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46화
제46화
처음 이걸 얻었던 게 언제였더라.
고블린에게 사로잡혔던 수정이를 구하기 위해 부락으로 쳐들어갔던 그날.
그곳에서 마주친 오만한 족장 놈을 때려잡아서 얻었던 첫 번째 전리품.
[지그마의 그림자 단검]
등급: 영웅
내구력: 150/150
레벨 제한: 30
착용 제한: 유저 잭슨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단, 1회에 한해 양도가 가능합니다.
공격력: 105~130
치명타 확률 +10%
*스킬: 그림자놀이[쿨타임:20분]
-1분간 자신의 몸을 그림자로 숨겼다가 다른 대상의 그림자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는 그림자 분신을 세웁니다.
큰 어금니 부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키르쿠가 우연히 발견한 도깨비를 잡아, 그 뿔을 어둠 속에서 24시간 동안 갈아 만든 단검이다.
이것에 귀속된 <그림자놀이> 라는 스킬을 처음 마주하였을 때 사실 나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태양의 비각술을 쓰는 자신에게 무기는 크게 중요치 않았고, 단검을 몇 번 휘두르는 것보다 해 오름을 쓰고 때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레벨 제한 때문에 당장 착용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30레벨이 되어서야 이 단검이 생각나서 처음 착용할 수 있었고, 그 동안 무기를 제대로 사용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공격들에 둘러싸인 이 절체절명의 순간.
[지그마의 그림자 단검을 착용하셨습니다.]
"그림자놀이."
그림자 단검에 있는 고유 스킬이 처음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순식간에 스며들어온 어둠의 세계, 이곳은 그림자의 땅.
온통 어둠이 가득한 암흑의 공간에 도착한 나는 자신을 대신해 공격을 맞고 있는 그림자 분신을 쳐다볼 시간마저도 없었다.
[고블린 제사장 라그너스의 악마화까지 5초 남았습니다.]
이곳은 철저하게 어둠이었고, 라그너스의 얼굴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는 둥근 형체가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슈우우욱-!
[고블린 제사장 라그너스의 악마화까지 1초 남았습니다.]
어느새 라그너스의 뒤에 나타난 나는 빠르고, 강렬하게, 그리고 뜨거운 분노를 담아.
단 1초의 시간을 남기고 녀석의 뒤통수에 단검을 꽂아버렸다.
푸욱!!
"크아아악!!!!"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공격에 커다란 고통을 호소하는 라그너스.
점멸하는 스파크와 함께 바깥에 있던 어둠의 화살들은 모조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십년감수했다. 이 개 같은 고블린 놈아."
[고블린 제사장 라그너스의 악마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어둠의 서약을 중단하는 바람에 라그너스의 마력이 역류합니다.]
[3분간 라그너스의 모든 능력치가 50% 하락하고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쿨럭! 네놈이 어떻게 어둠의 장막을 뚫지도 않은 채 안으로…!"
라그너스가 피를 토하며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알 거 없잖아?"
콰아아아앙!!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대상이 상태이상 화상에 걸렸습니다.]
[라그너스의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합니다.]
해 오름 효과에 고블린 학살자 칭호가 겹쳐지며 치명타까지 터지니 데미지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걸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난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니까.
"오늘 네 녀석은 날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쾅! 쾅! 쾅!
콰앙! 쾅! 콰앙!!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이프리트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생명력 10,368이 감소합니다.]
…
[라그너스의 엉덩이뼈가 부러졌습니다.]
…
퀸 스파이더를 상대할 때는 한 번밖에 뜨지 않았던 이프리트의 저주가 2연속으로 터졌다.
이어지는 공격은 계속 치명타로 터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자비한 공격의 피날레!
라그너스의 엉덩이는 그야말로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녀석의 생명력이 1%가 채 남지 않았을 때.
촤악.
나는 녀석의 머리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후우…."
하늘을 보며 잠깐 숨을 고른 뒤.
"이 ㄴ…."
"유언 같은 거 하지마라 짜증나니까."
