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원흉 (6)
설득이라는 단어에 내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 여자, 우리하고 적대적 관계라는 걸 잊어버린 거 같은데.
혹시 몰라서 여자에게 미리 말했다.
“네 밑으로 얌전히 굴복해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설득이고 자시고 하는 개소리는 넣어 둬라.”
애초에 몬스터들에게 항복 선언을 할 거였으면, 1차 레이드 시대에 그 개고생을 하면서 녀석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도 마찬가지고.
여성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한번 들어 봐.”
여성이 갑자기 하늘을…… 아니, 우주를 가리켰다.
“이 우주는 너무 쓸데없이 넓다고 생각하지 않아?”
“또 이상한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야.”
여성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아까도 말했지? 세상에는 수많은 우주들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라고. 너도 알고 있지?”
그건 나도 충분히 공감한다.
레이드 시대도 마찬가지다.
설마 우리가 모르는 차원에 이런 괴물들이 서식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리고 그 괴물들이 우리가 사는 곳을 침공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각성 능력자들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이 고난의 행군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여성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내가 있던 세계 역시 너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었지. 평화롭고, 문제라고 부를 만한 게 전혀 없는 그런 세계. 그런데 어느 날, 그게 나타난 거야.”
“그게 뭐지?”
“게이트.”
“…….”
우리와 다른 문화를 지닌 인류 역시 게이트와 몬스터 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있던 세계는 멸망했지. 아주 처참하게.”
“몬스터들에게 패배한 건가?”
“뭐, 그런 셈이지. 그쪽도 너희처럼 차원의 영향을 받고 각성 능력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쪽 각성 능력자들은 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헌터들만큼 강하지 않았거든. 속된 말로 오합지졸이라고 할까.”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어쩔 수 없지. 그곳은 전쟁이라는 것도 없던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 생전에 무기 한번 안 들어 본 사람한테 난생처음 보는 몬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하면, 과연 잘 싸울 수 있겠어?”
이건 그쪽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조차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답은 ‘아니오’다.
절대로 그렇게 못 싸운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싸우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몬스터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놈들은 오로지 우리를 죽이고 점령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차원을 넘어서 온 괴물들이다.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어중간한 마음을 먹는다면, 오히려 방해 요소만 될 뿐이다.
각오와 결심.
이것만큼 강한 무기는 없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된 거지?”
“나? 우리 드래곤들은 애초부터 다중우주에 대해 알고 있었어. 여러 개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데 설마 우리가 있는 차원에 게이트가 갑자기 열리게 될 줄은 몰랐지.”
“거기도 드래곤이 게이트를 열었나?”
“그렇지. 차원에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던 드래곤이 있었거든. 근데 그 호기심이 우리가 살고 있던 세계를 멸망시켜 버린 거야.”
드래곤이 다수 있던 세계라면, 몬스터들의 침공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이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지만,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드래곤들이 시퍼렇게 눈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곳 세계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말이야.”
“…….”
나는 긍정을 뜻하는 말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암묵적으로 궁금하다는 뜻을 드러냈다.
여성이 말 안 해 줘도 딱히 상관은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궁금증을 슬쩍 내비쳤는데, 의외로 여성은 순순히 대답해 줬다.
“깨달은 게 있거든.”
“뭐를 깨달았다는 거지?”
“이 세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 동족들은 생각한 거야. 이 불안 요소를 우리의 손 아래에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하고.”
“스스로 신이 될 생각이라도 한 건가?”
“비슷하지.”
여성은 오히려 긍정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가 있던 세계가 멸망하도록 놔뒀어.”
“왜 놔뒀지? 오히려 구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아까도 말했지, 불안 요소가 다수 존재하는 이 무수한 차원 세계를 우리의 통제 구역 내로 재정립하고 싶다고. 사실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어.”
여성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미소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여성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내용은 저 미소보다도 더욱 소름이 끼쳤다.
“통제가 불가능할 것 같은 차원들을 다 소멸시켜 버리고 우리가 관할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차원만 남겨 두면, 아까 말했던 ‘통제가 가능한 구조’가 완성되는 셈이니까.”
“그래서 일부러 게이트를 열고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세계들을 멸망시키고 있는 거냐?”
“응.”
여성의 대답이 너무 간결하고 짧아서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자신들이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게이트와 몬스터 들을 통해 차원 자체를 소멸시키려고 하다니.
“네가 죽인 내 동족 역시 우리의 뜻에 찬성하고 같이 움직이던 존재였어. 갑자기 인간 헌터에게 제압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지 넌 아마 모를 거야.”
