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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54화 (53/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54화

제54화

오늘은 오랜만에 맞이하는 주말이었다.

이제 겨울에 들어선 날씨는 제법 쌀쌀해졌고, 떨어진 낙엽이 굴러다녔다.

강현이와 며느리는 어제 부부동반 여행으로 제주도로 떠났는데, 내일 온다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등산을 가기로 했다.

물론, 손주들이랑 함께.

땅땅땅!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도의 방을 울렸다.

"으음, 시끄러…."

땅땅땅땅!

"으, 할아버지 시끄러워요!"

정도가 누운 채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나는 괘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걷어버렸다.

정도는 여전히 새우 자세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일어나라. 손자 놈아! 산책 갈 시간이다!"

"아니, 산책이라뇨. 무슨 동네 마실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입을 쭉 내민 정도가 불평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손자에게 냉정한 편이었다.

"시끄럽다. 이놈아! 빨리 나와서 밥이나 먹어!"

"제길. 내가 어제 왜 간다고 그래 가지고…."

나는 투덜거리는 정도를 뒤로하며, 미도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자나?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조용한 걸 보니 아직 자는 모양이다.

미도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가니, 자고 있는 미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핑크색 고양이 잠옷을 입고 있군.

이름이… 귀티였던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무튼 귀티 나는 이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미도의 어깨를 건드렸다.

콕.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네.

콕콕.

네 번쯤 찌르자 미도가 반응을 보였다.

몇 번 뒤척이더니 미도는 내 얼굴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할아버지…? 헤헷.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 말과 동시에 미도가 내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햇살 같은 손녀의 뽀뽀에 그만 스르륵, 녹아버릴 것 같았다.

크으, 이 맛에 사는 거지.

미도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아야하나 싶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김치찌개 해놨는데, 어서 먹자. 껄껄껄껄."

잠시 뒤, 우리들은 식탁에 모여 앉았다.

"와, 이거 멸치 볶음 할아버지가 만든 거예요? 진짜 맛있다."

"아직 더 있으니 많이 먹어라."

"역시 할아버지 요리 솜씨는 최고에요!"

엄지를 세우는 미도를 보고 있자니, 미소가 만개한다.

냉장고에 재료가 많이 없어서 급하게 만든 거였는데… 요리한 보람이 있다.

그에 비하면 정도 놈은….

"고기반찬…."

썩을 놈. 지가 만들던가.

나는 숟가락으로 정도의 이마를 때렸다.

"악! 왜 때려요!"

"못생겨서."

* * *

점심을 먹은 우리들은 집 근처에 있는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라서 등산복은 따뜻하게 입었다.

몇 달 전 며느리가 사준 거였는데,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도가 골랐다고 한다.

어쩐지 핑크색이라 했더니….

"누나, 아무리 등산복이라도 남자 건데 핑크색은 너무하지 않아?"

"왜? 난 이쁘기만 한데. 좋잖아? 커플룩으로 많이 입기도 하고."

"아니, 하아…."

정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긴, 미도의 핑크색 사랑은 집착 수준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화살은 내게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도 별로예요?"

울상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미도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내려앉는다.

제기랄. 사실 난 검은색을 좋아하는데….

"난 좋다! 껄껄."

가증스런 너털웃음에, 옆에 있던 정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나보고 어쩌라고.

확실하냐고 묻는 손자 놈의 표정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도가 토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쳇, 할아버지는 맨날 누나편이라니깐."

어느새 나는 정상에 다다랐다.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음료수를 사기로 했는데,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다.

나는 바위에 앉아 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직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허억, 제길, 내가 2등이라니."

뒤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 2등은 아무래도 손자 녀석인 모양이다.

그래도 10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다니 제법이다.

…저번엔 30분 이상 차이나더니, 체력이 많이 좋아졌군.

정도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니, 할아버지. 평소에 대체 무슨 운동을 하시는 거예요?"

"뭐, 그냥 산책 좀 다니고 등산 좀 다니지."

"그게 다예요? 진짜로?"

"그래."

차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취미로 특공무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것만이 아니라, 각종 생존을 위한 단검술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 내가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다고 말하면 기절하겠군.

사실 5살 때부터 나는 북파공작원으로 길러졌었다.

고아인 탓에 어렸을 때부터 그곳의 간부에게 길러졌고, 지독한 훈련을 받았다.

사실 운동을 하는 것도 그때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움직이지 않으면 채찍질을 당했던 시절이었으니까.

"후우, 저도 학교에서 오래달리기로 1등을 놓친 적이 없는데 할아버지한테는 안 되는 게 신기하네요."

오래달리기라….

젊은 시절 매일 밤 모래주머니와 모래 조끼를 입고 60km를 달렸다고 하면 정도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마 믿지 못하겠지.

나는 옆에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이리와 앉아라."

정도는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힘드냐?"

"네, 엄청요."

딱콩-!

정도가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흘렸다.

"끄윽…."

나는 산을 내려 보며 말을 이었다.

"이 할애비는 말이다. 너희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이런 건강해지는 방법 밖에 없구나."

정도가 어느새 진지해진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이 한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요리 잘하시잖아요. 요리 알려주시면 되죠."

"너 요리 잘하냐?"

"…아뇨. 쥐뿔도 못하죠."

자기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정도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네가 그쪽으로 재능이 있었다면, 난 내 모든 걸 알려줬을 거다. 근데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능이 다른 법이거든."

"그럼 저의 재능은 뭘까요…?"

