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25화
제25화
동상…?
- 아버님, 보고계세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전화를 받았다.
"그래, 보고 있다."
- 동상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나는 그녀의 말에 TV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설마…?
동상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얀 면티에 낡은 바지, 녹슨 단검을 들고 있는 그것.
자유분방한 머리칼에 얼굴은 아직 조각되지 않아서 완성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내 모습이 맞았다.
- 맞죠…?
그녀의 물음에 순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뮬란의 촌장 첸님을 모셔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반갑네.
- 저 동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 녀석. 대체 무슨 짓을.
- 험, 저건 우리 뮬란을 구해준 한 영웅을 기리기 위해 짓고 있는 동상이라네.
- 영웅 말입니까? 뮬란을 구했다니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 그래. 이야기해줘야지. 잘 듣게나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첸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 고블린 부락을 혼자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이야기까지.
다행인 것은 그가 내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생김새 또한 알려주지 않았다.
리포터가 계속해서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미리 알면 재미가 없으니 동상이 완성되면 얼굴로 확인하라는 말뿐.
그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레벨 유저 혼자서 고블린 부락을 정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요. 과연 어떤 얼굴일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이수영 리포터였습니다.
인터뷰가 끝남과 동시에 나는 정도 녀석에게 리모컨을 돌려주었다.
정도는 의심의 눈초리를 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저거… 혹시 할아버지예요?"
…쓸데없이 예리하긴.
"아니다. 그냥 내가 있던 뮬란에 신기한 게 지어지고 있다고 그래서 친구한테 전화가 왔던 거다."
"아, 하긴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할아버지가 고블린 부락을 정리했을 리는 없겠죠. 하하."
…썩을 놈.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상하는 것 같아서 정도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악! 왜 때려요?!"
"들어가서 공부나 해라. 이놈아!"
"우이씨, 원래 공부는 쉬어주면서 해야 머리가 돌아가는 법이라구요!"
"말이나 못하면 쯧쯧."
아차, 그러고 보니 전화를 하는 중이었던 걸 깜빡했다.
핸드폰을 들어보니 아직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험, 미안하구나."
* * *
급히 전화를 마무리한 나는 곧장 캡슐로 향했다.
그렇게 내가 있는 이곳은 어느 새 가상현실 속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불에 탄 흔적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추측하건데 아마 후발대로 왔던 필로스와 병사들이 불을 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곳에 다시 부락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을 테지.
그들의 의도대로 이곳은 더 이상 고블린들이 생기지 않는 듯했다.
불에 탄 나무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찔러오자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뮬란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다 왔네."
갈 때는 빠른 속도로 뛰어갔지만 돌아올 때는 천천히 풍경들을 보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왔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곳은 꽤나 신비로운 곳이었다.
새로운 나무와 꽃들, 동물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새 저 멀리 서쪽 성문이 보이자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오랜만일세. 젊은이."
나는 익숙한 얼굴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NPC 경비병 칼]
"헛! 어르신 아니십니까. 안 그래도 수비대장님이 어르신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를 하라고 하셨…."
"되었네. 필로스에겐 내가 찾아갈 것이니 소란 피울 것 없어."
"아, 넵!"
"그럼 수고하게나."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안으로 들어섰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는 칼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뒤, 내가 나타난 곳은 첸의 대장간이었다.
끼익-
낡은 경첩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오! 뮬란의 영웅이 아니신가! 어서오시게! 자네 혹시 마을에 있던 거대한 동상을 보았…."
"철거하게."
순간 몸을 흠칫 하던 첸은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그게 무슨… 이유가 있나?"
"난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한다네."
"고작 그런 이유라고…?"
"그래, 고작 그런 이유일세."
"……."
그와 나는 한참을 눈싸움을 하듯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첸이었다.
"하아, 미안하네. 자네가 이렇게 싫어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잠에서 깨어나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말 미안허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생각해주면 안 되겠나?"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간절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듯. 그렇게.
젠장, 왜 일이 이렇게까지….
하긴,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마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직접 나서서 동상을 두드리고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합니다.]
궁금해 할 것도 없다. 이놈아.
축 쳐진 첸의 어깨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설마하니 내가 이렇게 반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겠지.
어쩔 수 없나….
"조건이 있네. 그걸 들어준다면 동상을 짓는 것을 허락해주지."
"오오, 정말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자네 의견을 무조건 반영하도록 하겠네!"
"우선…."
* * *
웅성웅성.
시끌벅적한 뮬란의 광장.
그곳의 정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동상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와, 이제 얼굴을 조각하려는 모양인데?"
"도대체 어떤 얼굴일까?"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유저가 틀림없어. 정말 궁금하다."
잡화상점에서 구매한 돗자리를 펴고 앉은 유저들로 인해 그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때마침, 그곳에 첸이 나타났다.
"저기 좀 봐. 촌장이야."
"조각을 하던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첸은 그들을 모아놓고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했다.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을 사람들.
그 모습을 보는 유저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 젠장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 미치겠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껴달라고 할까?"
"그건 안 될걸."
그렇게 5분이 지나고, 첸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얼굴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따앙-! 따앙-!
첸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유저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골목에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 온 첸이 물었다.
"자네 말대로 하기로 했네. 그런데 정말 이런 걸로 괜찮겠나?"
그는 품에서 백호 가면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래. 얼굴이 알려지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낫지."
그렇다.
