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41화
제41화
…날 알고 있다?
아니 지그마를 안다?
뒤를 돌아보니 해골 지팡이를 들고 있는 조그만 고블린이 서있었다.
나이가 조금 있는지 수염도 길게 나있는 모습이 제법 나이가 많아 보였다.
늙은 고블린이 다시 한번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온 거지? 내가 병력을 모으며 뮬란을 칠 준비를 하라고 했을 텐데?"
뮬란을 쳐? 이 녀석 정체가 뭐지?
문득, 이름이 궁금해졌다.
-Lv.120 [고블린 제사장] 라그너스
이 녀석이 바로 라그너스였군.
그는 나를 지그마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걸 이용하는 게 좋았다.
나는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라그너스 님. 키륵."
"그게 무슨 말이냐. 똑바로 설명하라 지그마. 키잇."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했다.
눈을 마주치면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당했습니다."
"인간들에게 당해?"
"동굴을 통해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킥."
이거 연기대상 감인데….
분하다는 듯 연기를 하며 고개를 드니 라그너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아일체(?)의 경지에 들어섰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에 라그너스가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키잇."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다.
순간이지만, 녀석의 눈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만약 지옥이 존재하고 염라대왕이 존재한다면 저런 눈빛이 틀림없을 것이다.
"인간 놈들. 감히! 복수하고 말테다!! 키이익!!"
복수심을 불태우는 라그너스의 눈빛이 더욱 진하게 타오른다.
"따라와라, 지그마!"
망토를 펄럭이며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는 라그너스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각종 뼈 장신구가 달린 거대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바로 오크의 족장이 머무는 거처.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그 오크 족장이 앉아있었다.
-Lv.200 [푸른 이빨 오크 족장] 고르바.
…엄청난 위압감이군. 저 팔에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어.
그렇게 내가 고르바의 위용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옆에 있던 라그너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고블린의 먼 친척 고르바여."
"말하라 형제여. 취이익."
고르바의 입과 코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놈도 입 냄새 엄청 심하겠는데.
"인간들이 뮬란에 있던 우리 부족을 멸망시켰다. 이제 다음 차례는 이곳 푸른 이빨 부족의 오크들이 될지도 모른다. 키이익."
"뭐라! 크르륵. 하지만 진짜 우리 부족을 공격하겠는가. 그들은 그동안 한 번도 우리 부족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형제여."
족장 녀석은 뭔가 인간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라그너스가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email protected]#%^&*())"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알 수 없는 녀석의 말에 불길함이 깃들었고, 해골지팡이를 흔들더니 보라색의 기운이 슬금슬금 고르바를 잠식해갔다.
고통스러워하는 고르바.
"크어억! 아아악!"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저 지팡이, 대체 뭐지…?
순간, 해골지팡이의 안에 조그만 빛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것만 같은 빛.
왠지 익숙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거 혹시…?
[어둠의 물든 구슬 조각]
등급: ?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사악한 힘의 파편이 느껴진다.
*아이템에 대한 정보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그마를 잡고 얻은 구슬 조각이었다.
사악한 힘이라니, 찝찝해서 버리려고 했는데, 프롱이 녀석이 가지고 있으라고 해서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라그너스는 3개나 들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옅은 진동음과 함께 고르바의 목걸이가 어두운 빛으로 일렁거렸다.
고르바의 목걸이에도 똑같은 구슬 조각이 있었다
서로의 조각은 공명했고, 결국 칠흑 같은 보라색이 되어버린 고르바의 구슬은 어두운 빛을 뿜어내며 그의 눈마저도 칠흑으로 물들여버렸다.
고르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웅!
흔들리는 땅.
고르바가 괴기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크륵. 인.간.들.을 심.판.하.리.라!"
"킬킬킬킬! 그래. 인간들을 심판하는 것이다! 전쟁 준비를 하라 고르바! 내일 당장 윈디아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라.그.너.스.님."
고르바가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밖으로 향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진이 이는 땅을 보며 나는 숨을 죽였다.
…모든 일의 배후는 이 녀석이었구나. 빨리 나가서 알려야 해.
그때, 누군가 막사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키릭, 라그너스 님. 여기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킹 스파이더를 찾지 못했습니다."
"뭐라…!"