"그건 네가 스스로 알아가야 할 숙제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너에게 어떤 재능이 찾아오더라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어떤 재능이 찾아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함…."

내 말이 제법 감명 깊었는지 정도는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다시 정도에게 말했다.

"언젠가는 네가 나 대신 가족들을 지켜주어야 할 거다."

"…알아요. 그게 할머니와의 약속이니까."

눈웃음을 지으며 정도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다 올라왔다!"

어느새 미도가 기지개를 켜며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오니? 힘들지는 않았고?"

"네, 괜찮아요! 아주 상쾌해요! 보실래요? 야호~~!"

속이 뻥 뚫리는 맑은 소리가 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메아리는 부메랑처럼 귓가에 돌아왔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도 함께 외쳤다.

"야호~!"

* * *

그 무렵, 김수정은 아크스타에 접속해 있었다.

그녀는 윈디아의 중앙 분수대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아버님한테 사실대로 얘기해야 할까…."

사실 그녀는 지금 의사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실은 1년 전 그날.

자신을 친딸처럼 여겨주시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자신은 '혈액 공포증'이라는 병을 얻었다.

1년 전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것도 치료를 위해 무료 봉사단을 따라간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아크스타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 치료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그냥."

왠지 아버님도 없고, 케르도 없으니 심심했다.

케레노스도 높은 사람이니 바쁠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갈 수는 없었다.

물장구를 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누나 여기서 뭐해."

'어? 이 아이는….'

아는 사람이었다.

눈앞에 있는 꼬마는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윈디아에 왔을 때, 몰래 숨어서 보았던 당나귀 소년.

구면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소년을 보자마자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안녕, 꼬마야. 누난 여기서 물장구치고 있었어."

"흥! 난 꼬마가 아니야! 내 이름은 다니엘이라구!"

'이름이 다니엘이었구나.'

생각보다 멋진 이름에 웃음이 났다. 다니엘이 말했다.

"누나도 혹시 괴물 녀석에게 끌려가는 걸로 선택이 된 거야?"

'괴물…?'

"아니, 난 그런 선택 받은 적 없는데?"

"그랬구나. 누난 좋겠다. 선택을 안 받아서."

순간, 어리둥절했다.

괴물이라니, 도대체 이 아이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아이답지 않게 그늘져 있는 표정을 보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저번에 누나가 괴물에게 희생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혹시 도로시가 잡혀가는 것 때문에 그래?"

"우리 누나를 알아?"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다.

다니엘은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남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동정심이 들었다.

김수정은 잠시지만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나랑 친해.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누나가 사줄게."

"정말?! 좋아!"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먹거리 시장을 활보했다.

그곳엔 많은 간식들이 있었는데, 제일 맛있었던 건 윈디아의 특산품인 슬라임 통밀과자였다.

통밀과자 위에 슬라임의 점액을 잼으로 만들어 발라 먹는 것이었는데, 중독성 있는 메론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진짜 맛있다. 누나!"

"많이 먹어.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저거! 저거 먹을래!"

그렇게, 윈디아의 간식이 귀여운 동생의 입에 들어갈 때마다 머릿속을 헤집던 고민은 희미해졌다.

잠시 후. 부푼 배를 잡은 다니엘이 투정을 부렸다.

"배불러! 이제 집에 갈래!"

"혼자 갈 수 있겠어?"

"누나가 데려다 줘!"

'…이제 보니 착한 아이였네.'

새끼손가락을 잡고 있는 다니엘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려왔다.

이 아이와 도로시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니엘이 다시 그늘진 표정을 지을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렇게, 북쪽으로 향하며 김수정이 물었다.

"누나랑 둘이서 사는 거야?"

"응. 엄마랑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어."

왠지 자신과 비슷한 가정환경에 코가 시큰해졌다.

어렸을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고사리 같은 손을 따라가니 마침, 문이 열리며 도로시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빨래를 널려고 했는지, 그녀의 손엔 빨래바구니가 들려있다.

뛰기 시작하는 다니엘.

"누나~!"

바구니를 내려놓은 도로시가 다니엘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끌어안았다.

사이좋은 오누이의 모습에 김수정은 눈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니엘. 오늘은 뭐하고 놀았어?"

"누나 친구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놀았어!"

"내 친구…? 누구?"

"크리스탈 누나! 저어~기 있어!"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다니엘을 보고 있자니 멋쩍은 미소가 지어졌다.

김수정이 손을 흔들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 * *

달그락.

"죄송해요. 드릴 수 있는 게 아이올리아 차밖에 없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이거 처음 마셔보는걸요. 잘 마실게요."

김수정은 도로시가 건네주는 차 맛을 음미했다.

맑은 강물처럼 청아한 향이 아주 흥미로웠다. 마치 플로라와 아이올로스의 사랑처럼.

"맛있어요. 감사해요."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저, 그런데…."

막상 도로시의 얼굴을 마주하니 입이 안 떨어졌다.

순간 물었다가 쫓겨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괜히 왔나 싶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도로시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그래. 눈 딱 감고 물어보는 거야.'

"실은 우연히 윈디아 바깥에 있는 동굴에서 두 사람을 보았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때 듣기론 괴물에게 끌려 가신다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예민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미 다니엘에게 남동생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김수정은 도로시의 사연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도로시가 입을 열었다.

"…실은."

땅땅땅땅땅땅-!

갑자기 들려오는 타종 소리.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 당나귀랑 놀던 다니엘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누나!"

서로를 꼭 부둥켜안는 두 사람을 보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전쟁 발발! 퀘스트 <오크의 습격을 막아라!>   가 시작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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