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06화
제6화
이곳은 어디지? 꿈속인가…?
[기다렸어요.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누구요? 왜 날 기다린 거지…?
[나를… 아니, 세상을 구해줘요. 믿을 사람이 오직 당신뿐이에요.]
당신은 나를 어떻게 알지…? 그리고 갑자기 세상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요.]
온 세상이 하얗게 일그러졌다.
온통 하얀 그것은 내 머릿속을 지우는 지우개처럼 나를 물들였다.
귓가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들의 가호가 함께하길.]
"으어어! 안 돼…!"
내가 일어난 곳은 새가 지저귀는 어느 평화로운 숲 속이었다.
"꿈이었나…."
아니, 꿈이 아니다.
나는 볼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역시… 이건 분명 꿈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가상의 현실세계.
그래, 이곳은 아크스타라는 이름을 가진 세계였다.
[게임 이용 시간이 2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두 시간…? 내가 그만큼이나 잠들어있었나?
"윽."
갑작스런 두통에 오른손을 관자놀이로 가져갔다.
잠시 후, 고통이 조금 줄어들자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주변에 하나둘씩 동물과 새가 풀숲 사이로 나타나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두 무릎을 꿇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다리가 없는 뱀이나 새들 같은 경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에게 예를 취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왕이 아니었다.
그저 두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가진, 그리고 네 명의 손주들을 가진 평범한 가장이자,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나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모든 동물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볼세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이거 뭔가 왕따 같은 느낌인데….
기분이 묘했다.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느낌.
말로 표현하자면 그런 기분이었다.
정작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다니… 웃기는군.
"우선 근처에 마을부터 찾아볼까."
사실 정도 녀석의 말에 따르면 나는 '뮬란'이라는 곳에서 눈을 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프시케와 그 노인은 어떻게 된 거지…?"
하나,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없었다.
분명 마지막에 기억하기로 그곳은 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나를 그곳에서 빼내려 하는 것 같았고, 그것이 뜻하는 것은 아마….
"죽은 것인가."
눈을 질끈 감으며, 그들을 떠올렸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나를 탈출시키고 그들은 그 공간 안에 고립되었으리라.
그렇지만….
"죽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모든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어째서 내게 이런 신탁이 내려졌는지, 구해달라는 것은 무슨 뜻이었는지, 나를 진정한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물어야 했다.
잠시 제자리에 멈춰선 나는, 손주들이 가르쳐준 상태창이란 것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잭슨
레벨: 1 [이름없는] 모험가
천성(天星): 찬란한 약속의 군주
힘 1(+20) / 민첩 1(+20)
건강 1(+20) / 지식 1(+20)
능력치 포인트: 0
찬란한 약속의 군주….
역시 그것은 진짜 꿈이 아니었나.
나는 상태창을 훑어보고는 곧장 인벤토리를 불러왔다.
"이건…?"
[봉인된 스타 프루츠]
등성: 0
사용 제한: 찬란한 약속의 군주.
북두칠성의 힘이 담긴 과일.
일곱 별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먹을 수 있다.
현재 봉인되어 있어 먹지는 못한다.
…북두칠성의 힘이 담긴 과일이라, 근데 봉인되었다고?
스타 프루츠는 과일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제주도에서 보았던 현무암과 같은 거무튀튀한 돌의 모습이었다.
"이래서야 먹기는 힘들겠네."
우선 봉인이란 것을 먼저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이아는 어째서 내게 이런 것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소중히 하라는 프시케의 마지막 말도 있었고,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타 프루츠를 인벤토리에 넣고 다시 풀숲을 헤치며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인가."
장사를 하는 듯 외치는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 함께 사냥할 사람을 구한다는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왔다.
그야말로 평화로움을 느끼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마을.
나는 입구에 창을 들고 있는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이보게, 여기가 혹시 뮬란인가?"
"그렇습니다. 초행길이십니까?"
역시, 이곳이 뮬란이었군.
"그렇네. 촌장을 만나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겠나?"
"촌장님을 뵈러 오셨군요. 촌장님은 마을 남쪽에 있는 산에 기거하고 계십니다. 대장장이 일도 함께 겸하고 계시기에 망치 모양이 있는 대장간을 찾으시면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젊은이."
작게 고개 숙이는 젊은 병사를 뒤로하고, 나는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고블린 전사가 쓰던 철퇴 쌉니다!"
"제가 쓰던 질 좋은 가죽방어구들 전부 반값에 팝니다!"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따끈따끈한 검입니다! 구경하세요!"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호객행위였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뮬란을 구경해 나갔다.
모두 처음 보는 건축 양식이었기에 마치 유럽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 온 것 같은 느낌 마저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골목을 뒤졌을 때, 순간 길을 잃었음을 직감했다.
…젠장. 이놈의 길치 본성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옆에서 장사를 하던 한 중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녹색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니 아마 손주들이 말했던 NPC라는 것 같았다.
"이보게, 여기 촌장이란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음…? 이곳에 처음 온 여행자이신가 보군요. 하하. 저기 저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분수대가 나올 겁니다. 거기서 쭉 직진하면 스미르 산이 나올 거예요. 거기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하하. 나중에 포션이 필요하면 한번 찾아와주십쇼."
"그래, 그러지."
나는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주억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젊은이들뿐이었다.
