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224화 (224/250)

제58장. 휴식 (3)

오랜만에 누나와 함께 찾은 바닷가.

뻥 뚫린 파란색들의 향연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누나와 이렇게 여행을 다녀 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우리 어렸을 때 다른 친구들 여행 다니고 그런다는 이야기 들으면 막 시무룩해하고 그랬잖아.”

누나도 나한테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충실하게 10대, 20대를 보내는 친구들을 보면서 많이 부러워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말이다.

누나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그때 못 놀았다는 거에 대한 후회는 없어?”

누나는 이런 내 질문에 짧게 답했다.

“응, 없어.”

“정말로?”

“어.”

“왜?”

“왜긴, 그날의 기억과 경험이 있기에 지금의 너와 내가 있는 거잖아. 누가 그러더라. 성공은 누구에게나 함부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고. 거기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치른 자들만이 거머쥘 수 있는 보상이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헌터로서, 연예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역시 과거의 내가 죽도록 고생한 덕분이다.

그때의 내가 없었더라면, 누나의 말마따나 지금 이렇게 가벼운 기분으로 여행 올 날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공감이 가는 말이네.”

“그렇지?”

누나가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흐트러지는 긴 머리카락들 사이로.

간간이 새치가 보였다.

“누나도 흰머리가 다 나네.”

“이제 나도 30대니까. 적은 나이는 아니지.”

“그렇다고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뭐. 30대면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는 선배님들도 계실 정도니까. 물론 20대만큼의 기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지.”

누나가 가장 잘하는 것.

바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처럼 치열하게 살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도 안정적인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함께하는.

마음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누나에게 필요하다.

“누나는 승훈이 형, 아직도 좋아해?”

“…….”

누나가 말을 아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봐도 누나에게 충분한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누나는 승훈이 형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 형, 겉으로는 엄청 활발하고 저돌적일 것처럼 보여도 세심한 면이 굉장히 많거든. 그리고 의외로 수줍음도 많고.”

“그래?”

“어, 승훈이 형이 왜 헌터 생활을 관두고 은퇴했는지, 누나는 알고 있어?”

“글쎄. 그 이야기까지는 못 들었는데.”

승훈이 형은 몬스터와의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고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깨어났다.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순 있었지만, 큰 부상으로 인해 한동안은 전투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재활 치료를 한 덕분에 지금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까지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다시 헌터로서 활동할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한 건 아니었다.

각성 능력을 사용하려면, 이에 따른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을 담아내려면 그만한 크기의 그릇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그릇에 균열이 생긴다면, 혹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이라면.

더 이상 그릇으로서의 이용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승훈이 형이 딱 이런 상황이었다.

본인은 아직 싸울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나나 헌터협회 측에서 봤을 때에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훈이 형은 현직에서 물러나 헌터들의 매니저 역할을 소화하며 서포트 포지션을 유지하게 되었다.

승훈이 형이 실력이 부족해서 몬스터와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을까?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승훈이 형은 당시 몬스터들과의 전투 속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치명상을 입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의 후배들 때문이었다.

“승훈이 형이 크게 부상당했던 날, 그때 훈련소 과정을 막 마치고 현장으로 투입된 새내기들이 몇 명 있었거든. 그런데 이제 막 훈련소를 나온 새내기들이 뭘 알겠어. 당연히 모르는 것투성이지. 그러다가 중간에 몬스터들한테 죽을 뻔한 위기에 놓이게 된 거야.”

그때 그들을 구해 줬던 사람이 바로 승훈이 형이었다.

승훈이 형이 없었더라면, 그때의 새내기들은 지금쯤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크게 다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서 후배들을 구해 낸 승훈이 형.

대신에 형은 헌터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전부 날려 먹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은 후회 안 한다고 하더라. 그날 새내기 헌터들 구한 것에 대해서 말이야.”

레이드 시대에 몬스터와 싸운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뜻과도 같다.

아무리 새내기 헌터라곤 하지만, 그래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대다수의 헌터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승훈이 형은 마음씨가 워낙 따뜻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몸을 내던지면서까지 얼굴도 모르는 헌터들을 구했다.

나에게는 굉장히 아쉬운 일이었다.

승훈이 형하고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승훈이 형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나도 이에 대해 더 이상은 말 안 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누나한테 이 이야기를 꺼내 보는 거였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어.”

“승훈이 형이 자기 이야기는 사람들한테 잘 안 하는 편이니까.”

게다가 뭐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기가 현장 일을 내려놓게 된 안 좋은 에피소드인데, 이걸 먼저 말할 리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누나는 생각이 많아진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딱히 승훈이 형을 어필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누나가 승훈이 형을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승훈이 형이 어떤 사람인지, 누나에게 어떻게든 알려 주고 싶었다.

“나중에 형한테 내가 이 이야기 해 줬다는 건 비밀로 해 줘. 알았지?”