“알고 싶지도 않아.”
“뭐, 그래. 싫으면 굳이 안 해도 되니까. 너희 인간들은 그렇잖아. 안 그래?”
여성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투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개의 차원들을 소멸시켜 오고 있었어. 이 세계 역시 소멸 대상 중 하나였지. 그런데 여기서 큰 차질이 생기게 될 줄은 몰랐어.”
그 차질을 일으킨 변수의 정체는 아마 나일 것이다.
“각성 능력자는 차원의 영향을 받고 비정상적인 힘을 가진 자들을 일컫는 말이야. 너희는 아마 몰랐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규정하고 있어.”
이철민 소장이 아주 기뻐할 만한 내용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이 소장은 어떻게 각성 능력자가 생겨나는지, 그 원리를 모르겠다면서 괴로워했었다.
그런데 이 궁금증을 여성이 말끔하게 해결해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좋은 현상이긴 하다. 나도 마침 각성 능력에 대해 궁금해하던 찰나였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냥저냥 한 헌터들만 있었는데. 여기, 지구라고 했나? 지구는 확실히 다르네. 너 같은 이래귤러가 탄생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각성 능력자가 되었을 때에도 놀랐는데, 그 능력이 다른 각성 능력자들을 훨씬 웃돈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성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검을 똑바로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아까 너한테 말했지? 너를 설득하러 왔다고.”
“그 설득 내용이 앞에서 말한 것하고 연결되나?”
“그렇지.”
여성이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후에 내가 살고 있는 지구를 가리켰다.
“너희 인류의 생존권을 보장해 줄게.”
“생존권?”
“내가 아까 말했지? 우리가 관리 가능한 몇 개의 차원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소멸시킬 거라고. 그 ‘관리 가능한 차원’에 너희의 세계가 포함될 수 있도록 내가 열심히 힘을 써 주겠다, 이 말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알아서 기라는 뜻이군.”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자신들은 신적인 존재가 될 테니까, 살고 싶으면 자진해서 고개를 숙이라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여성은 크나큰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그런 건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표현하는 거다. 도마뱀 녀석아.”
“…….”
도마뱀이라는 말에 여성의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아까는 멀쩡한 척했지만, 이 발언이 드래곤들의 자존심을 굉장히 크게 갉아먹는 표현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했던 이전 드래곤도 눈앞의 여성처럼 도마뱀이라고 놀림을 받으니까 불편한 기색을 많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자를 향해 검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이거나 드시지.”
여성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좋을 텐데. 미리 말해 두지만, 난 네가 쓰러뜨렸던 내 종족과는 다르거든.”
“확실히 달라 보이긴 하네. 더 웃긴 말을 자주 한다고 해야 할까. 어디 코미디언 시험이라도 보고 왔나 봐?”
내 비아냥거림이 계속 이어질수록 여성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결국은 드래곤도 우리와 같은 생명체다.
생각할 줄 아는 고등 존재이기에 도발이 먹혀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이 내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 말을 한 거, 후회할 텐데.”
“절대로 안 할 거다. 어차피 네 녀석들 밑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게 죽은 거지, 사는 거라고 볼 수 있겠냐?”
놈들은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이건 신이 아니라 독재자의 방식이다.
난 여기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끝까지 싸우는 걸 택하겠다.”
여성이 내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 없지?”
“어.”
“그래, 좋아.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야.”
여성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처음 만났던 장소, 내 집 마당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한번 해보자고. 누가 죽나.”
여성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전포고를 마친 채 나는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체감으로 따지면 시간이 그렇게까지 오래 흐른 거 같진 않았는데.
벌써 동이 트는 시간대가 되어 있었다.
“우주여행이라는 거, 듣던 대로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나 보구나.”
못 잤던 잠이나 청하러 들어가기로 했다.
* * *
실컷 잠을 잔 이후에 나는 다시 헌터협회를 찾았다.
협회장과 이철민 소장, 그리고 데이브한테 어제 여자를 만났던 일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철민 소장은 입을 쩍 벌리고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유지했다.
물론 협회장이나 데이브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데이브가 확인차 내게 물었다.
“방금 한 말들…… 전부 다 사실이냐?”
“어, 사실이야.”
“설마 자다가 그런 꿈을 꿨다, 같은 얼토당토않은 농담은 아니겠지?”
“나도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더라고.”
꿈과 현실을 구분 못 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니까.
어쨌든 우리는 드래곤의…… 아니, 드래곤들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놈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낸 이상.
“저희도 대처를 해야겠죠.”
드래곤과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