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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6화 (26/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26화

제26화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가벼운 조깅과 함께 햇살의 문을 활짝 열었다.

꽃봉오리가 피려는 나무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는 벤치에 앉아 옅은 숨을 헐떡거렸다.

"헉… 허억…."

젠장, 아침부터 해장운동을 하려니 힘들어 죽겠네.

하긴 그렇게 술을 들이부었는데 정상인 것도 이상하긴 하다.

근데, 설마하니 가상현실이 현실에도 영향을 끼칠 줄이야.

윽, 또 올라온다.

"우웁…."

뮬란은 어제 축제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동상의 얼굴은 공개되었고 많은 유저들이 그것을 보며 술렁거렸다.

다행인 것은 내가 원한대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많은 추측과 탄식들이 난무했지만 유저들은 갑자기 벌어진 술판에 축제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며 동상에 대한 것은 잊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잊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망할 술주정뱅이 같은 놈."

알고 보니 수비대장 필로스의 아버지는 뮬란에서 가장 큰 맥주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필로스의 부탁으로 공수해온 뮬란의 특제 맥주를 그날 마을 사람들은 원 없이 즐기고 마셨던 것이다.

문제는.

…그 안에 나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지.

맥주집의 아들답게 필로스는 끊임없이 맥주를 들이부으며 마셨다.

나를 위한다는 핑계로 건배 제의를 쉬지 않고 해왔고 덕분에 나는 잘 즐기지도 않는 맥주를 몇 리터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으론 분명 술 대결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졌던 것 같다.

"소주였으면 내가 이겼는데."

나는 한숨을 뱉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끙, 그래도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만약 유저들이 몰렸다면 엄청 피곤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뭐, 정체는 들키지 않았으니 이걸로 위안 삼아야 하려나.

집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곧장 게임방송을 켜는 것이었다.

아크스타에 대한 소식은 이곳이 가장 많다는 정도 녀석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어제 있었던 축제에 관한 토론이 나오고 있었다.

- 어제 뮬란에 있던 동상의 얼굴이 공개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선 축제가 벌어졌는데요. 어제 현장에 동상의 주인이 있었다는데 사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제 저녁. 동상의 얼굴이 공개되었는데요. 놀랍게도 이 동상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 그렇군요. 제가 보기엔 정체를 숨기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요.

-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럴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 뮬란의 영웅이라는 사람의 직업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 우선 화면을 보겠습니다.

띄워진 화면에는 솔라를 소환한 내가 나무 탑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젠장. 저건 또 언제 찍은 거지."

"네? 아버님, 뭐라고 하셨어요?"

설거지를 하던 며느리가 뒤돌아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손사래를 쳤다.

"혼잣말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 이것을 자세히 보시면 작은 불꽃이 소환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정말 그렇군요.

- 이것으로 유추해볼 때, 이 사람은 소환계열의 직업을 얻었거나, 마법사 계열의 직업을 얻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 일각에선 새로이 나타난 예언의 인물, 즉 숨겨진 전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 어불성설입니다. 원래 스타 프루츠는 그리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랭킹 1위인 마이클만 하더라도 200레벨이 넘어서야 겨우 얻을 수 있었다는 인터뷰가 있었지요.

-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그럼 시간관계상 방송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 예, 감사합니다.

"아버님 요즘 아크스타 관련 방송을 되게 자주 보시는 것 같네요? 많이 재밌으신가 봐요. 호호."

어느새 설거지를 마친 며느리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생각보다 재밌더구나. 언제 시간나면 너도 같이하자꾸나. 어떠냐."

"호호, 정말요? 저야 좋죠. 나중에 저희 가족들 다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음, 그것도 좋겠구나."

"언제가 좋을까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자. 껄껄."

그렇게 나는 오전 내내 며느리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 * *

[아크스타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어제 축제가 열렸던 마을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어! 저 사람 아니야? 동상이랑 가면이 똑같잖아?"

"뭐? 정말? 어디어디."

"진짜다! 저 사람이 바로 뮬란의 영웅이야!"

…이거 뭔가 불길한데.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길안내를 시작합니다.]

"젠장."

나는 뒤도 보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엄청난 속도로 모였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꺄악-! 잡아라!"

"쫓아가자!"

"사인 받으러 가자!"

우르르르르-

…아니, 왜 쫓아오는 건데!

5명쯤에 불과했던 사람들의 수는 어느새 30명, 조금 지나니 100명, 500명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왜 따라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재밌으니까 따라가는 사람도 보였다.

연기로 된 모기약을 뿌리던 트럭을 쫓아가는 심정이 이것과 같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

"달려~ 달려~"

"뭔지는 모르겠지만 신난다!"

"잡아라~ 야호!"

…미친놈들.

하나도 안 신난다고 지금 쫓아오고 있는 그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를 들으니 더 열 받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상을 부숴버리는 건데.

잠깐의 소란 끝에 들어선 곳은 길이 막힌 골목이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유저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이 녀석이 길 안내를 잘못했을 리가 없는데….

