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62화
제62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머리 길이는 조금 더 길었지만, 그것은 분명 젊은 시절의 내가 맞았다.
너무 놀라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프로메테우스가 입을 열었다.
[다시 봐도 정말 닮았군.]
…닮았다고?
이건 그냥 닮았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저것은 그냥 나라고 해야 옳았다.
"닮은 정도가 아니야. 저건 분명 젊은 시절의 나다."
[뭐…?]
눈이 커지는 프로메테우스.
그도 이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20대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려 50년의 세월이 끼어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알렉서스의 모습이 영감의 젊은 시절이라고? 확실해?]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보기엔 그래."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째서 알렉서스가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중요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아. 알렉서스는 500년 전의 사람이라고. 가이아 님이 관심 있게 보시던 인간이긴 했지만, 그는 평범한 요리사일 뿐이었어. 영감은 다른 차원의 사람이잖아. 불사의 저주를 가진 자들이 나타난 건 최근이라고.]
"그건 나도 아는데…."
어째서일까. 나는 알렉서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일단 더 지켜보자고.]
"그래."
알렉서스는 가이아에게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는 세상을 주유하다 우연히 굶어죽은 모녀를 발견했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어려운 길이기도 했다.
[그는 저때부터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요리를 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사람은 몰리는데 식재료는 떨어져갔지. 그래서 그는 직접 사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 그래서 탄생한 것이 최초의 태양의 비각술이었지.]
…일기장에 있던 내용이로군.
순간, 일기장에 있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
주변의 정경이 무너지며 또 다른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프로메테우스가 말했다.
[태초의 불을 훔친 것을 들킨 나는 유피테르에 의해 바위산에 묶여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되었어. 그 과정에서 동생도 형벌을 받게 되었지.]
"가이아는 뭐하고 있었던 거지? 그녀라면 너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가이아 님은 또 한 번 수면기에 접어드셨어. 어쩔 수 없이 나는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으며 알렉서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사실 통증 때문에 자주 보진 못했지만 말이야.]
"그럼 알렉서스는 어떻게 되었지?"
[영감도 알다시피 알렉서스는 벌을 받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유피테르의 흥미를 돋구었지.]
"흥미를 돋구었다고?"
[유피테르가 우려했던 건 신들이 사용하는 강대한 불을 인간이 사용했을 때 찾아올 재앙이었어. 하지만 알렉서스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데 사용하지 않고 요리에 사용했었지.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놀란 유피테르는 알렉서스에게 자신을 위한 요리를 만들 것을 명했어.]
그렇게 이어지는 화면은 요리를 만드는 알렉서스의 모습이었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물었다.
"그는 무슨 요리를 만들었지?"
[천민들이 먹는 풀죽.]
"뭐…?"
[그가 만든 것은 천민들이 먹는 풀죽이었어. 유피테르는 노발대발하며 천벌을 내리려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유피테르는 빙긋 웃음을 지었지.]
-전지전능하신 유피테르시여. 지금 인간들은 이 풀죽도 먹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부디 저에게는 천벌을 내리시고, 인간들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놀랍군.
감히 신에게 풀죽을 먹이며 저런 말을 할 생각을 했다니.
그는 진정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다.
가이아의 계시처럼 말이다.
[유피테르는 알렉서스를 용서해주었어. 태초의 불과 자신의 구름을 이용해 요리하는 것을 허락해주었지. 알렉서스는 그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유피테르의 힘을 모았고, 진정한 날씨 요리사로 성장을 했어. 영감도 알다시피 나중엔 왕이 되었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잘 모를 거야. 중요한 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니까 잘 들어.]
미간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긴장을 했다.
어느새 발밑은 왕국이 세워진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날 유피테르가 찾아왔어. 자신을 호위하는 황도 12궁들도 함께였지. 그는 12궁좌들이 보는 앞에서 알렉서스를 새로운 별자리로 만들어 궁좌에 올리겠다고 말했어.]
이것도 일기장에서 봤던 것 같은데.
"혹시 국자 자리를 말하는 거냐?"
[맞아. 당연하게도 12궁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어. 하찮은 요리사가 성좌보다 높은 궁좌의 지위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았지. 그들은 유피테르에게 알렉서스를 시험해보라고 말했어. 고심 끝에 유피테르는 한 가지 제안을 했지.]
"그게 뭐지…?"
[선악과 나무.]
"……?"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프로메테우스가 설명해주었다.
[유피테르는 선악과나무를 내리며 '악과' 는 따지 말고 오직 '선과' 만을 딸 것을 명했어. 12궁좌의 감시하에 하루에 하나씩만 딸 수 있었지.]
이어지는 화면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었다.
나무에는 무수히 많은 새하얀 빛과 단 하나의 커다란 어둠이 함께 있었고, 알렉서스는 하루에 한 번씩 나무에 방문해 선과를 따는 모습이 보였다.
[일부 궁좌들은 알렉서스에게 악과를 딸 것을 유혹했지만, 그는 이겨냈어. 그렇게 88개의 선과를 모두 딸 수 있었지. 그렇게 13궁의 지위에 오를 자격을 갖춘 알렉서스는 푹 쉬고 있었어. 다음 날 궁좌가 될 수 있단 기대감을 안고 말이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젠장. 이번엔 또 뭐냐."
