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30화
제30화
홀딱 벗은 채 숨을 헐떡대며 뮬란의 입구에 도착한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방금 전까지 호되게 당했던 네불이와 육불이였다.
"허억. 형님. 겨우 마을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젠장.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 허억, 헉."
두 사람은 계속 숨을 헐떡이며, 방금 전까지 하얀 불독에게 쫒기 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해져 오는 순간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개를 풀어? 후우."
"진짜 돌아이 같습니다. 형님. 허억."
입고 있던 장비는 모조리 빼앗겼지만 가방 속에 포션은 항상 지니고 다녔기에 그들은 도망치면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숲에 있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뒤쫓아오며 자신들을 사냥하기 위해 무기를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대만 스쳐도 즉사에 가까웠기에, 그들은 뒤도 보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뮬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살인자 상태로 죽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형님."
"그래, 그건 그렇지."
살인자 상태로 죽었다면 레벨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장비를 포함해 그동안 약탈했던 것들까지 모조리 빼앗겼을 것이다.
오히려 본인들이 입던 장비만 빼앗긴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서히 마을로 들어섰다.
[허상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이름과 정보가 가려집니다.]
"어머, 저 사람들 뭐야…?"
"변태인가 봐. 속닥속닥."
"별 미친놈들이 다 있네. 야 빨리 사진찍자."
번화가로 들어서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유저들의 모습이 보였다.
NPC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 저 사람 좀 봐!"
"어머! 저런 거 보면 눈 버려요."
"엄마. 저 사람 이상해!"
"세상에 저런 변태 같은 사람이!"
"엄마!"
"엄마!"
뮬란의 모든 엄마들이 자식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끙."
"어서 가시죠. 큰형님께선 술집에 계실 겁니다."
"그래. 빨리 가자."
네불이는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망할 영감탱이. 이름이 잭슨이었나?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다. 반드시…!'
* * *
그 무렵, 나는 드레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의 털을 다 모아서 귓속말을 했는데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와서 받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괜찮다는 말을 할 뿐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했다.
"미스터 최!"
진짜 여기까지 오다니….
"여긴 대체 어떻게 오신 겁니까. 몬스터는 어떻게 처리하시구요."
그는 자랑을 하듯 내게 커다란 실 뭉치를 하나 보여주었다.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장 그가 설명 해주었다.
"오우, 디자이너의 무기는 바로 이 실이에요. 이걸로 몬스터들을 잠깐이지만 꼼짝 못하게 묶을 수 있답니다."
그가 나에게 보여주려는 듯, 근처에 멀뚱하게 서있는 놀에게 스킬을 시전했다.
"매듭 포박!"
촤라라락!
실 뭉치가 재빨리 뻗어나가며 놀의 사지를 꽁꽁 묶어버리는 것이 보였다.
제법 단단히 묶인 것이 누군가 풀어주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 없어 보였다.
호오, 이런 스킬도 다 있었군.
"디자이너는 이렇게 실 공예술과 바늘 공예술을 기반으로 한답니다."
"훌륭한 스킬이군요."
"오우, 고마워요. 그나저나 놀의 털은…?"
"여기 있습니다."
"오 마이 갓. 아주 퍼펙트하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완성되면 귓속말을 할게요. 건투를 빌어요. 미스터 최."
그렇게 드레인은 곧장 떠나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미련 따위는 없는 듯했다.
그의 등 뒤로 느껴지는 열정에 손을 데일 것 만 같았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콸."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내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대답을 하듯 짖는 '케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케르가 애교를 부리며 발라당 뒤집었다.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며 배를 긁음과 동시에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스실라와 아이올리아]
난이도: D+
뮬란의 촌장 첸의 딸 스실라는 생전 아이올리아를 가지러가다 안타깝게도 놀들에게 잡아먹혔다고 한다. 스실라의 기일에 맞춰 그녀의 무덤에 바칠 아이올리아가 필요한 첸. 북쪽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에 놀들을 잡아 복수를 하고 아이올리아를 가져오도록 하자.
*퀘스트 완료 조건: 바람꽃 아이올리아 0/10, 놀의 발톱 50/50
"바람의 언덕은 좀 더 북쪽으로 가야 되는 건가."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래 지나지 않아 이곳이 바람의 언덕임을 알 수 있었다.
끝을 모를 정도로 넓은 평야.
환하게 펼쳐진 푸른 언덕.
어렴풋이 보이는 빨간 지붕의 집.
불어오는 바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얀 꽃들은 정경을 더욱 싱그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것들을 보며 장엄한 대자연에 압도되어 말문이 터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벅찬 감정 또한 올라오고 있었다.
"큼."
무엇이 그리 힘들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나도 주책이군.
나이를 먹으니 이상하게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눈시울을 붉히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소를 흘려버렸다.
"좀 걸어볼까."
아이올리아를 꺾어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었다.
싱그러운 백색의 꽃밭 구간을 지나 도착한 곳은 꽤나 험준해 보이는 언덕이었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짝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올라가봐야지.
나는 많은 유저들을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가족끼리 온 사람.
연인들도 종종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의 또래는 보이지 않았다.