순간 라그너스의 눈에서 검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키이잇! 죄, 죄송합니다. 동굴에 가봤는데 녀석이 없어서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쓸모없는 놈들. 죽어라! 고통의 늪!"
고블린의 발밑에서 보라색의 손이 올라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악마의 손이었다.
고블린은 그 손에 붙잡힌 채, 늪으로 끌려들어갔다.
"키, 키익! 라, 라그너스 님!"
"자, 자비를! 키악!"
어느새 늪은 고블린을 잡아먹고 다시 원래의 땅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곳에선 어떠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벌하네.
진짜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순간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그마."
"예."
"너만큼 믿을 만한 자가 없구나. 킹 스파이더의 동굴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지. 키륵."
"알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 자이언트 킹 스파이더를 찾아라. 그리고 찾으면 나에게 와서 보고하라. 전쟁은 내가 킹 스파이더의 내단을 섭취한 후 그때 시작 될 것이다. 키익."
킹 스파이더의 내단…?
그것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난 그것을 녀석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뭐,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려면 연기를 해야겠지.
띠링-!
[라그너스가 기르던 거미]
난이도: B
고블린 제사장 라그너스가 기르던 자이언트 킹 스파이더가 있다.
부하들이 찾아봤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로크 산맥을 뒤져서 자이언트 킹 스파이더를 찾아라.
*완료 조건: 자이언트 킹 스파이더 발견 후 보고.
*퀘스트 실패 시 라그너스와의 신뢰도가 대폭 하락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왠지 양심에 찔리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안 한다고 하면 녀석은 악마 같은 손을 소환해 날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물론, 1대 1로 붙으면 자신은 있지만, 이곳은 오크의 마을이었다.
나는 오크 마을에 땅 파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키륵."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이미 자이언트 킹 스파이더를 발견하셨습니다.]
[퀘스트 <라그너스가 기르던 거미> 의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재빨리 막사를 빠져나왔다.
"후우."
나오자마자 참았던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병사들을 소집하는 고르바의 모습이 보였고, 병사들 하나하나가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전사들 사이에 간간히 투사도 보였는데, 그들은 조금 더 기세가 단단했다.
경비병 오크 보다 2~3배나 덩치가 큰 오크들이 모두 검은 눈빛을 하고 있으니, 기세가 흉흉했다.
…나중에 저놈들이랑 붙으려면 각오를 해야겠는데.
하지만 그와 대조되게 화목한 모습을 보이는 오크 가족들도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고르바는 꽤 훌륭한 지도자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런 그가 지금 라그너스라는 놈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최초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25 사변의 참상을 생생히 겪으며 자란 나는 이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보는데, 수정이에게 귓속말이 왔다.
- 크리스탈 : 아버님, 퀘스트는 잘 되가세요?
- 잭슨 : 이제 끝내고 내려 가려고한다.
- 크리스탈 : 다행이네요. 근데 빨리 오셔야겠어요.
- 잭슨 : 왜, 무슨 일 있냐?
- 크리스탈 : 윈디아의 영주가 아버님을 만나고 싶어 해요.
- 잭슨 : …엥?
- 크리스탈 : 일단 오세요. 오시면 놀라운 소식도 있을 거예요. 후훗.
- 잭슨 : 알았다. 빨리 내려가마.
…놀라운 소식이라, 머리 아프군. 일단 가서 생각해야겠어.
나는 빠르게 로크산맥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등산도, 인생도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훨씬 가벼워지는 건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어느새 북문에 이르렀다.
"아버님 여기예요!"
저 멀리 김수정이 손짓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성문의 입구. 그런데, 옆에는 익숙한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케레노스?"
왠지 평소 보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날렵한 흰색과 연두색이 섞인 갑옷을 입고 있었고, 들고 있는 창과 갑옷이 썩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녀석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했다.
"넌 어디 갔다가 온거냐. 이놈아. 혼자만 비싼 거 입으니깐 좋냐?"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서는 혼자 좋은 걸 입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심술이 났다.
케레노스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죄송합니다. 영감님."
"아버님, 그건 다 이유가 있어요."
"이유…?"
"네, 사실 케레노스는요…."
김수정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얘기해주었다.
자신과 헤어지고 꽃밭에 갔던 일부터 시작해서 어떤 경비병이 자신을 모함했고, 케레노스가 감옥에서 구해주었던 일까지.
