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웨딩 라이프 (1)
아이리스와의 웨딩 라이프 촬영이 있는 첫날.
요즘 방송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어제는 의외로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이리스와 가상 부부 콘셉트로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긴장돼서 잠이 잘 안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꿀잠을 자서 나도 좀 놀랐다.
‘뭐, 잠 잘 잔 거면 좋은 현상이니까.’
무슨 일을 하든 잘 먹고 잘 자는 게 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에너지가 보충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승훈이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들이 1박 2일 동안 같이 지낼 가상의 신혼집으로 향했다.
사전에 한번 잠깐 들를까 했었는데.
시간이 영 나질 않아서 오늘 처음으로 녹화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이야?”
“어, 그렇다더라.”
승훈이 형한테 가상의 신혼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와중에 나는 단독주택이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단독주택이라.
“제작진이 돈 좀 썼나 보네.”
“그럴 수밖에 없지. 출연진이 무려 너하고 아이리스잖아. 그러면 그쪽에서 돈 쓰기 싫어도 무조건 쓰려고 하겠지. 그래야 시청률이 잘 나올 테니까. 안 그래?”
승훈이 형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하고 아이리스가 웨딩 라이프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뉴스를 통해 나간 순간, 사람들의 기대는 어마어마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벌써부터 우리 두 사람이 나오는 웨딩 라이프 편이 기대된다는 의견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말이다.
오늘 녹화가 끝난다고 바로 방송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보통은 2~3주 뒤에 나가는 거였나.
“아, 그렇지. 너희들이 출연하는 편은 특별 편으로 해서 3주 동안 방영될 거래.”
“3주? 2주 아니었어?”
내가 모니터링을 했을 때에는 한 커플당 2주간의 방송 분량이 나가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3주라니.
생각지도 못한 기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승훈이 형이 이런 내 반응을 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슬쩍 흘려 줬다.
“나도 처음에 3주라는 이야기 들었을 때 지금의 너처럼 똑같이 반응했었는데.”
“제작진이 거짓말한 건 아니지?”
“그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하겠냐. 그만큼 너희 커플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다는 뜻이겠지.”
그 정도까지 준비를 할 줄은 몰랐다.
뭐, 제작진이 많이 신경 써 준다는데, 당연히 출연하는 내 입장에서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나쁜 소식은 아니니까 말이다.
“근데 촬영 기간이 1박 2일밖에 안 되는데, 3주나 내보낼 수 있는 분량이 나오긴 할까?”
“글쎄. 만약 중간에 몬스터들이라도 나와 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에이, 설마.”
저번에 나왔던 크라겔도 거의 반년 만에 출몰한 경우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갑자기 타이밍 좋게 몬스터가 나온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뭐.
불가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제작진이 준비했다던 가상의 신혼집부터 먼저 살폈다.
화이트 컬러로 꾸며진 단독주택의 외관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좋은데?”
승훈이 형한테 한 말이었는데.
근처에 있었던 PD가 대신 내 말을 받아 줬다.
“저희가 이곳 찾아내려고 서울 전체를 거의 들쑤시다시피 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어떻습니까?”
“굉장히 마음에 드네요. 이 정도면 시청자들도 좋아하겠는데요?”
“그렇죠? 여기 집 빌리는 데도 꽤 힘들었습니다. 집주인이 좀 완고한 사람이라서 쉽게 안 넘어오더라고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배려심이 넘치는 건 아니니까.
PD의 고충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아이리스 양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니까. 그전에 먼저 태오 씨한테 촬영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예. 부족한 게 있다면 제가 나중에 아이리스한테 대신 알려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집으로 들어가시죠. 아, 그 전에…….”
PD가 마당 입구 쪽을 가리켰다.
“저기 들어가는 입구에 거치 카메라가 두 대 설치되어 있습니다. 카메라를 특별히 의식하실 필요는 없긴 한데, 그래도 위치 정도는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집 안에도 있죠?”
“네. 화장실에도 설치되어 있긴 한데, 저희 스태프가 나중에 태오 씨하고 아이리스 양한테 카메라 어떻게 끄는지 방법을 알려 드릴 테니까, 중요한 볼일을 볼 때 그거 보고 끄시면 됩니다.”
“다시 켰을 때 이게 작동하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있나요?”