내 주변은 오로지 젊은이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내게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40대들은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험! 파릇파릇한 아이들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그렇게 연신 헛기침을 하며 정상에 이르자 나는 사람들이 왜 이곳을 오르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작은 감탄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느새 이곳은 붉은 노을에 완전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와!"
"예쁘다!"
"아름다워!"
그래, 아름다웠다.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노을빛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죽지 않았다고, 살아있다고 외치는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이런 발버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저기 봐! 저게 윈디아야!"
…윈디아?
젊은이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엔 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윈디아의 정경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거대한 풍차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고 풍차들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마을들이 자리해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뮬란의 두 배 이상 되어 보이는 크기에 압도적이란 단어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두근- 두근-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따뜻한 전율이 뭔가 감격스러웠다.
그래, 이것이 바로 전율… 응?
"케르야."
"콸?"
"왜 내 바지에 쉬를 한 거냐."
"콸."
* * *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스름한 어둠이 다가오자, 내려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 한 나는 산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 메시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강아지의 소변이 바지에 묻었습니다. 24시간 안에 세탁하지 않으면 냄새가 밸 것입니다.]
제기랄. 그놈의 냄새 타령.
5분 간격으로 뜨는 이 메시지는 나를 제법 귀찮게 만들고 있었다.
냄새나는 고블린 갑옷에서 탈출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인지, 시큼하게 올라오는 냄새에 코가 찡그려졌다.
순간, 아까 봤던 드레인이 떠올랐다.
끙, 옷은 아직 멀었겠지?
케르가 뛰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저 녀석…?"
나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케르를 따라 뛰었다.
이쯤이면 멈출 것 같은데도, 녀석은 거침없이 달렸다.
왼쪽, 오른쪽. 또 왼쪽, 왼쪽.
마치 익숙한 길을 찾아가는 듯. 계속해서 뛰어다녔다.
잠시 후, 케르가 멈춘 곳은 빨간 지붕이 있는 벽돌집이었다.
"여긴…?"
아까 밑에서 보았던 곳이었다.
제법 튼튼하게 지어진 벽돌집의 굴뚝에선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케르는 익숙하게 집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콸! 콸콸!"
"엘리자베스?"
케르의 고성과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꽤나 나이 지긋한 노파였다. 케르는 그녀를 향해 뛰어가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콸!"
"오오! 엘리자베스!"
둘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처럼 서로를 향해 볼을 부볐다.
마치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것처럼, 내 마음속에 '뿌듯'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여기가 너의 집이었구나.
그나저나 엘리자베스라니… 진짜 안 어울리는 이름이군.
아무튼, 잘 살거라. 케ㄹ… 아니 엘리자베스. 잠깐이지만 즐거웠다.
나는 조용히 뒤돌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노파가 나를 붙잡았다.
"우리 엘리자베스를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분 맞으시죠?"
…제길, 감동이 다 깨져버렸네.
나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
사실 코가 시큰거려서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해요. 괜찮으시면 들어와 다과라도 좀 드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은혜를 갚아야한다며 나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나는 그녀의 집에서 다과와 음료를 홀짝이고 있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어느새 뜨개질 거리를 손에 든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뜨개질을 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제 이름은 플로라예요."
"잭슨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생판 처음 보는 남에게 만난 적이 없냐고 묻는 수법.
이런 쌍팔년도 수법을 NPC가 나에게 쓰고 있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크흠.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이거 참. 싫다고 말할 수도 없고….
"죄송해요. 제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은 것 같아서 그만."
"큼! 괜찮습니다."
플로라는 의자 옆에 잠들어 있는 엘리자베스를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웃으며 뜨개질을 했다.
"잭슨 님은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신가요? 여기까지 오시려면 꽤 힘드셨을 텐데."
"요리사입니다."
순간, 플로라가 흠칫했다.
그녀가 뜨개질 하던 손도 멈추며 내게 물었다.
"요리사… 인가요?"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 거칠게 떨려오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버렸다.
"죄송해요. 잠시 옛날 일이 떠올라서 그만."
나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분위기 상 안 좋은 일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찰나가 흘렀다.
"실은 잭슨 님이 제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어요. 그 사람도 요리사였거든요."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프로메테우스가 이상증세를 보였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녀에게서 익숙함을 느낍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을 감고 찰나의 미래를 엿봅니다.]
이 녀석, 왜이래…?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 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이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네.
하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이 녀석이 하는 말들은 지나고 보면 옳은 것이었음을 알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잠깐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저기."
"……?"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요리사의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플로라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잘게 떨렸지만 이내 고요함을 되찾았다. 플로라는 또 한 번 뜨개질을 했다.
역시, 거절인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프로메테우스 녀석을 욕하고 있었다.
그런데, 플로라가 입을 열었다.
"얘기해드리지요."
"……!"
"그분은 아주 유명한 요리사랍니다. 어쩌면, 이곳 아크 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일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유명한 요리사…?"
플로라가 뜨개질하던 것을 멈추며 말했다.
"그분의 이름은 알렉서스."
…뭐?
"최초의 통일제국인 아틀란의 왕이자 제 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