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04화
제4화
"상자…?"
누가 봐도 상자였다.
일곱 색깔의 알록달록한 빛무리는 네모난 상자의 형태를 띠더니,
조심스럽게 공중에 안착하며 나부끼는 바람과 함께 내 볼을 간지럽혔다.
나는 상자를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프시케가 불렀다.
"잠시만요. 모험가님."
"……?"
갑자기 산들바람이 불어오더니 손바닥만 했던 프시케가 알록달록한 꽃잎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갑작스런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약간의 입을 벌린 채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찰나의 시간이 흘렀고, 그녀를 가리던 꽃잎이 살며시 흩어지자, 나는 옅은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름답다.
단 4마디의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말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그녀는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되어있었다.
귀가 길고 뾰족한 것이 아마 인간은 아니리라.
그녀는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서양의 여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리 오세요. 모험가님."
"큼, 알겠소."
나도 모르게 살짝 헛기침을 하며 존댓말을 하고 말았다.
사실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뭐… 예쁜 건 사실이니까.
순간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털며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열어 보세요."
이 안에 들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엄청난 것이 들어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풍기는 아우라가 그만큼 대단하니 그럴 수밖에.
그나저나 같은 사람 맞나…?
아까랑 분위기가 완전 딴판인데.
끼익-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상자를 열어 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거울?"
아니, 거울이 아니다. 이건….
"명도라고 해요. 태초 신 가이아님의 의지가 담긴 청동으로 만든 거울이지요."
…역시 거울이 맞긴 하군.
[나를 깨운 자가 누구인가…?]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는 듯한 괴기한 목소리.
팔에 있는 솜털이란 솜털은 모조리 곤두서는 소름.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 공간엔 오직 나와 프시케만이 존재했다.
[새로운 모험가인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바로 내가 들고 있는 청동거울에게서였다.
그 사실을 안 나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뭐야…?
"그렇습니다. 명도의 인도자여. 별의 제단을 열어주십시오."
[그렇군. 시련을 얼마나 물리쳤지?]
"모두 물리쳤습니다."
[무어라…!]
호통을 치는 그의 목소리에 순간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젠장. 이 빌어먹을 놈은 대체 뭐냐고!
[모험가여,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다짜고짜 이름부터 묻는 괴기한 목소리가 괘씸했지만,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왠지 저주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잭슨."
초면에 반말을 내뱉어서 찔끔, 했지만 뭐… 어떻게 보아도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상관은 없겠지.
[좋은 이름이로다. 태초 신 가이아님의 시험을 통과한 모험가 '잭슨'이여. 그대는 일곱 별의 제단에 오를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일곱 별의 제단? 이것들 무슨 사기꾼은 아니겠지?
뭔가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게 굉장히 미심쩍었다.
그 순간, 명도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음…!"
눈이 부셨다. 마치 빛으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광휘.
약간의 실눈조차도 뜰 수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게슴츠레 눈을 뜬 나는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
순간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지금 내 앞에는 옅은 빛을 띄는 일곱 개의 별들이 서로를 뽐내는 듯 발하며 공중에 떠있었다.
그 장엄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고, 놀란 한 마리의 토끼처럼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일곱 별의 제단입니다. 별의 시험을 치른 모험가들은 이곳에서 별의 선택을 받게 되지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대체 저게 뭔데…?
프시케의 말이 이어졌다.
"구슬에 손을 올리면 7개의 별 중 하나에게 선택받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모험가님의 여행에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며, 앞으로 걸어가게 될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중에 영롱한 빛을 띠는 수정구슬이 보인다.
…저걸 말하는 건가.
"일곱 개의 별이 뜻하는 것은 각각 모험가님이 가지고 있는 천성(天星) 즉, 잠재력을 뜻합니다."
"잠재력…?"
"그렇습니다. 붉은 별이 뜻하는 것은 순결한 용기."
지잉.
순간, 제일 왼쪽에 있던 별에 붉은 빛이 맴돌다 사라졌다.
"주황색 별이 뜻하는 것은 차가운 자비."
이번엔 두 번째 별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노란색 별이 뜻하는 것은 간절한 희망."
해바라기 같은 노란 빛이 세 번째 별을 물들였다.
"초록색은 가련한 사랑. 푸른색은 고독한 우정. 남색은 참다운 지혜, 보라색은 친절한 인내를 뜻합니다."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북두칠성이 눈앞에서 무지개 빛깔로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각 별들이 뜻하는 바는 모험가님이 이곳 <아크랜드> 를 모험하면서 걷게 될 왕의 길을 뜻합니다."
"왕의 길…?"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순결한 용기를 가진 붉은 별의 선택을 받게 될 경우, 모험가님은 '힘' 능력치에 대한 20개의 추가 능력치를 가지고 시작하게 됩니다. 참다운 지혜 같은 경우는 '지식' 능력치를 가지게 되지요. 각 별들은 서로 다른 능력치들을 모험가님께 주게 될 것이고, 모험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럼 두개의 능력치를 받을 수도 있나?"
