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2차 레이드 시대 (1)
인류에게 항복을 권했던 여자.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 걸리는 게 있었다.
간밤에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모두 접한 이철민 소장이 마침 내가 신경 쓰는 것을 직접 언급했다.
“그럼 그 여자…… 아니, 그 드래곤은 왜 태오 씨가 저번에 쓰러뜨렸던 드래곤과 싸울 때, 싸움에 가세하지 않았던 걸까요? 태오 씨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 드래곤이 한 마리였을 때보다 두 마리였을 때가 그쪽이 더 승산이 있었을 텐데.”
이철민 소장의 말이 맞다.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뒤, 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말을 여러 차례 한 적 있었다.
1차 레이드 시대가 열린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투를 펼쳤던 몬스터 중에서 드래곤이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였다고.
놈과 싸우는데 상당히 버겁다는 느낌을 여러 차례 받은 적 있었다.
아니, 그 단계를 넘어서.
어쩌면 녀석에게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솔직히 없진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승자는 나와 인류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의 강함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다.
녀석은 강했다.
확실하게.
그래서 이철민 소장의 말이 한편으로는 공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2 대 1.
수적 우위를 앞세웠더라면.
어쩌면 그날의 승자는 내가 아니라 몬스터들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내가 들려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모르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모른다.
드래곤들은 인간 이상으로 머리가 좋은 존재다. 나라는 헌터가 있으니까, 혼자서 상대하면 안 될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둘이 아니라 혼자서 나에게 덤볐다.
왜 그랬을까?
‘어제 한번 물어볼 걸 그랬나?’
물론 내가 물어본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긴 하다.
협회장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드래곤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방법이 없으니까. 만약에 그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놈들이 게이트를 열어젖히면서 우리들을 위협하는 이유 같은 것도 진작 알았을 테고.”
협회장 말이 맞다.
드래곤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우리가 굳이 알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건 결과다.
드래곤 한 마리가 아직 살아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녀석이 다시 레이드 시대의 포문을 열면서 우리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런 논쟁은 무의미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냥 싸우면 된다.
싸워서 이긴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 * *
내가 그 여성이 드래곤의 모습이었을 때를 서술하자. 그 외형을 토대로 녀석에겐 ‘레드 드래곤’이라는 코드가 부여되었다.
언제까지 계속 ‘수수께끼의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
헌터나 다른 관계자 들이 들었을 때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우리는 레드 드래곤이라는 별칭으로 그 여자를 부르기로 했다.
물론 그 드래곤의 동의는 받지 않았다.
우리 편하자고 부르는 거기도 하고.
그리고 그 드래곤은 우리의 적이다.
굳이 호칭에 대해서 동의를 받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레드 드래곤 토벌 프로젝트.
그리고 2차 레이드 시대를 막기 위한 회의가 세계 각국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덕분에 협회장과 이철민 소장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협회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철민 소장은 왜 자기까지 같이 가야 하냐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협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레드 드래곤의 존재와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철민 소장밖에 없다고.
물론 다른 연구 직원들도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이철민 소장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이 소장 본인이 나서서 설명을 하는 게 훨씬 좋을 터.
이철민 소장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까 어쩔 수 없이 협회장과 함께 당분간 동행길에 나서기로 했다.
그 전에 이철민 소장이 다시 열린 헌터 훈련소로 향하려던 나를 잠시 연구소로 호출했다.
나에게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였다.
“태오 씨, 이거 받으세요.”
나에게 준 것은 다름 아닌 마이크였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무대에 오를 때마다 들었던 그 마이크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더 묵직하고, 디자인도 일반 마이크와 비교했을 때 남달랐다.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라고 해야 할까.
“이거, 설마…….”
“저번에 태오 씨한테 드렸던 그 마이크 아이템 있죠? 그거 업그레이드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마이크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한 기능들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철민 소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아이템을 만들어 냈다.
내가 이래서 이 소장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어떤 스킬들이 붙어 있나요?”
“원래 마이크라는 건 입가에 가까이 가져가야 소리가 증폭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마이크 아이템의 경우에는 소유자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유자가 원하는 만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옵션 스킬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 나쁘지 않은데요?”
“대신에 거리는 무제한이 아니니까, 이 점은 반드시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아예 기능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가끔 몬스터들 중에서 소리 전달을 방해하거나 교란시키는 능력을 지닌 녀석들이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그런 놈들은 가끔 MML 버프가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할 때가 있다.
전자 기기를 망가뜨리는 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이철민 소장은 이에 대한 대비책까지 완벽하게 마련해 뒀다.