결국 싸우는 방법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문을 연 누군가가 나를 향해 들어오라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약간 허름했지만 숨기에는 적당해 보였다.

"여기로! 컴 히얼!"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저곳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나는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가 왜 나를 돕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한숨 돌렸다는 생각에 안도의 탄식을 뱉었다.

뒤에서 숨을 헐떡이는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어디 있지?"

"아~ 놓쳐버렸어! 젠장! 정체를 밝힐 기회였는데!"

"난 같이 사진 찍고 싶었는데!"

…사진은 개뿔.

멀어져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작게 숨을 골랐다. 그때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우… 괜찮으신가요?"

고개를 드니 백색의 수의를 입은 사람이 서있었다.

머리엔 무스를 발랐는지 떡진 것처럼 기름기가 흘렀고 얼굴엔 주름살이 조금… 아니, 잠깐. 이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

"혹시 드레인…?"

"오우, 날 아는 모양이군요. 반가워요. 한국 사람이라더니 그 소문이 맞나 보군요."

드레인 박.

한국 패션의 선구자.

특유의 어눌한 억양.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내 앞에 있는 그는 진정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드레인이었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 * *

잠시 후.

나는 그의 작업실로 보이는 허름한 탁자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판타스틱한 일이군요. 설마 했는데 미스터 최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느새 가면을 벗은 내 얼굴을 확인한 그가 나를 보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히려 제가 더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패션의 선구자께서 이곳에 계시다니요."

"오우, 그저 저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울 곳을 찾았다고 해두지요."

그의 말에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지막 열정이라….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럼 요리사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메이징! 월운정에서 아들이랑 함께 먹었던 그 맛을 나는 아직 잊지 못했어요. 기대하도록 할게요. 미스터 최."

과거 내가 월운정에서 최고 권위자로 있을 때 그는 손님으로서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곳에선 옷을 만드시는 겁니까?"

"오우, 맞아요. 새로운 옷감과 패션들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리게 하였어요."

…아마 디자이너겠군.

전직을 하러 쿤타에게 찾아갔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직업목록 중에 디자이너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디자이너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에겐 이걸 맡겨도 되지 않을까.

"혹시 옷도 제작하십니까?"

"오우, 필요한 게 있으면 이 중에서 하나 골라가요. 내 레벨이 낮아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쓸 만할 거예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다양한 색상의 옷들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화려한 문양의 옷도 있었고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무난한 옷도 있었다.

나는 옷들의 정보를 하나하나 넘기며 확인했지만 역시 쓸 만한 요리사 옷은 없는 듯했다.

어쩔 수 없나….

"죄송한데 맞춤옷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례는 하겠습니다."

"오우… 맞춤? 가능해요. 혹시 제작서 같은 게 있나요?"

그의 말에 재빨리 책을 한권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잘머거스에게 받았던 괴짜 요리정장의 제작법이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할게요."

어느새 그의 눈이 진지해지며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선구자다웠다.

옷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더니, 사실이었군.

사락. 사락.

책장을 넘기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눈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나를 힐끔거리는게 조금 거슬렸지만, 그는 나와는 다른 분야에서 장인이었다.

마침내 드레인이 책을 덮었다.

"어메이징!"

"……."

"판타스틱! 쏘 뷰리풀! 원더풀!"

…뭐라는 거여. 시방.

내가 멍하니 있자 무안했는지 드레인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최. 이건 정말 놀라운 옷에 대한 제작법이에요. 대체 이걸 어떻게 얻은 거죠?"

"친구에게 받았습니다. 자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님의 옷에 대한 제작법이라더군요."

"정말 놀라워요. 미스터 최는 정말 굉장한 친구를 두었군요."

저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옷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도 하고, 그 성능을 알 생각도 없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또 달라진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군요. 꼭 만들어보고 싶은 옷이에요."

그는 꽤나 흥분한 모양인지 특유의 억양도 쓰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사례금은 필요 없어요. 대신 이것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가죽들만 좀 구해줘요."

그가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필요한 재료들을 적어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종이에 적힌 재료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 고블린 가죽(0/100)

…고블린 가죽이라.

이건 문제가 없을 것 같군.

지금 내 인벤토리에는 넘쳐나는 게 고블린 가죽이었다.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 주면 될 것 같았다.

- 놀의 털가죽(0/50)

놀…? 이건 어떤 몬스터지?

첸 녀석에게 물어봐야 하나.

"정말 이거 두 개면 됩니까?"

"오우, 맞아요. 내 레벨이 낮아서 더 좋게 만들 수가 없어서 미안하군요."

"괜찮습니다. 저도 레벨이 낮습니다."

드레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 최는 레벨이 몇인가요? 내가 듣기론 고블린 부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던데, 어떻게 요리사가…."

나는 상태창을 열어 레벨을 확인해 보았다.

"15라고 적혀있군요."

"왓? 리얼리…?"

영어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그가 많이 놀랐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커다랬던 그의 눈이 왕눈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냥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빨랐다.

[유저 '드레인' 님에게 파티 신청을 했습니다.]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내 레벨을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왓-더-뻑?!"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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