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원흉 (5)
각자 다른 레이드 시대의 포문을 연 드래곤 두 녀석들이 서로 별개의 차원에서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이철민 소장.
솔직히 아예 뜬금없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철민 소장이 확보한 물증이 있으니까.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증거가 더 큰 신뢰를 부여할 때가 있다.
특히나 인류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게이트, 몬스터, 아이템이라는 분야에서는 이런 법칙이 더더욱 강하게 적용된다.
“이건 협회장님도 알고 계십니까?”
“네. 아까 회의 시작하기 전에 보고드렸습니다.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릴 생각입니다만, 혹시 몰라서 태오 씨한테만 특별히 먼저 알려 드리기로 했습니다.”
“협회장님이 지시하신 건가요?”
“아니요. 제가 먼저 생각한 겁니다. 참고로 협회장님도 동의하셨으니까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연기하고 다니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예전에 이철민 소장하고 몰래 꿍꿍이를 꾸몄던 경험이 있던 터라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협회장님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면 안심이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정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장님.”
“천만에요. 그리고 이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가로 알아내는 정보가 있으면 태오 씨한테도 같이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심 우리 쪽에 이철민 소장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 소장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1차 레이드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철민 소장 같은 연구진이 우리들을 적극적으로 서포트해 준 덕분에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레이드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었던 거니까.
물론 지금은 다시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 탓에 그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크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문이 열려 있다고 한다면.
‘다시 닫으면 그만이니까.’
이제 이 열린 문을 어떻게 하면 도로 닫을 수 있을지.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 * *
세 번째 게이트 사건은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낸 사건이 되었으니까.
각종 언론에서도 이번에 벌어진 참극에 대해 발 빠르게 전하고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고, 동시에 비상사태가 선언되었다.
각 나라에서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세 번의 게이트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승훈이 형에게 따로 연락을 취했다.
-어, 태오야.
“누나는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 아송 씨는 씩씩한 여자니까 금방 기운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나도 알긴 하는데…….”
이번 사건은 누나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 대미지가 꽤나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지인들이 다수 죽었는데, 멀쩡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헌터들도 몬스터와 싸우다가 동료가 죽으면 눈이 돌아가는데, 일반인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우리 누나는 승훈이 형이 말했던 것처럼 잘 참아 내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다.
이번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서 나와 크게 접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연예인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분명 나하고 어디선가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던 스태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방송계에서도 같은 업계에서 벌어진 참극을 위로하기 위해 한동안 예능 프로그램 송출을 금지하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야 레이드 시대가 다시 시작되면서 당분간은 연예계 활동을 이어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탓에 큰 타격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을 리는 없었다.
가장 빠른 문제 해결 방법은 역시.
‘그 여자를 잡아내는 일인데.’
아직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드래곤이니까. 게이트도 열고 다닐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녀석이 인간의 수사망에 쉽게 포착될 리 없다.
‘모르겠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만 손해다.
지금은 일단 쉬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게 훨씬 좋아 보인다.
계속해서 같은 뉴스만 반복해서 재생되는 TV 화면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누웠다.
눕고 나니까 그나마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잠기운이 산들바람처럼 솔솔 불어와서 나를 감싸는 듯했다.
그러나.
도중에 뭔가를 눈치챈 나는 감으려던 눈을 다시 번쩍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굳게 닫힌 창문을 바라봤다.
불어올 리 없는 바람이 분 셈이었다.
“…….”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방에 보관되어 있던 검 아이템 하나가 날아들어 내 손에 안착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천천히 검을 빼 들고서 내 앞에 서 있는 한 여성에게 겨눴다.
그러나 여성은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강태오.”
바로 어제, 방송국 참극을 일으킨 원흉이 내 눈앞에 직접 모습을 나타냈다.
* * *
나는 여자가 우리와 술래잡기를 하듯 도망치면서 게이트를 열고 다닐 줄 알았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혼란을 주며,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기 작전을 계속해서 취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직접적인 대결은 당분간 없을 거라고 보고 있었는데.
설마 여성이 이렇게 대놓고 내 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성의 오른손에 여러 갈래의 마나 줄기가 바람처럼 동그랗게 맺혔다.