“걱정하지 마.”

누나가 마치 뭔가 결심을 굳힌 듯 대답했다.

내가 오늘 들려준 이 이야기가 두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끼칠지.

약간 궁금해졌다.

* * *

이 변화는 생각보다 이른 시일 내에 벌어지게 되었다.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승훈이 형과 내 집에서 술 한잔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내 집을 방문한 승훈이 형이 뭔가 굉장히 들뜬 모습으로 여기저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하는 사람처럼.

“왜 그래, 형. 정신 사납게.”

“어? 어, 미안. 내가 너무 왔다 갔다 했나.”

소파에 앉은 뒤에도 승훈이 형의 멍 때리는 듯한 표정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승훈이 형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왜, 좋아하는 여자한테 퇴짜라도 맞았어?”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반대?”

“아송 씨가…… 나한테 할 이야기 있다고, 오늘 저녁에 시간 비워 두라고 하셨어.”

“형, 저녁은 지금이잖아. 그리고 저녁에 나하고 술 한잔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술은 다음에 마시면 되지.”

이 형이.

우리 누나한테 아무리 푹 빠져 있다고 해도 그렇지, 미래에 처남 될 사람을 벌써부터 이렇게 모질게 대하다니.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긍정적인 소식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긴 하다.

아무래도 누나가 내 이야기를 듣고 먼저 고백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모양인가 보다.

승훈이 형이 고백해도 될 일이긴 했지만, 마땅한 계기가 없고. 그리고 승훈이 형은 연애 쪽으론 완전 젬병이기 때문에 이 형한테 오롯이 주도권을 넘기려고 하면 큰일이다.

오히려 형한테는 적극적인 여자가 더 잘 어울릴 수도 있다.

마침 우리 누나는 굉장히 적극적이다.

물론 업무에 한해서지만, 남녀 관계도 본인이 마음을 먹는다면 아나운서 강아송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처럼 적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봤었다.

이런 내 예상이 오늘, 과연 적중할지 어떨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술은 다음에 마시겠다고 말하는 승훈이 형을 향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가볍게만 먹고, 바로 누나 있는 쪽으로 넘어가.”

“고맙다, 태오야. 이 빚은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안 갚아도 되니까, 가서 우리 누나한테 잘 보이고 와. 형, 나 알지? 누나 일이라면 눈 뒤집어지는 거.”

“알아. 걱정하지 마. 너한테 아송 씨가 소중한 가족인 것처럼, 나한테도 아송 씨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형의 호언장담을 접한 나는 피식 웃었다.

* * *

휴식을 마치고 이제 다시 본격적인 앨범 작업에 돌입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숙소로 이사를 하기 전, 나는 승훈이 형한테서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아송 씨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하더라.”

“그래?”

“어. 처음에 그 말 듣고 꿈인 줄 알고 허벅지를 몇 번이나 꼬집어 봤는지 아냐? 너무 꼬집어서 마치 부은 것처럼 피부가 막 빨갛게 올라오더라. 보여 줄까?”

“아니, 됐어. 여기까지 와서 굳이 내 눈을 테러할 이유가 없잖아.”

승훈이 형이 멋쩍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형은 뭐라고 대답했는데?”

“나? 뻔하잖아. 아송 씨가 먼저 속마음을 보여 주셨는데. 나도 남자로서 당연히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지.”

“그러면 서로 사귀기로 한 거네?”

“사귄다…… 그, 그렇지.”

아직 내 누나와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인지, 승훈이 형이 약간 말을 더듬었다.

“축하해, 형.”

“고맙다. 내가 아송 씨한테 정말 잘해 줄게. 그러니까 너는 걱정할 필요 없어.”

“나야 형이 우리 누나한테 좋은 남자가 되어 줄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그거 말고 걱정되는 건 따로 있어.”

“뭔데?”

“우리 누나가 유명인이잖아. 형이랑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자들 통해서 기사로 나갈지도 모르는데. 그거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스캔들.

나나 내 누나처럼 방송 쪽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 애인이 생기게 될 경우에는 무조건 거치게 되는 필수 관문이기도 하다.

이 스캔들을 인정하는 커플도 있고.

처음에는 부인했다가 나중에 가서야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향은 여러 가지다.

대신에 나는 누나하고 승훈이 형이 심사숙고해서 둘 다 원하는 방향대로 사람들에게 열애 사실을 공개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승훈이 형이 내게 들려준 말도 이와 비슷했다.

“스캔들 터지기 전까지는 굳이 우리가 먼저 밝히지 않는 쪽으로 가다가, 나중에 기사가 나가면 그때 사귀는 거 맞다고 인정하고 공개 연애로 전환하기로 했어.”

공개 연애라.

누나다운 판단이다.

두 사람이 결정한 일이니까.

연애라는 것은 원래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들 간의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잘되기를 바라는 응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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