤, 영주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잭슨."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근데 정말 내 기사가 될 생각이 없어?"
"예, 없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내 말에 살짝 삐진 표정을 짓는 에드워드.
그가 토라진 표정을 짓자, 나는 펜던트를 돌려주었다.
에드워드는 펜던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건 잭슨이 가지고 있어줘."
"예? 하지만 이건 아버님의 유품이라고…."
"그래서 더욱 잭슨이 가지고 있어야해. 그건 윈디아를 위한 물건이니까 말이야.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아마 그렇게 하셨을 거야."
내가 너무 어리게 봤나….
생각보다 깊은 속내를 가진 에드워드를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와 5분 정도 대화를 더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건축가를 동문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에드워드는 선선히 승낙했다.
동쪽을 복구하라는 퀘스트도 받았는데 난이도가 제법 높은 퀘스트였다.
어느새 나는 다시 동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다!"
"…진짜 끈질긴 놈들이네."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국 관계자로 보이는 놈들이 카메라 같은 수정 구슬을 공중에 띄우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마이크처럼 생긴 아이템을 내밀며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팡! 팡!
"유저가 맞으시죠?!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오크 족장을 타고 오시던데 무슨 관계이신가요!"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가면 좀 벗어주세요!"
눈치 빠른 기사들이 달려와 그들을 제지했지만, 플래시는 계속해서 터졌다.
끝없는 질문 공세에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더럽게 눈부시네. 망할 놈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내 첫 방송 데뷔는 화끈한 중지 올리기로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