“눈치채나 싶었는데, 역시나 바로 알아차렸구나? 인간치고는 감이 좋네. 칭찬해 줄게.”
“니가 뭔데 나를 칭찬해 주고 말고 그런 걸 결정하냐. 어?”
“하긴, 듣고 보니까 그 말도 맞네.”
여성은 의외로 순순히 내 말을 인정했다.
그러나 내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인정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 어떤 생각이 강하게 드냐면.
여자는 마치 나하고 가벼운 말장난이나 하러 온 사람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여자에게 물었다.
“내가 네 동료 쓰러뜨린 거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고 온 거냐?”
복수라는 말에 여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드래곤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알 리가 있겠냐.”
이전에 드래곤을 쓰러뜨릴 때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어차피 서로 싸워야 하는 운명인데, 굳이 구구절절 대화를 나눌 필요가 뭐가 있을까.
이건 눈앞에 깜짝 등장한 여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먼저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주변 풍경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바뀌어 가는 풍경으로 인해 나는 공격을 가하는 대신 주변 상황부터 먼저 살피기로 했다.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은 고층 빌딩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여성…… 아니지, 드래곤은 나를 보면서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안 놀라네? 갑자기 공간이 바뀌어서 놀랄 줄 알았는데.”
게이트를 열고 차원 속에서 몬스터들을 소환하는 녀석이니 순식간에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바꾼다고 해도 굳이 놀랄 만한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순간 이동이라는 건 헌터들도 구사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는 마법이다.
그걸 드래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구현해 냈다.
심지어 본인만 순간 이동을 하는 게 아니라 나까지도 같이했다.
이런 수준의 마법 능력을 지닌 사람은 내가 알기론 헌터들 중에선 아무도 없다.
최고 랭크를 지닌 나조차도 이건 불가능하다.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인가 보네.’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드래곤이 웃으면서 말했다.
“드래곤을 이렇게 대면했던 존재들 중에서 유일하게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건 강태오, 네가 유일할 거다.”
“내가 왜 거대 도마뱀 녀석들 때문에 겁을 먹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드래곤을 도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놈들을 얕잡아 보는 언어 표현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드래곤은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일절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에 웃을 뿐이었다.
저 반응이 더 열 받는다.
그러나 저런 거 하나하나가 내 판단 능력을 흐리게 만들기 위한 장치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멘탈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드래곤도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는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확실히 내가 만나 본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 강한 전투력을 지닌 데다 멘탈도 남다르고. 하긴, 이러니까 내 동족이 인간 따위한테 죽임을 당한 것이겠지.”
“너도 네 동족 따라서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는데.”
검을 겨누면서 녀석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날렸다.
그럼에도 여자는 짙은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뭐, 오늘은 너하고 싸우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까. 일단 내 이야기나 좀 들어 보는 게 어때?”
“그럴 가치가 있냐?”
“그건 듣고 난 다음의 너한테 스스로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여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주변의 환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내 눈에 익숙한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주변에 짙게 깔린 어둠.
그리고 가까이서 보이는 행성, 지구.
놀랍게도 나는 지금, 달 표면 위에 서 있었다.
우주에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주라는 환경은 물속과 다르다.
물에 들어온 것처럼 단순히 숨 참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 우주 공간이라고 해도, 지금 네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심지어 숨도 쉬어졌다.
어떤 원리로 이런 게 가능한지 굳이 묻고 싶진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단순히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일부러 이곳으로 장소를 옮긴 건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렇지.”
여자가 갑자기 뒷짐을 지더니, 좌우로 번갈아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서 나한테 대뜸 물었다.
“넌 세상에 몇 개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그거 물어보려고 일부러 자려고 하던 사람 깨워서 여기 달까지 데려온 거냐.”
“내 질문에 대답 먼저 해 줬으면 좋겠는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다.”
알 생각도 없고 말이다.
여성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답.”
“뭐?”
“정답이라고. 사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그 차원끼리 서로 융합되고 소멸되고. 그 과정에서 다시 새로운 차원이 형성되고. 이런 일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이철민 소장에 낮에 말했던 다중우주론과 비슷했다.
이 소장이야 내 의도를 돕기 위해 그랬다 치더라도.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
여자의 목적이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짧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너를 설득해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