그대로 놈의 목덜미에 있는 동맥에 온몸을 실었다.
푸슛! 푸슈슛!
"아아ㄴ 되에… ㅋ…ㄱ…."
라그너스의 눈동자가 탁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자라다 만 놈의 뿔은 처절하게 보였다.
그렇게 그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World. 고블린 제사장 라그너스가 쓰러졌습니다!]
[자이언트 퀸 스파이더의 내단을 획득하였습니다.]
[어둠에 물든 구슬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x3]
[라그너스의 미쳐버린 해골 지팡이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그대로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레벨업과 동시에 생명력을 회복하였다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다.
그만큼 방금 전 자신의 공격은 모든 것을 던진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드는 상쾌한 기분은 자신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
모든 것을 던져 이겨냈다는 전율.
몇십 년 만에 느껴보는 것이던가.
20대 시절 이런 숱한 고비들을 넘겼을 때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던 동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아무도 없….
"괜찮으십니까. 영감님?"
…이놈이 있었군.
"괜찮다. 잠시 지쳤을 뿐이야."
"후우, 저도 좀 쉬어야겠습니다."
케레노스가 옆에 누우며 창을 내팽개치고 눈을 감았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썩을 놈. 큭큭."
"영감님만 하겠습니까? 큭큭."
"뭣이?! 이놈이잇!"
나는 벌떡 일어나 녀석을 걷어 차려했다.
하지만 재빠른 몸놀림으로 피해버리는 케레노스였다.
"영감님 진정하세요."
"호랑말코 같은 놈. 그러고 보니, 네놈이 아까 날 다짜고짜 공격했었지?"
"하하, 그건…."
"시끄럽다. 이눔아! 이리와라 네놈 엉덩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도망 다니는 케레노스를 쫒아 다니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물론, 해 오름은 쓰지 않은 채로.
퍼억!
"악!"
[NPC 케레노스의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퍼억! 퍼억! 퍼억!
[NPC 케레노스의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NPC 케레노스의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NPC 케레노스의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
…
그렇게, 나는 케레노스의 호감도를 50%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윈디아.
그곳의 동쪽에는 온갖 물건들을 파는 시장이 있다.
드레인은 그곳에서 윈디아의 옷감들을 만져보고 있었다.
코볼트의 가죽, 트롤로 만든 비단, 라이칸 스로프의 가죽으로 만든 밍크 옷들까지.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지금 자신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코 눈앞에 있는 이것이었다.
"오우마이가아앗! 정말로 엄청난 재질이군요. 이것은 무엇으로 만든 옷감인가요?"
"유니콘의 가죽이에요."
"와우! 어메이징! 유니콘! 리얼리?!"
'이거라면 내가 원하는 엄청난 옷을 만들 수 있겠어!'
"오우, 보이! 얼마인가요?"
"30만 달러에요. 할아버지."
"왓?! 베리 비지! 비싸! 디스카운트 플리즈! 깎아줘!"
하지만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베니스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냉정했다.
"안 깎아주니까. 돈 없으면 가세요!"
드레인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이것을 꼭 사고 싶었다.
무지개빛깔로 빛나는 이 유니콘의 가죽을 보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궁극의 옷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자이너로서의 직감이었다.
한마디로 필이 꽂혀버린 그런 느낌?
'어떡하지… 지금 내가 가진 것은 20만 달러뿐인데.'
드레인은 흥정을 해보기로 했다.
"오우, 조금만 깎아주면 안될까 보이? 이거 미감정 아이템이잖아."
그렇다.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그것은 미감정 아이템이었다.
소년은 그런 것을 지금 30만 달러에 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이 얘기했다.
"제가 돈이 좀 급해서요.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약값이 필요해요. 저도 감정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돈이 들잖아요."
소년 베니스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반짝이는 사슴과도 같은 눈망울!
드레인은 그 순수한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보이. 참으로 효자군요."
어렸을 적 입양했던 자신의 아들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인벤토리를 보니 2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희귀한 아이템들도 있으니 이것을 같이 주면 가격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드레인이 말했다.