"물론입니다. 가령, 주황색의 차가운 자비의 선택을 받을 경우, 힘과 민첩 능력치를 각각 10개씩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별의 선택을 받게 될지는 오로지 가이아님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결국 운이란 소리네.
나는 턱수염을 만지며 물었다.
"이건 별의 시험이라는 걸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같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 모든 모험가들은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시련을 모두 물리치지 못하더라도 그에 걸맞는 다른 천성(天星)이 부여됩니다."
"그렇군."
"별의 성격에 따라 앞으로 얻게 될 모험가님의 직업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원치 않으신다면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선택하셔도 상관없지요. 자, 이제 모험가님의 잠재력을 한번 확인해보도록 할까요?"
잠재력은 무슨, 잠과 재력을 따로 줬으면 좋겠는데.
프시케는 지팡이를 살짝 휘저으며 마법 주문을 외우더니, 나를 향해 빛을 쏟아냈다.
그 빛은 나를 공중으로 띄우며 별의 제단 앞으로 이동시켰고, 어느새 나는 구슬을 마주하고 있었다.
"손을 올리고 신탁을 듣도록 하세요."
그녀의 말에 귓가가 울릴 정도로 목울대를 집어삼켰다.
…이거 제법 긴장되는데.
점점 커져오는 심장소리가 내 귓가를 두드리듯 울려왔다.
그와 동시에 아까 들었던 인도자라는 놈의 목소리 또한 들려왔다.
[별의 신탁을 받을지어다.]
잠깐의 침묵과 함께 입으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눈을 감고, 귓가를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잠잠히 기다렸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뜸과 동시에, 수정 구슬을 향해 힘차게 손을 올렸다.
턱.
[별의 제단이 당신을 시험합니다.]
쿠구구구구-
손을 올림과 동시에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이 떨리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중압감에 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야말로 모든 죄악들이 짓누르는 것 같은 엄청난 압박감.
동시에,
찌릿-!
"크윽…."
나는 곧장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말로 엄청난 기운들이 내 몸 구석구석을 음습해왔기 때문.
머릿속을 스치는 알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에 나는 두통을 호소했다.
[조금 더 집중하라. 모험가여.]
…거, 조금 못했다고 되게 혼내네. 썩을 놈.
작게 숨을 내쉬고 있는데 프시케가 옆에 다가왔다.
아니, 잠깐 여기 공중인데…?
"아. 날아왔구나."
그녀의 등 뒤에 펄럭이는 보랏빛 날개가 처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힘드신가요?"
"그래, 생각보다 힘들구만."
"원하신다면 조금 더 쉽게 하실 수 있도록 수면 마법을 걸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한 번 더 해보지."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며 수정 구슬에 손을 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별들이, 그리고 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내가 구슬에 손을 올리길 간청하는 것 같았다.
…까짓것. 이 악물고 버틴다.
[별의 제단이 당신을 시험합니다.]
쿠구구구구-
"크윽…!"
제길. 밀려온다.
별의 기억이, 고통이, 그 번뇌가, 머릿속을 찢을 듯이 뒤집어 놓는 수많은 역사와 정보가 한꺼번에 스쳐지나갔고, 약간의 메스꺼움을 동반한 구토감을 느껴 눈을 떴을 때 나는,
"……?"
우주 속이었다.
그야 말로 광활하다고 할 수 있는 지고의 공간.
그 수백, 수천, 수억.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별의 메아리 속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뭐…?
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이름은 가이아. 나를… 아니, 세상을 구해줘요. 믿을 사람이 오직 당신뿐이에요.]
뚱딴지같은 소리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나는 분명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어떻게 나를….
우주가, 공간이,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부탁해요.]
솨아아아아-
"…아, 안 돼!!"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세상이 밝아졌다.
절규하는 외침이 귓가에 들려왔을 때는 이미 현실세계… 아니, 프시케와 있던 가상의 게임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주륵.
흘러내리는 눈물.
어째서 이토록 슬픈 것일까.
가이아라는 이름의 여인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게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정신을 놓고 있을 때, 밑에서 살짝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이 커져있는 프시케의 얼굴.
그녀는 마치 세 살배기 아이가 사탕을 선물 받았을 때처럼 환희와 기쁨이 뒤섞여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녀린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울먹이는 그녀의 미소는 마치 천사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근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오오… 이럴 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목소리의 주인공.
명도라는 거울 안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알 수조차 없는 정체불명 인도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성 또한 약간이지만 잘게 떨려오고 있었다.
왜 저래…?
그 의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풀리고 말았다.
"……?"
눈부시다.
갑자기 느껴지는 따스한 햇볕에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고개를 든 나의 앞에.
"어…?"
모든 별이 빛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