나는 첸에게 얼굴을 바꾸어줄 것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반대를 하며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타협안으로 내가 그에게 선물을 받았던 가면을 따로 만들어 동상에 쓸 수 있게 요청했고, 다행히 그것은 잘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이것도 안 된다고 했으면 동상을 부숴버렸을 지도.
진짜 그런 생각도 했다.
그가 이것마저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불꽃 발차기로 저 동상을 부숴버릴 각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정성이 있어 마음만 품었지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동상은 언제쯤 완성되는 건가?"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아마 저녁쯤이면 완성이 다 될 게야."
"그렇구만."
다시 고개를 들어 조각되어가고 있는 동상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 나의 동상을 지어준다는 사실이 기분을 고조시켰고,
마치 훌륭한 일을 한 위인이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거렸다.
동시에 옛날 일이 떠올랐다.
'여보, 나는 꼭 시신기증을 해야겠어요. 죽기 전 나도 무언가를 남기고 가고 싶어요.'
"……."
시신기증을 한 아내.
사실 나는 그것을 반대했었다.
그것은 나만이 아닌 아들딸들도 마찬가지였고, 모두가 그랬었다.
하지만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아내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완전히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소원이라고 하니 들어줄 수밖에.
…여보. 그때는 이해를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구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념을 떨쳐버렸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의 동상을 기대합니다.]
"자네, 괜찮으면 동상이 만들어진 뒤에 있을 축제에 참가해주지 않겠나?"
"축제…?"
…이건 처음 듣는 소린데.
"동상이 다 만들어지면 우리들은 곧장 축제를 시작할 걸세. 자네의 동상 앞에 불을 피우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지. 껄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의 축제에 흥미를 가집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이 꼭 참가하기를 희망합니다.]
흠. 뭐 상관없으려나…?
나는 첸을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네. 나를 위한 축제라는데 그래도 얼굴이라도 비추는 것이 예의겠지. 대신 내가 나타났을 때, 소란스럽지 않게 부탁하네. 들어줄 수 있겠나?"
"물론일세. 내 마을 사람들에겐 단단히 일러두도록 하지. 그리고 병사들에겐 철통 보안을 지시하겠네. 정말로 고맙네. 하하하."
그는 정말 기분 좋은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 * *
잠깐 로그아웃해서 밥을 먹고 푹 쉰 나는 다시 아크스타에 접속했다.
안타깝게도 수정이는 오늘 당직이라 축제에 참가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혼자 게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뮬란 특제 늑대 꼬치가 5달러!"
"축제엔 술이 빠질 수 없죠! 맥주 싸게 팝니다~! 많이들 사가세요!"
"식인꽃으로 만든 예쁜 꽃목걸이를 단돈 10달러에 팝니다!"
이미 뮬란은 많은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무래도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첸과 만나기로 한 접선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 어서 오게! 마침 딱 맞춰서 왔구만. 이제 막 천을 걷어낼 참이었어! 하하하."
나는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유저들의 따가운 시선에 '백호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동상 가까이 접근 할 수 있는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동상 근처에는 병사들이 철통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한 나는, 고개를 들어 동상을 바라보았다.
…계속 가리면 좋겠는데.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첸이 가장 크게 반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단념한 나는 동상 앞에 쌓인 거대한 나무 탑을 올려 보았다.
아마 저건, 불을 붙이기 위해 쌓아 놓은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무릇 축제란 그런 것이니까.
올림픽의 성화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불이 피어남과 동시에 뮬란의 축제는 시작되리라.
"자네가 불을 붙여주겠나?"
"내가 말인가?"
"그래, 그래주면 정말 좋겠군."
첸은 진지한 눈빛으로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네."
잠시 후.
첸은 동상 앞에 세워진 단상으로 나를 이끌고 올라갔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동상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하나씩 살피며 감회에 젖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만났던 잡화상인 딜런의 얼굴, 그리고 훈련소장 쿤타의 얼굴, 그 옆에는 수비대장 필로스가 함께 서있었다.
…화해를 한 모양이군.
그들의 사이가 좋아져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마시스와 잘머거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며 기꺼운 듯 흐뭇한 표정을 하며 날 보고 있었다.
그렇게 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가 구해주었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입을 다문 채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는 그들의 미소는 내게 무한한 신뢰감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첸의 얼굴이었다.
"고맙네."
"껄껄. 좋아해주니 다행이구만. 그럼 불을 붙여주겠나?"
첸이 횃불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으로 불을 붙이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씨익 웃었다.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때론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마을 사람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무 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침묵의 한복판을 걸어가는 동안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노파의 모습이 보였다.
그 노파의 옆에는 내가 구해주었던 병사가 함께 서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모두가 따라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나무탑에 이르자 나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솔라."
마을 사람들과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유저들의 목소리 또한 들려왔다.
"저게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화염 마법인가??"
휘몰아치는 불꽃이 작은 태양의 형체를 갖추자 모두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살필 새도 없이 솔라에게 말했다.
"저기 나무에 불 좀 붙여줄래?"
"알았다! 주인아! 해해!"
솔라는 빠른 속도로 날았다.
제일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마치 회오리처럼 휘감으며 나무탑을 올라가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한편의 영화처럼 무척 이나 찬란한 모습이었다.
인생이란, 때론 괴로움도 슬픔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들은 이 한때를 위해 살고 있는 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런 한때의 기적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이니까.
술렁이는 소리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잔을 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뮬란의 영웅을 위하여!!!!!!"
[시작의 마을 뮬란의 모든 NPC들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전설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