"보이. 사실 난 20만 달러밖에 없단다. 하지만 내가 가진 옷들과 가죽들을 줄게. 이것들을 팔면 10만 달러 정도 될 거야. 그러니 그것을 나에게 팔지 않으련?"
베니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드레인은 유니콘의 가죽을 구매할 수 있었다.
'기부한 거로 치는 거야. 기부한 거로. 굿잡. 베리웰.'
그는 기쁜 마음으로 감정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디자이너 길드가 있는 곳. 높은 등급의 미확인 옷감을 감정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어서 오시오. 감정하러 왔소?"
동그란 외알 안경을 쓴 중년 신사가 드레인을 반겼다.
"예스! 유니콘의 가죽입니다."
"오오, 그거 기대되는군요. 어디 한번 봅시다."
드레인은 30만 달러의 유니콘 가죽을 내밀었다.
"흐음…."
신사가 옆에 있던 돋보기를 들어 이리저리 가죽을 살폈다.
잠시 후.
"감정이 끝났소, 근데 유니콘의 가죽은 아닌 것 같소만."
"?????"
드레인은 재빨리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무지개 색으로 염색한 코볼트의 가죽]
등급: 고급
내구력: 50/50
*이것으로 옷을 만들면 방어력 +5, 매력 +5가 붙는다.
윈디아의 광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볼트를 무지개 색깔로 염색한 가죽. 영롱한 느낌이 고전적이면서 아방가르드하다.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려 거금 30만 달러짜리였다.
그만한 거금을 주었으니 최소한 전설은 안 되어도 바로 아래 등급인 영웅 등급 정도는 나오리라.
못해도 더 아래 등급인 희귀 정도는 나오겠지.
그리 생각하고 큰마음을 먹고 구매했었다.
그런데 등급이 고급인 것도 모자라서 미확인 옵션이 뭐?
방어력 5? 매력 5?
오오~?
'속았구나!'
드레인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한번 감정사에게 물었다.
"이게 진짜 내 가죽이 맞나요? 리얼리…?"
"그렇네만…."
감정을 해주는 중년의 NPC도 안타깝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후우, 땡큐, 고맙습…니다."
드레인은 분한 표정을 숨기며 쓸쓸히 가게를 나서려했다.
그런데.
"이보게."
"……?"
"감정비는 5천 달러네."
* * *
김수정은 뮬란의 시장을 걷고 있었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그녀는, 거리에서 다양한 먹거리들을 맛보고 있었다.
메론 맛 슬라임 국수, 흙 맛이 느껴지는 코볼트 앞다릿살, 코카트리스 닭 꼬치까지!
'나중에 아버님한테 이런 요리들이 있었다고 말해드려야지.'
어느새 그녀는 춘택의 1호 팬이 되어있었다.
싸움 실력은 물론이고 다정한 요리 실력까지.
춘택은 그녀의 완벽한 이상형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은 돌릴 수 없는 법!
'아버님이 30년만 젊었으면 좋으련만.'
아쉽지만 아버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먹었던 요리를 알려주며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곡소리가 들려왔다.
"엉엉엉엉엉!"
"……?"
으슥하고 후미진 골목에서 들려오는 곡소리.
김수정은 그곳을 빼꼼 바라보았다.
"드레인 할아버지?"
"콸…?"
"미스킴! 케르! 엉엉엉엉!"
드레인은 자신의 바지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지만, 그녀는 금세 얼굴을 추스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드레인에게서 사기를 당했단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어쩌자고 미확인 아이템을 그렇게 큰돈을 주고 구매하셨어요! 사기꾼이 있던 곳에 가보셨어요?"
"노우, 벌써 가봤지만 이미 떠나고 없었어."
"아이디는 기억하시죠?"
"기억해. 베니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
그렇게 김수정이 불쌍한 드레인을 대신해 사기꾼을 잡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그때,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어이, 아가씨."
"……?"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덩치를 가진 남자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뭐지?'
그런데,
"읍?!"
그들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