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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4화 (24/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24화

제24화

"끄응."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카센터.

나도 모르게 폭주한 레이서 본능 때문에 흰둥이는 이곳에서 진찰을 받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집이 가까운 것이라고 할까.

어느새 시간은 저녁을 향해 달렸다.

따르릉-!

…젠장. 무열이네.

"나야."

- 준비는 다했냐?

"음, 그게 말이지…."

나는 민망함에 볼을 긁었다.

- 왜, 무슨 일이 생겼나?

…민망해 죽겠군.

"끙, 그게 말이지. 하필 엔진이 퍼져버렸지 뭔가."

- 크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러게 진작 내가 차 사준다니깐 여태 그 오래된 차를 타고 다녔냐?

"어허, 이 사람. 그래도 나와 반평생을 함께한 녀석이야. 함부로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 사람 참. 껄껄. 거기가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가도록 하지.

…여기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수리공에게 이곳의 이름을 물었다.

"성신 카센터라는구만."

- 음, 기태 녀석이 알고 있다는 군. 30분정도 걸릴 것 같아.

"미안하네."

- 아닐세. 금방가지.

잠시 후.

나는 백무열을 만날 수 있었다.

곰 같은 덩치와 우람한 키.

올백으로 넘긴 머리와 오른 눈에 있는 칼에 베인 자국이 그가 살아온 삶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 녀석. 오랜만에 보는데 한층 더 무서워졌군.

내 친구지만 정말 인상이 무서운 녀석이다.

그래도 속은 여리니 반전이라면 반전이겠군.

참고로 이 녀석의 취미는 꽃꽂이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백무열이 악수를 청해오자 나도 맞잡았다.

"그래, 너도 좋아보이네,"

"하하. 어서가자고 예약한 시간이 다 되어가거든."

"예약…? 너 설마 또 비싼 곳으로 예약한 거냐? 거 참 말 안 듣는 친구일세."

"하하. 좋은 게 좋은 거지. 자자, 이러지 말고 어서 차에 타. 어서."

그가 나를 차로 밀어넣었다.

나와 백무열은 그렇게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춘택이 너랑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나는 정갈한 방에 진수성찬이 차려진 일식집에서 백무열과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후릅-

"크하. 좋다."

"하하. 여기 매운탕이 아주 일품이지 더 먹어보라구."

"그래, 그래. 이거 오늘따라 술이 더 땡기는구만. 한잔 더하자고."

"좋지. 껄껄."

챙-

다시 한번 술잔을 부딪힌 우리들은 소주를 들이키며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하."

"좋다!"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자 나는 그의 안부를 물었다.

"성찬이는 요즘 잘 지내?"

"성찬이? 잘 지내지. 녀석, 나를 닮아서 그런지 검도대회를 아주 휩쓸고 다닌다니까. 크하하하하."

백무열이 기분 좋은 듯 크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백성찬.

내 절친한 벗인 그의 유일한 혈육이다.

과거 그는 불행한 사고로 인해 자신의 유일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손자인 성찬이가 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고, 그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눈물을 펑펑 쏟아내곤 했었다.

"하긴 네가 가르쳤으면 그깟 대회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성찬이는 아마 곧 나를 뛰어 넘을 거야. 내 손자라서가 아니라 재능이 대단해."

"그렇구만."

나는 그와 함께 세상을 호령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거침없고 무서울 것이 없던 시절. 그는 한때 나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다.

특히 그의 목도를 휘두르는 솜씨는 나 또한 한수 접어줄 정도였다.

"옛날 생각이 나네. 무열이 네 별명이 뭐였지…?"

"음,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한데. 아마 '패죽'이었지?"

패죽.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난다.

그는 적들에게 '패죽'이라고 불렸었다.

옛날에 그가 함정에 빠져 좁은 방안에서 스무 명을 상대해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짧은 목도 하나로 거기 있던 녀석들을 모두 패 죽여버렸다.

그 뒤로 그는 '패죽'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적들은 그의 목도만 보아도 공포에 떨며 도망가기 일 수였다.

피식.

"그때의 자넨 정말 굉장했지."

진심이었다.

그때의 백무열은 나 말고는 적수가 없었다.

"자네만 하겠나. 이 친구야."

그가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백무열이 말했다.

"넌 내 우상이었어. 아냐?"

우상이라는 말에 나 또한 피식 웃어버렸다.

"늙은 퇴물일 뿐이지."

"아니야, 그때의 넌 정말 굉장했어. 정말 그 발차기는 최고였지. 지금도 네 모습이 생생해."

그는 옛날 일을 떠올리는 듯,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네가 그때 은퇴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라고."

"무얼 했을 거 같은데."

내 물음에 그가 턱수염을 만졌다.

"음… 아마 네 옆에 계속 있었을 거야."

"……."

"사실 처음엔 네가 홀랑 떠나버렸을 때 미웠어. 근데 이 나이가 되어보니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아."

"그때가 그립냐?"

"그립다기 보다는 후회가 되지.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은 시절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백무열의 얼굴에는 옅은 후회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긴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서 뭐하누. 내 몸뚱이는 이미 썩어가고 있는 것을… 끌끌."

