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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화 (2/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02화

제2화

이틀이 흘렀다.

늘 빼먹지 않는 새벽 운동을 마치고 거실에서 TV 보는 중이었다.

요즘 챙겨보고 있는 막장 드라마 중 하나였는데, 남자가 김치 싸대기를 맞는 내용이었다.

- 억! 장모님! 왜 김치로 때리세요!

"쯧쯧, 맞아도 싸다. 이놈아."

한창 절정을 달리고 있는데,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며느리가 인터폰에 뜬 화면을 보며 찾아온 손님에게 누구인지 물었다.

- 캡슐 배달 왔습니다!

"캡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서있었다.

나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문한 거다."

"네…?"

"그 '아크스타'라는 거 한번 해보려고 말이다."

"어머."

며느리의 눈이 놀란 듯 커지며 날 보고 있었다.

꽤나 많이 놀란 모양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곧장 현관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고, 웬 시퍼런 옷을 입은 남자들이 대여섯 명 서 있었다.

그중 앞에 있는 남자가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유니온 캡슐 지원부에서 나왔습니다. 최춘택 어르신 맞으십니까?"

"그래. 나일세."

"허가증을 확인해 봐도 될까요?"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이틀 전에 얻었던 '가상현실 게임 허가증'을 내밀었다.

그는 허가증의 사진과 내 얼굴을 잠깐 비교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확인 감사합니다. 이건 어디에다 놔드리면 될까요?"

뒤쪽을 보니 냉장고만한 캡슐이든 상자를 들고 낑낑대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왠지 안쓰러워 보여서 나는 재빨리 안방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다가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남자들.

한두 번 손발을 맞춰본 게 아닌지 그들은 마치 일심동체의 마음을 가진 팀처럼 움직였다.

제법 성실한 모습에 뭐라도 내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며느리가 나타났다.

"이거 좀 드시면서 하세요."

"감사합니다!"

…참 눈치가 빨라.

이러니 며느리를 예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강현이 이 녀석, 결혼은 참 잘했지.

"네가 한발 빨랐구나. 내가 내어오려고 했는데. 껄껄."

"호호, 아버님도 참. 근데 허가증은 언제 만드신 거예요?"

"이틀 전에 건강검진도 할 겸해서 잠깐 만들었다. 어차피 이 나이되니깐 남는 게 시간뿐이더구나."

백수가 자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기에 이 정도 호사를 누려도 된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하나 남은 내 유일한 자존심이라고 할까?

"호호. 잘하셨어요. 아마 하시면 재미있으실 거예요."

"그래? 너도 많이 해봤나보구나."

"네, 미도랑 쇼핑 갔을 때 잠깐 해본 적 있어요. 캡슐방이라는 곳이었는데…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겠더라구요."

"그래…?"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으면 며느리까지 이렇게 말한단 말인가.

"후훗, 해보시면 아실 거예요."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설치 다 끝났습니다.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고생했네. 이걸로 부탁하지."

나는 오래된 체크카드를 그에게 내밀었다.

맨 처음 발급 받았을 때가 20년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첫째가 처음으로 받은 월급을 내게 보내주겠다고 만들어준 카드였는데, 그때 받았던 카드는 여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내겐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이니까.

삐삑-!

"결제 완료됐습니다. 허가증에 적힌 것처럼 50% 할인되셨구요. 한 달 이용료도 20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할인되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내가 받았던 허가증에 50% 할인 서비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맙네."

"참고로 저 캡슐은 어르신만 사용 가능하십니다. 게임 자체에 경로 우대 서비스가 들어가 있어서 허가증이 있어야만 열리거든요."

이건 또 뭔 소린가 하는 순간.

다행히 그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캡슐 옆을 보시면 허가증을 넣을 수 있는 곳이 보이실 거예요. 거기다가 허가증을 넣어야지만 캡슐이 작동합니다. 안 넣으면 작동을 안 해요. 그러니 가능하면 허가증은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게 제일 좋으실 겁니다."

…그런 의미였군.

캡슐로 시선을 돌리니 허가증이 들어 갈만한 틈새 같은 것이 보였다.