“그런 것에도 면역이니까, 원하실 때 언제든지 그거 가지고 노래 부르시면 됩니다.”
“연구 많이 하셨나 보네요.”
“2차 레이드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할 일이 없어서 이것만 계속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었습니다.”
내 입장에선 아주 올바른 방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장님.”
“저야말로요. 열심히 만든 아이템이니까, 유용하게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장님이 만들어 주신 아이템은 예전부터 늘 요긴하게 잘 써먹었으니까요.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게다가 레드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철민 소장의 이런 아이템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 * *
이 소장한테서 깜짝 선물을 받은 나는 오늘의 목적지인 헌터 훈련소로 향했다.
레이드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헌터 훈련소는 제 역할을 다하고 폐업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일반인들에게 헌터들이 받았던 훈련 내용이 어떤 건지 직접 보여 주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하면서 그 용도를 점점 바꿔 가려 했었다.
하지만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 지금.
이제는 본래 자리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고설중 교관도 상당히 바빠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오 왔냐.”
“안녕하세요, 교관님. 오늘은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전부 다 일반인들은 아니었다.
나와 같은 헌터들이다.
“그 드래곤 때문이지, 뭐.”
고설중 교관이 설명하기를, 게이트 다시 열리기 시작하니까 그때 현직으로 활동했던 헌터들이 다시 훈련소로 모여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헌터들이 활약할 무대가 다시 펼쳐지게 되었으니까.
헌터들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몬스터들을 제압하고, 거기에 따른 보상들을 넉넉하게 챙겨 갈 심산으로 훈련소를 다시 찾고 있었다.
고설중 교관이 일하고 있는 이 훈련소는 헌터들 사이에서도 교육과정이 상당히 빡세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이 이곳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잘 가르치니까.
여기 헌터 출신들 대부분이 다 쟁쟁한 자들이다.
나빈이도 그렇고.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도 여기서 고설중 교관의 훈련을 받으며 헌터로서 착실하게 성장했었다.
이곳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터 훈련소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건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설중 교관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레드 드래곤이라고 했지? 그 녀석은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냐?”
“아직 마땅한 대책이 나오진 않았어요. 당분간은 좀 더 지켜보자…… 이런 분위기입니다.”
“하긴. 아는 게 없을 테니까.”
고설중 교관도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가 어떨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헌터 협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쪽에 고설중 교관과 연락이 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걸로 안다.
그중에 한 명이 나고 말이다.
덕분에 고설중 교관은 여기 훈련병들에게 때로는 소식통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듣는 게 많으니까, 그만큼 썰 풀어 줄 것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 드래곤하고 직접 만났다면서?”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어.”
간부 회의 때 말하긴 했었는데, 그게 그세 고설중 교관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누가 말해 줬는지까지는 굳이 추적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일급비밀, 이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용에 대한 건 아무리 고설중 교관이라 할지라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고설중 교관도 그걸 아는 모양인지, 우리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었는지에 대한 것까진 묻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헌터들, 지금 안에서 훈련받는 중인데, 들어와서 한번 볼래?”
“네. 훈련에 방해되지 않게 멀리서만 슬쩍 볼게요.”
“그래, 그게 좋겠지.”
한창 훈련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인데, 내가 왔다는 걸 알면 이 집중이 무조건 흐트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헌터들을 상대로 앨범을 발표하다 보니까 같은 업계인 중에서도 내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최근에 부쩍 늘게 되었다.
여기에도 그런 사람이 없다는 보장은 없다.
고설중 교관의 뒤를 따라서 몰래 훈련소 안쪽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헌터들의 기운찬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보컬 수련을 받을 때 사용했던 거대 수조의 모습도 보였다.
저 안에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들어가서 수련을 하는 헌터들도 있었다.
저 헌터들이 만약에 내가 보컬 실력을 기르기 위해 수조 안에서 고래고래 노래 부르는 연습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살짝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가서 말해 줄 생각은 없고.
그냥 혼자만의 호기심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헌터들과 같이 훈련하는 사람 중에서는 내가 아는 얼굴도 몇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나빈이었다.
나빈이는 다른 훈련병들과 다르게 내 기척을 바로 알아차리는 모습을 보였다.
“어? 선배님…….”
그녀가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외치기 직전, 내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나빈이가 내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선배님도 훈련하러 오셨어요?”
“아니, 그냥 구경하러 잠깐 들른 거야.”
훈련은 가수로 데뷔할 때 열심히 해서 그런지,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