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1)
레드 드래곤이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꼭꼭 숨겼던 비장의 무기.
그것이 바로 MML 버프, 즉 우리들이 불렀던 노래다.
이 노래는 우리 헌터들의 전투력을 높여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다른 헌터들은 이 MML 버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인 나는 MML 버프를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이용한 적이 없었다.
내게 효과가 적용이 되는지, 어떤지 솔직히 이것도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 해 보고 싶었다.
과연 MML 버프를 등에 업은 내가 레드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어떨지.
그리고 이 실험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레드 드래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인간이 부른 노래 따위에 내가 당하게 될 줄이야.”
내게 심장을 찔린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 점점 풍화되듯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전에 내가 쓰러뜨렸던 드래곤과는 다른 최후였다.
아마 자존심이 높은 레드 드래곤이 인간의 손에 쓰러진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이런 최후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레드 드래곤은 어이가 없다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MML 버프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었던 자신의 생각을 크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녀석이 사라지기 직전.
레드 드래곤은 마지막으로 나와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뜻을 밝히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승리다.”
그 말을 끝으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나는 직감했다.
짧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2차 레이드 시대가 끝났음을.
* * *
레드 드래곤이 사라진 이후.
예상대로 게이트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헌터들조차도 ‘끝났나?’ 하는 자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레드 드래곤이 정말로 내 손에 의해 쓰러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잘 안 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꿈이 아니다.
내 손으로…… 아니, 우리의 손으로 2차 레이드 시대를 끝냈으며.
우리는 다시 한번 평화의 시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기자들이 내 집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조금이라도 내 목소리를 마이크에 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커튼을 살짝 젖힌 승훈이 형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끈질긴 양반들이네.”
승훈이 형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 그리고 이 분위기.
낯설지 않다.
내가 1차 레이드 시대 당시 드래곤을 쓰러뜨렸을 때에도 이러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사람들이 몰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드래곤을 상대로 두 번이나 승리를 따낸 헌터는 아마 내가 유일할 테니까.
마음 같아선 이전처럼 헌터협회에 당분간 머물며 피신하고 싶었는데.
협회 건물이 반파되어 버린 탓에 차마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지금처럼 집에서 머물면서 상황이 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승훈이 형이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뒤.
“협회장님이 이쪽으로 오고 계시대.”
“혼자서?”
“아니, 이철민 소장하고 데이브, 그리고 우리 회사 대표님까지. 이렇게 넷이서.”
“데이브는 왜?”
“경호원이라는 명목으로.”
협회장님하고 연 대표, 그리고 이철민 소장은 데이브가 같이 온 덕분에 와글와글 몰려 있는 기자들 사이를 빠르게 헤치고 우리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철민 소장 같은 경우에는 내 집에 아마 처음 와 볼 것이다.
“굉장히 흥미롭네요.”
나와 안부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이철민 소장의 시선은 내 집 곳곳에 진열되어 있는 아이템 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철민 소장다운 모습이었다.
반면, 협회장하고 연 대표는 저 많은 인파를 뚫고 오느라 벌써부터 지쳤다는 듯이 소파에 털썩 앉아 피곤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토해 냈다.
“질렸다, 질렸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몰린 거래?”
두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내가 모두가 다 아는 대답을 들려줬다.
“제가 드래곤을 쓰러뜨렸으니까요.”
이 말에 두 사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전 세계는 지금 축제 분위기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어딜 가든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접할 수 있다.
다시 찾은 평화의 시대가 인류에게 선사하는 영향력은 이렇게나 긍정적이었다.
“데이브, 너도 오느라 고생 많았다.”
“몬스터 놈들 때려잡는 것에 비하면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지.”
데이브도 평화의 시대를 되찾았다는 사실 덕분인지 예전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진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협회장과 연 대표가 바쁜 와중에도 우리 집을 방문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현재 어떤 식으로 국제 정세가 돌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거였다.
“조만간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번 제2의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음이 선포될 거야.”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요?”
“어, 이번 2차 레이드 시대는 우리나라하고 가장 연관이 많았으니까.”
하긴, 1, 2, 3차 게이트 모두 다 우리나라 상공에서 열렸으니, 2차 레이드의 시작과 연관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레드 드래곤을 쓰러뜨렸던 장소 역시 대한민국이다.
2차 레이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알린 나라.
‘멋지네.’