마치 ATM 기기에 카드를 넣는 것처럼 되어있는 옆 부분.

아마 저것이 그가 말한 허가증을 넣는 곳일 것이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설치가 필요하신 분들이 계셔서요. 즐거운 게임 되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르신."

그들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빠르게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요즘 저렇게 성실한 청년들이 많이 없던데….

보기 드문 청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자, 나는 캡슐로 다가가 차디찬 겉면을 쓸었다.

겉모습이 강철로 만들어진 관 같이 생겨서 조금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손녀에게 찝쩍대는 그 호랑말코 같은 놈들을 감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제 미도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군….

셔터 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찰칵-!

"…음?"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가 캡슐에 손을 올린 내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아버님, 웃으세요. 스마일~"

그녀의 말에 반사적으로 작년에 임플란트를 한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찰칵-! 찰칵-!

촬영이 끝났는지 며느리는 재빨리 사진을 어딘가로 전송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에서 '까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달 전 미도가 깔아주었던 어플이라는 거였는데… 이름이 아마 '까까오똑' 이었던 것 같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시지 소리에 손녀가 알려준 대로 단체 채팅방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니, 그곳엔 이미 며느리가 찍은 내 사진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김미경 : 아버님 캡슐 사셨다!

-최미도 : 헐 대박! 할아버지 짱♡

-최강현 : 하하 아버지 완전 해맑으시네요. 축하드립니다.

-최정도 : 아! 나도! 나도!!

-최미도 : 야, 최정도! 너 수업시간에 핸드폰 만지는 거야?

-최정도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도 아크스타 하고 싶다고!

-최미도 : 정신 차려라…. 너 내년이면 고3이다.^^

내용들을 훑어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엄지를 들고 있는 하얀 오리 그림과 함께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최춘택 : ㄳㄳ!

손녀가 가르쳐준 고맙다는 뜻이었다.

* * *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다.

나는 곧장 아크스타에 접속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도가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으니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손녀 말이라면 또 내가 껌뻑 죽기 때문에 저녁밥이 지어질 때까지 TV를 보며 고분고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띡띡띡띡-! 띠리링-!

손녀가 왔다.

"다녀왔습니다!"

역시 내 짐작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속도만 들어도 나는 손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미도를 향해 쿨 하게 손을 들었다.

"Yo-!"

이건 정도 녀석이 가르쳐준 인사법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게 유행이라나 뭐라나.

힙합이랬지. 아마…?

"풉, 할아버지, 방금 엄청 귀여웠던 거 알아요?"

음, 역시 정도 녀석 말이 맞았군.

"알고 있다."

"하하하핫, 아 배 아파. 그나저나 할아버지 캡슐은 어디 있어요?"

"안방에 있다."

그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미도를 캡슐이 있는 안방으로 데려갔다.

안방구석에 떡하니 자리한 캡슐을 보며 미도의 눈은 어느새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캡슐을 이리저리 쓰다듬고 보듬고 만져보는 것이 이럴 때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우와…."

미도는 계속 내 전용 캡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치 지렁이를 바라보는 아기 새와 같은 눈빛 같았달까.

…아무래도 나중에 미도 것도 한번 알아봐야겠군.

"이게 그 허가증이라는 걸 넣는 곳이에요?"

"그래. 거기다가 허가증을 넣으면 캡슐이 작동한다더구나."

"신기하네요. 캡슐방에서만 보던 보통 캡슐들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래?"

"조금 더 편해 보여요. 안에 있는 쿠션도 더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 누워서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캡슐들은 약간 비스듬히 앉아서 즐기는 거거든요."

처음 알았다.

아마 내가 일반적인 캡슐을 받았다면 오래 앉아 있어야 해서 많이 즐기진 못했을 테지.

이럴 때면 나이가 많은 게 좋은 것 같기도 하다.

경로우대로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딸 왔어?"

"엄마~!"

설거지를 하던 며느리가 고무장갑을 낀 채 달려왔다.

사랑스럽게 달려가 며느리에게 폭 안기는 미도.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다.