그렇게 케레노스가 우연히 내가 로크산맥을 정찰 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영주에게 보고했더니 그가 자신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됐던 거예요."
"흠, 그러니깐 이놈이 이곳의 기사단장이란 말이냐?"
"네, 맞아요."
…어쩐지 범상치 않더라니.
"기사인지 기사식당인지 나한테 존댓말 바라지 말거라. 이놈아."
"하하, 전 그런 거 바라지도 않습니다. 영감님이랑은 지금 이대로가 훨씬 편하거든요."
"망할 놈. 그래서 영주님은 어디계시냐."
"제가 모시겠습니다."
잠시 후.
나와 케레노스는 영주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수정은 밖에서 케르와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똑똑-!
"영주님. 케레노스입니다."
"들어와!"
끼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처음 마주한 영주의 집무실은 제법 깔끔했다.
벽에 걸린 독수리 머리의 박제와 은빛의 검과 갑옷이 눈에 띄었고, 온갖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안녕! 자네가 바로 그 잭슨이라는 할아버지야?"
갑자기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가 내려갔다.
웬 꼬마가 여기에 있지? 설마…?
"영주님이십니다."
허어. 우리 서희랑 또래로 보이는데… 아니, 좀 더 큰가?
나는 케레노스가 가르쳐준 대로 한쪽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반가워. 윈디아의 영주 에드워드야. 모험가라지?"
조금은 앳된 목소리의 에드워드.
"그렇습니다."
"그래. 자네가 직접 로크산맥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오크마을로 갔다는 보고를 받았어.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직접 오크 마을 안까지 둘러보고 왔습니다."
안까지 둘러보고 왔다는 나의 말에 놀란 표정이 되는 두 사람.
생각보다 많이 커지는 눈을 보며, 나도 놀랐다.
"그곳을 직접 들어갔단 말이야? 대단해! 윈디아의 금역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오다니 정말 놀라워!"
…금역?
그딴 거 모른다.
그냥 때려잡았을 뿐이다.
"자네가 마음에 들어. 내 기사로 들이고 싶은데 어때? 내 기사가 되어볼 생각은 없어?"
띠링-!
[영주가 당신에게 자신의 기사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허락할 시 직업이 '윈디아의 기사'로 변경됩니다.]
윈디아의 기사라….
어쩌면 처음 만난게 이 꼬마 녀석이었다면 당장 하겠다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요리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전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아쉽네. 이유가 뭐야?"
"전 요리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요리사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거짓말이지…?"
에드워드는 믿기지 않는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뭐, 사실 못 믿는 것도 이해는 간다. 수정이도, 첸도 그랬으니까.
"사실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어떻게 요리사 따위가 금역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다는 거야! 솔직히 말해!"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요리사가 맞습…."
"어허! 자네 혹시 내 기사가 되기 싫어서 거짓말 하는 건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혼내는 꼬마 영주의 모습에서 둘째 손녀인 서희가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서희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다가 영상통화라도 해봐야지.
"솔직히 말하도록 하라! 그대의 진짜 직업이 무엇인가!!"
나를 향한 호통이었지만 위엄 따윈 전혀 없었다.
생각보다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했다.
"큼, 어쩔 수 없군요. 사실대로 얘기하겠습니다."
"후후, 그래. 나의 지엄한 호통에 이제 사실대로 얘기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이제 말해보도록 해. 진짜 직업이 뭐야?"
에드워드가 선심 쓰는 척 얘기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 했다.
나는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큼, 저는…."
"저는…?"
"평범한 직업은 아닙니다."
"후후,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난 천재야. 하하하."
자신의 예리한 관찰력에 혀를 내두르며 자화자찬하는 녀석을 보니 다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참아내느라 제법 곤욕을 치렀다.
"저는 전설의…."
"오오! 기사인가? 전사? 아니면 암살자? 궁수? 아니지 자네 같은 할아버지가 몸 쓰는 일을 할리 없지. 그래! 은퇴한 대마법사인가?!! 그래 틀림없지?! 자네는 바로 전설의…."
"요리ㅅ…."
"야!!!!!"
"홍홍홍♡"
꼬맹이를 놀리는 건 언제나 즐겁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