나랑 비슷한 또래는 찾을 수도 없었고, 많아봐야 40대 정도로 보이는 장년층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눈엔 그들도 젊은이들에 속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나는 콧방귀를 뀌며 걸어갔다.
"파릇파릇한 아이들이 많이 하는 게임이구나. 나 같은 늙은이는 끼지도 못하겠어. 험!"
뒷짐을 지고 가는데 아까 말했던 분수대가 보였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랬나? 아니 왼쪽이었나?
그렇게, 나는 다시 길을 잃고 있었다.
* * *
산 좋고 물 좋고 공기도 좋은 이곳!
이곳은 바로 뮬란의 촌장이 있다고 전해지는 남쪽 스미르 산의 중턱이었다.
나는 뒷짐을 지며 이곳의 절경들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군.
도시화가 진행된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순수한 시골 느낌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젊었을 적 만해도 그런 곳이 천지였지만, 몇 년 뒤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하며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난 뒤에는 약간의 때가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예 눌러 앉고 싶네."
제법 싱그러운 표정과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을 촌장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작은 오두막에 망치 그림이 걸려있는 한 대장간 앞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건 몇 가닥 없는 백발을 휘날리며 망치질을 하고 있는 덩치 좋은 노인이었다.
드디어 또래를 만났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지어졌다.
"반갑네. 난 이곳 뮬란의 촌장 첸 이라고 하네. 자네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여기로 가면 무기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오, 자네 방금 이곳에서 시작한 모험가인듯 하구만. 제법 나이가 있어보여서 몰라봤지 뭔가. 따라오게. 무기를 주도록 하지."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옆방에 있는 무기를 걸어둔 벽이 있는 곳이었다.
제법 녹이 슨 것도 보이는 것이 정도 녀석이 말한 것처럼 그리 좋은 것을 주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하나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게나. 그리 좋은 것은 아니네만 처음 이곳을 여행하는 자네 같은 초보 모험가들이 쓰기에는 딱 알맞은 것들이지. 그럼 난 나가 있을 테니, 고르고 나서 나에게 찾아오도록 하게나."
그렇게 말한 첸은 다시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벽에 걸린 무기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무기를 골랐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단검이 편했기에 손에 쥐기 좋은 단검들을 위주로 살펴보고 있었다.
[녹슨 첸의 단검]
등급: 일반
내구도: 100 / 100
물리 공격력: 15
뮬란의 촌장 첸이 만든 단검이다. 녹이 슬어 그리 오래 쓰진 못할 것이다.
…이게 좋겠군.
나는 그 자리에서 단검을 휘둘러보며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롭고 괜찮았다.
"쓸만하구만."
식칼 말고 다른 칼을 잡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실 어린 시절엔 단검을 쓰는 건 거의 일상이었는데….
아니, 이건 생각하지 말자.
나에겐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니까.
곧장 머리를 털며 방을 나서니 망치질을 하고 있는 첸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 모양이구만. 그럼 무기도 받은 김에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겠나?"
…그 말을 왜 안 하나 했다.
"고블린을 잡아달라는 겁니까?"
"음? 어떻게 알았지? 50마리만 부탁하겠네."
그와 동시에 퀘스트 창이 떴다.
[촌장 첸의 부탁]
난이도: F
뮬란의 촌장 첸이 첫 번째 일거리로 고블린들의 소탕을 부탁했다. 요즘 자꾸만 늘어나는 그들의 숫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걱정이 많다고 한다.
-완료 조건: 고블린 0/50 사냥
-최소 2인 이상의 파티를 권유합니다.
역시 정도 녀석이 말한 대로군.
그나저나 이 녀석, 이런 건 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런 걸 공부하고 있다니… 쯧쯧.
아무리 봐도 손자 놈은 공부랑은 영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나중에 정도 녀석이랑 대화를 좀 해봐야겠구만."
"응? 자네 뭐라고 그랬나?"
"아닙니다. 고블린들을 소탕하고 오겠습니다."
"고맙구만. 부탁하겠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퀘스트를 받은 나는 곧장 스미르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던 분수대가 있던 광장으로 들어섰다.
산을 내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호객행위를 했고, 나는 그들의 시끄러운 고성 세례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끙,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나이를 먹을수록 조용한 곳이 좋아지는 것 같다.
시끌벅적한 곳이 아닌 고요하고 편안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랄까?
나는 서둘러 정도 녀석이 일러준 동쪽 숲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이 가장 고블린들도 덜 나온다고 손자 놈이 얘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문을 통과해 숲에 도착했고 얼마 가지 않아 5마리의 고블린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흠, 어디 보자."
나는 뒷짐을 풀며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멍하니 서있는 한 고블린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단검은 핑그르르 날아 고블린의 심장에 꽂혔다.
팍!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짧은 비명소리도 없이 고블린이 죽어버리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쉽게 죽어…?"
순간 아까 있었던 튜토리얼에서 모든 능력치가 올랐다는 창을 본 것이 떠올랐다.
혹시 그거 때문인가…?
그 순간 내 앞에 놀라운 메시지들이 뜨기 시작했다.
[S등급 경로 우대 혜택을 받습니다.]
[모든 경험치가 2배로 증가합니다.]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2배로 증가합니다.]
"아…."
그래, 잊고 있었다.
내 캡슐에 그 빌어먹을 의사 놈들과 싸워 얻은 경로 우대 서비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