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2차 레이드 시대 (6)
여기서 레드 드래곤 녀석이 튀어나올 줄 알았더라면, 더 강력한 아이템들을 가지고 올 걸 그랬다.
실수했다.
그렇다고 쉽게 예상할 수 있을 만한 전장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던전이겠거니 싶었는데. 갑자기 드래곤 녀석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으랴.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더라면 내가 상황을 더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이게 많이 아쉬웠다.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녀석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상대하기가 애매하네.’
한편, 내가 드래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다른 헌터들도 지원에 나서기 위해 이곳으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상대가 드래곤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저랭크 헌터들 대신 고랭크 헌터들로만 부대를 꾸려서 나를 도우려고 했다.
A랭크만 되어도 상관없다.
1차 레이드 시대였다면, 드래곤과 싸우는 데 A랭크 헌터가 토벌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면 개죽음당할 게 뻔하니 얼른 도망가라고 했을 텐데.
2차 레이드 시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MML 버프 덕분에 A랭크 헌터도 S랭크 못지않은 전투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레드 드래곤도 이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헌터들이 날 지원하기 위해 나서는 모습을 심상치 않게 받아들이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귀찮은 놈들.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돌리면서 브레스로 지원에 나선 헌터들을 요격했다.
그러나 레드 드래곤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우리 헌터들이 1차 레이드 시대를 통해서 전투력 상승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연구하며, 그만큼 많은 데이터와 경험을 쌓아 올렸다는 점을 말이다.
브레스가 뿜어져 오자, 팀 리더로 보이는 헌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방어진, 준비!”
헌터들이 각자 위치에 서서 본인들이 착용한 아이템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커다란 마나 배리어가 형성되면서 레드 드래곤이 뿜어낸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레드 드래곤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설마 자신의 공격이 나도 아닌, 일개 헌터들에게 막힐 줄은 생각도 못 한 모양인 듯했다.
MML 버프가 제대로 힘을 발휘했나 보다.
한편, 드래곤의 공격을 막아 낸 헌터들조차도 자신들의 방어 능력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뿐.
이내 이 감정은 자신감으로 전환되었다.
“돌격-!”
지시가 떨어지자,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서 레드 드래곤을 향해 덤벼들었다.
원거리 공격뿐만 아니라 근거리에서 레드 드래곤에게 공격을 가했다.
유효타를 가하진 못했지만, 레드 드래곤의 주의를 끌어 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반대로 레드 드래곤은 헌터들의 예상치 못한 협공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갑자기 레드 드래곤의 머리 위에 ‘쩌적!’ 하고 차원의 균열이 생겼다.
작은 게이트를 만들어 낸 드래곤이 그곳을 향해 크게 날갯짓을 했다.
나는 그것이 일시적인 후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추격하고 싶지만.
저 차원 너머는 미지의 영역이다. 각성 능력이 통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른 추격은 피하는 게 좋다.
이 와중에 헌터들은 자신들이 드래곤을 쫓아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리가…… 해낸 거야?”
“드래곤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다고!”
“미친! 이거, 꿈 아니지? 그렇지?”
헌터들조차 반신반의할 정도였다.
MML 버프가 확실히 효과가 있긴 한가 보다.
물론 모든 헌터들이 다 MML 버프 효과를 누릴 수는 없다.
나와 우리 헌터 아이돌 그룹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MML 버프도 누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아직도 몇몇 헌터들은 MML 버프 따위는 헌터협회가 만들어 낸 일종의 사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 또한 깨달을 것이다.
MML 버프는 실존한다고.
벌써부터 우리 음반 판매량 늘어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헌터들이 힘을 합쳐서 레드 드래곤을 쫓아내는 모습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생중계되었다.
원래 이런 영상들은 극비 사항으로 대중에게 잘 공개 안 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굉장히 특수한 편에 속했기에 특별히 예외로 두기로 했다.
어떤 점이 특수하냐.
헌터들이 드래곤을 내쫓았다는 사실에 큰 의의가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는 나 아니면 드래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헌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헌터들이 힘을 모아서 드래곤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라는 헌터의 존재감과 중요성이 떨어진 건 절대로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헌터들이 드래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MML 버프다.
내가 계속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상, 헌터들은 MML 버프의 특혜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이번 영상이 공개됨에 따라 내 중요성이 더 올라간 셈이었다.
그래서 나도 영상을 공개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하라고 찬성했던 거였다.
대중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러나 협회는 사람들처럼 마냥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일 났네.”
협회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미국에서 열린 게이트들을 전부 없애고 난 이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렇게 협회장과 같이 집이 아닌 협회로 오게 되었다.
긴급회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협회장이 방금처럼 걱정을 토로한 이유가 있었다.