아, 눈에 넣는 건 좀 아프려나…?

띡띡띡띡. 띠리링-!

부스럭부스럭.

문이 열리자마자 집안이 시끌벅적해지는 걸보니 그 녀석인 것 같다.

"캡슐! 캡슐! 어디 있어요?"

…역시, 손자 놈이군.

손자 놈… 아니, 정도가 들어오자마자 캡슐부터 찾았다.

그와 동시에 며느리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정도야, 너 야자는 어쩌고?"

"하하… 집에 캡슐이 왔다는 소리에 집중이 안 돼서요."

"그래도 그렇지, 얘는. 야자를 빼먹으면 어떡하니?"

"야, 최정도. 너 공부 안 할 거야?"

찰싹!

"악! 누나 왜 자꾸 등짝만 때리는 거야. 긁지도 못하게 정중앙에… 아우씨…."

정도가 미도의 매운 손맛에 정신을 못 차리며 등을 긁으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짜식. 다행인줄 알아라.

미도가 아니었다면 내 꿀밤이 날아갔을 테니.

잠시 후.

첫째 강현이를 제외한 모두가 저녁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녀석은 오늘 약속이 있다고 늦게 들어온다고 했기에 자리에 없었다.

오늘의 메뉴는 바로 찜닭.

내가 며느리 요리 중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씩씩한 감사의 말과 동시에 찜닭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릅. 후르릅.

"움, 아웁… 맛있구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진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맛이구나.

이건 진짜 코로 먹어도 맛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안 믿긴다고?

다음에 진짜 코로 한번 먹어봐…?

그렇게 폭풍 같은 식사시간이 지나가고, 나와 두 손주들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아크스타와 관련된 방송을 시청했다.

아까 식사를 하면서 미도와 정도가 대략적으로 쉽게 설명을 해주었기에 꽤나 알아 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생명력과 마력에 관한 것이라던가, 레벨에 관련된 것이라든가 말이다.

아직은 많이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보는 중이었다.

- 우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들리는 걸보니 아까 얘기했던 공성전이란 게 시작된 모양이다.

온갖 병장기가 부딪히며 난무하고, 거대한 불덩어리와 얼음이 날아다니며, 서로가 서로의 몸을 쑤시고 찌르고 태우고 얼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선정적인 모습을 보게 될 미도가 걱정되어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래도 그건 기우였던 모양이다.

미도의 눈은 이미 가장 앞서 달리고 있는 잘생긴 한국인 놈을 향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꺅♡ 김현우 오빠다."

"…저놈이 누구냐?"

난 바로 옆에 앉아있는 정도에게 저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다.

"김현우 선수라고 한국에서 제법 랭킹이 높은 사람이에요."

"랭킹…?"

"등수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100등 안에 들거든요. 저 사람이."

"고작 그거 때문에 미도가 저렇게 좋아한다고…?"

"네, 뭐… 잘생겼잖아요?"

나는 다시 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휘황찬란한 은빛 검을 치켜들고 뛰어올라 바닥을 내려찍자 뜨거운 화염이 비산하며 많은 병사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더욱 눈에서 하트를 뿜어내는 미도.

나는 화면을 노려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김현우, 사형.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유저의 모습.

아까 전 녀석보다는 조금 더 마초같이 생기고 앞머리를 깐 것이 제법 시원시원하게 생긴 놈이 나타났다.

주먹질도 잘하는 것이 아마 많은 여자들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꺅♡ 태준 오빠도 나오네."

…사형.

화면이 돌아갔다.

이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빛의 활을 소환해 빛의 화살을 폭풍처럼 적에게 쏟아내는 은발의 미남자.

TV에서 소개하는 녀석의 이름은 은정혁이었다.

그가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꽤나 멋진 대사를 날리고 있었다.

- 너는 이미 죽어있다.

…개소리 하고 있네.

오글거리는 대사와 함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화살비가 전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죽어 나가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 또한 드높아져갔다.

그리고.

"꺅♡"

그래, 너도 이미 죽어야겠다.

그날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살생부라는 것이 생겨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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