그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런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얼굴도 모르는 가이아는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백무열을 불렀다.

"무열아."

"……?"

"너, 나랑 게임 하나 같이할래?"

* * *

"오늘 정말 만나서 즐거웠네. 자네 제안은 내 깊이 생각해보도록하지. 그래도 당장은 힘들어."

갈색의 중절모를 쓴 백무열이 늙수그레한 웃음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춘택이는 호탕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 한번 깊이 생각해봐, 사실 나도 별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어. 껄껄."

"하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오, 저기 마침 택시가 오는구만."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오는 것이 보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자네도 조심히 가라고."

"나는 기태 녀석이랑 가면 돼. 너무 걱정하지 말어."

"그래. 또 보자고. 연락해."

"알았네. 이 사람아."

그렇게 그는 곧장 택시를 탔고, 금세 멀어져갔다.

백무열은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더니 어느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운전수인 김기태를 보았다.

"그래, 석두 녀석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예, 회장님."

"그놈의 회장 소리 좀 그만해라 이놈아. 난 이제 뒷방 늙은이야."

"예, 명예회장님."

"고지식한 놈 같으니. 그래, 석두가 왜 날 보자는 거냐."

"불룡파 쪽에서 사업을 제안해왔다고 합니다."

"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네. 그놈이 사업을 제안해왔다고?"

"믿기지 않지만 그렇습니다."

"불도마뱀 녀석 또 무슨 꿍꿍이 속인지… 끙, 알았다. 일단 가자."

"예."

김기태가 뒷문을 열어주었고, 자연스레 뒷좌석에 올라탄 백무열은 그대로 문을 닫았다.

부릉-

잘빠진 에쿠스 한 대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렇게 30분을 달렸을까. 하늘에서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오는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음… 그래?"

술기운에 잠시 잠을 청했던 그는 눈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는 눈발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백무열은 이내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저… 회장님."

"큼, 그래. 왜 그러냐."

백무열은 시큰해진 코를 훌쩍거리며 김기태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음? 뭐냐. 말해보거라."

"아까 뵈었던 어르신 말입니다."

"춘택이…? 그 친구는 왜?"

백무열은 김기태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10년 가까이 회장님을 모셨지만 늘 저분 앞에서만 환한 웃음을 지으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 내가?"

"예, 제가 봐온 회장님은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셨습니다. 물론 손자분이 있을 때는 또 다르지만요."

"그래, 그러고 보니 네 녀석에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제가 본 회장님은 늘 어떤 상대라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분을 보시는 회장님의 눈빛에서 존경과 그리움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

백무열은 고개를 돌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그리움에 사무쳐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뜬 백무열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

김기태는 회한이 섞인 듯한 한숨소리를 뱉는 그를 향해 물음표를 띄웠다.

"우리 조직을 상징하는 표식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론입니다. 다리 없는 새… 아닙니까?"

"그래. 다리 없는 새…. 없을 무(無), 다리 각(脚), 새 조(鳥) 를 써서 무각조(無脚鳥)라고 하지."

"예.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조직의 일원이니까요. 헌데 그게 저 어르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상관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무각조거든."

"예…?"

"최춘택. 과거 나와 함께 우리 조직을 창설한 최초의 3인중 한명이자, 무각조(無脚鳥)라는 별명을 지닌 전설의 싸움꾼. 그는 우리 무각회의 초대 수장이다."

"……?!"

* * *

다음 날.

숙취에 허덕이던 나는 오전을 내내 잠들어있었다.

그렇게 이불을 뒤척이던 중, 갑자기 들려오는 핸드폰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따르릉-!

"음…."

따르르릉-!

아, 고통스럽다.

꿀잠을 방해하는 핸드폰 소리가 이렇게 미울 줄이야.

손을 더듬거리며 어렵사리 핸드폰을 쥔 나는, 발신자를 확인해보았다.

[수정이]

…안부전화인가?

순간, 못 들은 척 무시하려다가 자꾸 울리는 벨소리가 싫어서 그냥 받아버렸다.

"큼, 그래. 수정아. 나다"

- 아버님, 혹시 뉴스 보셨어요?

"뉴스…?"

갑자기 뉴스 타령을 하는 그녀의 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못 보셨다면 지금 117번 한 번 틀어보시겠어요?

심상치 않은 그녀의 말에 곧장 거실로 나가 빈둥거리며 누워있는 정도 녀석의 리모컨을 뺏었다.

"엇, 할아버지! 지금 제가 좋아하는 걸그룹 보는 중인데!"

"시끄럽다. 이놈아! 잠시면 된다."

"아, 안 돼! 아악!"

나는 애써 녀석의 말을 무시하며 117번을 틀었다.

그 채널은 아크스타를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채널이었다.

저번에 손주들과 공성전이란 것을 봤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저게 뭐지…?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망치로 거대한 무언가를 다듬고 있었다.

따앙-! 따앙-!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장소.

나는 저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 지금 이곳 뮬란에 거대한 동상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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