절로 쓴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연 대표가 협회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설명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이어 나갔다.
“지금 협회하고 헌터 매니지먼트 업체 전부 다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조만간 이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을 거다. 그렇게 되면…….”
연 대표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승훈이 형이 입을 열었다.
“다시 연예계 활동 이어 나가야죠.”
승훈이 형에게는 미리 말해 둔 사실이 있었다.
다시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으니까, 그동안 미뤄 뒀던 방송 일정 차츰차츰 소화해 가면서 다시 연예계로 복귀하고 싶다고.
내 꿈은 여전히 무대로 향해 있었다.
게이트가 등장하고 레드 드래곤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 꿈을 잠시 무대에 맡겨 뒀을 뿐.
이제 다시 그 꿈을 되찾으러 가고 싶다.
협회장과 연 대표는 승훈이 형하고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건 뭐, 우리들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거의 안 남긴 했어도 아직 잔여 몬스터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MML 버프를 발동시킬 수 있는 노래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게 좋겠지. 혹시 또 모르잖아? 이번처럼 레드 드래곤 같은 녀석이 나타날지도.”
협회장과 연 대표는 이번 일을 통해 제3의, 제4의 레이드 시대가 언제든 열릴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데이브가 눈을 흘기면서 내 쪽을 바라봤다.
“그 빨간 도마뱀한테 뭔가 들은 거라도 있냐? 너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거 같은데.”
게이트에 관련된 건 아무도 모른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데이브가 말한 것처럼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힘을 준 어조로 말을 하니까, 데이브 입장에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레드 드래곤하고 일대일 하는 조건으로 걸었던 게 그거였으니까. 내가 지면 인류는 드래곤에게 절대복종. 내가 이기면 앞으로 우리 차원에 대한 침공은 금지.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거야.”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쉽게 믿어도 되나? 지금까지 우리 인류를 그토록 괴롭혔던 녀석들을?”
당연히 신뢰가 안 갈 것이다.
데이브의 의심은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믿어 보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잖아. 안 그래?”
“…….”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데이브는 입을 굳게 닫았다.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게이트나 차원 같은 것들을 마음대로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데이브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내 말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리고 사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레드 드래곤의 말에 신빙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위기는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평화를 마음껏 누릴 차례가 오게 되었다.
* * *
레드 드래곤이 소멸되고.
근 일주일 동안 예상대로 게이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잔여 몬스터들이 가끔씩 등장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남은 몬스터들의 숫자 역시 점점 줄어 가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릴 일이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협회장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제2의 평화의 시대를 선포하는 행사가 열렸다.
나뿐만 아니라 헌터협회 주요 인사들 역시 이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진행은 내 친누나가 직접 맡았다.
“헌터협회 차지후 협회장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들께선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나의 안내에 따라 우리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면서 단상에 오르는 협회장을 환영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협회장은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흘렸다.
“기분 좋은 날이라서 그런지, 날씨도 굉장히 화창하고 좋군요.”
맑은 하늘.
레이드 시대에는 저 하늘에 차원의 균열이 가득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건 일절 보이지 않았다.
협회장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카메라 너머로 지금의 이 행사를 보고 있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겁니다. 게이트도, 몬스터도. 그러니 여러분,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설령 또 다른 위협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저희 협회와 헌터들이 인류의 방패로서 여러분들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다시 찾은 이 평화의 시대를 열심히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협회장의 외침에 따라 다시 한번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뒤를 이어서.
“헌터 대표로 강태오 헌터를 모셔 보겠습니다.”
누나의 말에 따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단상 위로 향하는 계단을 디뎠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과 카메라의 시선이 같이 이동했다.
예전부터 이런 자리에 많이 서곤 했었지만.
늘 그렇듯 항상 부담스러운 자리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의 자리는 매우 특별하다.
그동안 암암리에 이어졌던 두 번째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를 선언하는 날이니까.
그래서 나도 최대한 표정을 밝게 하면서 단상 위에 올라섰다.
사실 이런 행사는 내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 나도 알고 있다.
내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은 말이 뭔지도 충분히 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곳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강태오입니다.”
먼저 짧은 인사를 끝내고.
나는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협회장님처럼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대본은 있지만, 싸그리 무시하기로 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저를 포함한 여러분들 모두, 몬스터들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당당히 알려 드립니다.”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듣고 싶어 했던 말의 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