“그 빨간 도마뱀 녀석은 머리가 상당히 뛰어납니다. 함정을 파기도 하고. 일부러 저희를 각개격파 하기 위해서 미국에 다수의 게이트를 열기까지 했으니까요.”
내 말에 협회장의 사무실에 모인 모두가 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1차 레이드 시대의 원흉이었던 드래곤은 이런 식으로 잔머리를 굴린 적은 없었다.
그냥 자기 기분대로 아무 곳에나 게이트를 열었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우리가 하도 잘 막아 내니까 본인이 열 받아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경우에 속했다.
그러나 레드 드래곤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다시피 녀석은 잔꾀를 주로 부리는 타입이다.
자기 혼자서 다수의 헌터들을 상대하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이상.
“앞으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겠죠.”
이런 이유 때문에 협회장이 ‘일 났네.’라고 말을 했던 거였다.
기왕이면 그때 레드 드래곤의 목을 쳐 냈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그곳에 레드 드래곤이 있을 줄 몰랐기 때문에 나도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이트, 몬스터라는 게 변수가 너무 많다는 점이 항상 문제다.
우리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항상 뛰어넘는다.
어쨌든 현재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수가 있다.
마침 데이브가 그 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레드 드래곤 녀석이 차원의 틈에 숨어서 계속 게이트만 열어 대면 문제겠는데.”
소모전으로 가면 당연히 우리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레드 드래곤을 차원의 틈에서 나오게 만들어서 놈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마땅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아이디어를 모았지만, 무의미한 시간만 계속 흘러갈 뿐이다.
이때, 나빈이가 입을 열었다.
“레드 드래곤이 혹할 만한 거를 던져 주면 어떨까요?”
“먹잇감으로 유인이라도 하자는 거야?”
마치 낚시처럼.
우리가 미끼를 던지면, 녀석은 그것을 덥석 물 것이다. 입질이 왔음이 느껴지면 바로 잡아당겨서 녀석을 제거하면 된다.
말은 쉽다.
문제는 이 ‘미끼’를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이에 대해서는 나빈이도 말을 아꼈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할 만한 게 있다면 쉬울 텐데…….”
어려운 문제다.
몬스터도 잘 모르는 우리들이 드래곤의 취향에 대해 알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협회장이 짧게 두 번 손뼉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어차피 여기 모여서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일단은 다들 피곤할 테니 집에 들어가서 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쉬다 보면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그렇게 희망을 걸면서 우리들은 협회장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 * *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서 승훈이 형한테서 실시간으로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2차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형한테 보고받는 건 방송 스케줄 정도가 다였는데.
이렇게 레이드, 몬스터에 관련된 정보를 건네받으니까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아직도 평화의 시대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뭐랄까, 너무 갑작스럽게 2차 레이드 시대가 열려서 그런지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은 해야겠지.’
그게 우리 헌터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
씻고 난 다음에 거실 소파에 누워서 TV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국에서 헌터들이 드래곤을 내쫓는 영상이 아직도 각종 채널의 뉴스를 통해서 송출되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 저 모습을 보고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야.’
생각해 보니까 1차 레이드 시대의 원흉이 되었던 그 드래곤 녀석도 생각보다 인류 정복의 시기가 계속 지연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결국 모습을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나와 드래곤의 매치가 성사되었고. 다들 알다시피 이 일을 통해서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쟁취할 수 있게 되었다.
레드 드래곤은 그 드래곤과 성향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센 성격들이라는 건 공통되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이 점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같은 방법은 안 통할 것이다.
이미 레드 드래곤도 이런 식의 도발로 자신의 동족이 죽었음을 인지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머리도 좋은 녀석이라서 어쭙잖은 도발 작전은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녀석을 유인하기 위해선 좀 더 고단수의 작전이 필요하다.
놈이 원하는 게 뭔지부터 먼저 생각해야 한다.
‘뻔하지, 뭐.’
사실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기도 했다.
드래곤들의 목적은 차원을 소멸하고 통합시키는 형태로 숫자를 줄여서 자신들의 통제 범위에 각 차원을 가둬 두려고 하는 거였으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 인류보다 약한 차원의 세계가 있었을 테고. 반대로 더 강한 곳도 있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드래곤들이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하는 걸까?
‘힘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정복을 시도했을지도 모르지.’
순간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레드 드래곤이 나를 찾아왔던 이유.
그리고 나에게 항복을 권유한 건에 대해서 괜찮은 작전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승훈이 형,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봐.”
승훈이 형에게 방금 떠올린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때? 먹힐 거 같아?”
한동안 말이 없던 승훈이 형이 겨우 입을 열며 답했다.
-이거, 협회장님한테 말해 보자.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