[플루토의 반란.]
"뭐? 플루토라면…?"
[그래. 사후세계를 맡게 된 3신 중 한 명이지. 플루토는 12궁좌 중 7명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어. 그렇게 선악과나무에 접근했고, 악과를 훔쳐 알렉서스에게 죄를 덮어 씌웠어. 오해를 한 유피테르는 알렉서스에게 벼락을 내렸어. 하지만 그때 아이올로스가 대신 맞고 말았던 거야.]
"…그랬군. 그래서 아이올로스가 그렇게 되었던 건가."
[맞아. 아이올로스는 그렇게 죽은 거야.]
잠깐이지만 아이올로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억을 털어낸 나는 발밑에 벌어진 상황에 집중했다.
어느새 세상은 죽음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플루토가 훔친 악과는 세상을 각종 죽음과 질병, 해악, 질투, 증오를 퍼트렸어. 이 사실을 알게 된 유피테르는 반역을 한 7궁좌와 플루토를 잡기 위해 신들을 소집했지. 알렉서스도 인간들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어. 그렇게 또 한 번의 대전쟁이 벌어진거야. 난 그걸 '라그나로크'라고 부르지.]
발밑에서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신들과 인간, 그리고 드래곤, 오크, 드워프, 엘프가 연합해 플루토가 이끄는 죽음의 군단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밀리는 것 같았다.
어째서…?
[악과는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였어.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플루토는 무한한 힘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아무리 유피테르라도 끝없는 힘을 가진 플루토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어. 하지만 그때 기적처럼 가이아 님께서 나타나셨지.]
어느새 나타난 가이아가 플루토를 제압하는 것이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당황한 플루토의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알렉서스는 가까스로 플루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어. 그가 가진 힘이 신의 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죽일 수는 없었어. 결국 플루토는 자신이 있던 명계로 도망을 쳤지. 도망을 치며 악과를 조각 내 세상 곳곳에 흩어버렸어. 동시에 알렉서스에게는 죽음의 저주를 내렸지.]
저주에 고통스러워하는 알렉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결국 숨을 거두었고, 젊은 시절의 내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제법 착잡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기분이 영 안 좋은데."
[…그건 가이아 님도 그랬어. 알렉서스의 죽음에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셨지. 그분께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들에게 금제(禁制)를 걸었어. 인간들을 위한 안배였지. 하지만 가이아 님에겐 시간이 없었어. 자신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이곳에 오실 수 있었다고 하셨거든.]
"그 뒤로 그녀는 어떻게 되었지?"
[예언을 남기셨어.]
"예언…?"
[언젠가 일곱 별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를 도우라는 찬란한 약속을 남기셨어. 가이아 님은 88개의 선과를 '스타 프루츠'로 만드셨고, 흩어진 악과의 조각들을 '판도라'라고 부르셨지.]
"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스타 프루츠의 정체가 88개의 선과였다니.
잠깐, 그럼 악과는 혹시…?
"설마, 그 어둠에 물든 구슬 조각이?"
[맞아. 그건 악과의 조각이야. 판도라의 조각이라 부르지.]
…이럴 수가.
엄청난 반전이었다.
설마하니 그 조각이 그토록 엄청난 물건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이아 님은 스타 프루츠를 세상에 흩어 악과를 중화시키셨어. 그리고 성좌들에게 말했지. 언젠가 나타날 불사의 인간들과 함께 '판도라의 조각'을 모아야 한다고 말이야.]
"그 선택을 받은 게 나고…?"
[그래.]
…환장하겠네.
갑자기 어깨에 엄청난 짐이 지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왜 하필 나지?"
[그건 나도 몰라. 모든 것은 가이아 님의 의지. 우리들은 그저 그때의 찬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어. 무려 500년 동안 말이야.]
젠장.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린 거 같은데.
"만약 내가 싫다면?"
[그럼 영감이 살던 세상도 위험해질 거라 하셨어.]
"뭐…?"
이건 뭐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제기랄….
"네놈은 그럼 뭐냐? 성좌가 아니라, 신이라며. 어떻게 스타 프루츠 안에 들어가 있고, 나를 만나게 된 거지?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냐."
[가이아 님은 마지막 힘을 짜네. 최후의 스타 프루츠를 만드셨어. 원래는 나와 동생을 포함한 다른 사도들도 함께 봉인하려 하셨지만, 시간이 없었지. 결국, 나만 봉인하실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지.]
"뭐라고 했는데."
[그를 지켜보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면 얘기하라고 말이야.]
"만약 자격이 없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라고 하셨어.]
주변의 정경은 어느새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에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나?]
"그걸 말이라고…."
[어쩔 수 없어. 이게 나의 사명이고. 영감의 운명이야.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으면 정신이 붕괴될 거야. 어쨌든 나는 영감을 인정하기로 했어.]
녀석이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세상이 뱅뱅 돌았다.
[영감은 더 이상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야. 이젠 선택할 수밖에 없어. 이왕이면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랄게. 그리고 일어났을 때 영감의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될 거야. 놀라지 말라고.]
정경이 무너지며, 프로메테우스의 말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몽롱한 기분과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