“그것도 나중에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확인을 했는데도 불안하다 싶으면, 언제든 저희 스태프한테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근처에 스태프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잠깐 촬영 끊고 카메라 정비하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1박 2일 동안 이곳에서 지내는 사이, 스태프들은 여기 길 건너편에 있는 빌라 하나를 빌려서 같이 근처에서 투숙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뭐.
‘거의 영화 촬영급이네.’
하나부터 열까지 굉장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PD가 우리들에게 기대를 많이 걸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의 부담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 정도는 뭐, 적당하지.’
이런 부담감이 있어야 방송을 하는 우리들 입장에서도 바짝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PD와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어디에 어떤 카메라들이 있는지 전부 정보를 공유받았다.
“참고로 두 분 방은 2층에 있습니다. 1층은 거실하고 창고, 드레스룸하고 헬스룸이 있고요. 2층은 거주 공간 전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헬스 공간이 따로 있나요?”
“네. 저희가 임의로 만들어 뒀습니다. 두 분 다 운동하시는 걸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홈트레이닝도 그렇고요.”
미팅 때에는 그런 걸 말해 준 기억이 없는데.
우리에 대한 정보 조사를 제대로 한 모양인가 보다.
그렇게 PD한테 이것저것 설명을 듣는 사이, 밖에 차량 한 대가 도착한 소리가 들렸다.
“왔나 보군요.”
“네? 뭐가요?”
PD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모양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내게 무슨 말인지를 물었다.
나는 헌터라서 일반인들과는 다른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집 안에 있을 때 듣지 못하는 소리들도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어 보니까…… 아이리스가 왔나 보네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태프 중 한 명이 우리가 있는 집으로 들어오면서 PD에게 보고했다.
“PD님, 아이리스 양 오셨습니다.”
“진짜? 정확하시네요, 태오 씨.”
“이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죠.”
허세가 아니라 진짜다.
언제 어디에 몬스터들이 있는지 위치를 바로 파악해야 우리가 바로 반격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빠! 언제 오셨어요?”
“한 30분 전에? 마침 잘됐네. 너도 와서 같이 PD님한테 설명 들어.”
같은 설명을 두 번 반복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중간이나마 같이 합류해서 들으라고 권유했다.
못 들은 앞부분은 아까 PD한테 말해 준 것처럼 내가 아이리스에게 알려 주면 되니까.
* * *
그렇게 모든 설명을 전해 들은 우리들은 곧장 녹화에 들어갔다.
먼저 가상의 신혼집에 입주하는 것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와서 캐리어를 끌고 저 멀리서 집으로 다가오는 장면부터 찍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내가 등장하기로 했다.
마치 가상의 신혼집을 처음 본 것처럼, 나는 크게 놀라는 리액션을 취했다.
방송은 전부 대본이고 연출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물론 방송에서 보여지는 모든 일들이 다 인위적인 연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간혹 예능신이 강림이라도 한 것처럼 진짜로 재미있는 장면이 알아서 연출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연출이 많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뒤이어 아이리스가 캐리어를 끌고서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도 방금 전에 나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 처음 조우한 것처럼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빠!”
내 캐리어를 주택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세워 놓은 뒤에 아이리스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대신 캐리어를 들어 줬다.
그러자 아이리스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오빠. 매너 있으시네요.”
“이 정도야 뭐.”
사실 아이리스에게 이런 호의는 필요가 없다.
헌터니까.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힘이 좋다.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극강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가상의 부부 생활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바라고 좋아할 만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센스를 발휘했다.
아이리스도 좋아하는 걸로 봐서는, 역시 내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머, 여기가 앞으로 우리가 지내게 될 곳이에요?”
“어, 그런가 봐.”
“너무 예뻐요! 오빠, 저기 마당에 꽃밭 보세요! 꽃들도 예쁘지 않아요?”
아이리스가 헌터 일을 했었지만, 20대 또래의 여자들처럼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데이브의 증언에 따르자면, 아이리스의 방에 귀여운 인형들이 가득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었다.
이렇게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든다.
아이리스가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뜻이 아니라.
여동생 같은 이 아이가 어떻게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으니까. 옛날의 안 좋았던 기억은 이제 슬슬 잊는 게 좋다.
비록 오늘은 촬영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멋지게 꾸며진 집에서 1박 2일 동안 재미있게 즐기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암울했던 시절의 기억은 잠시 주머니 속에 넣어 두기로 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1층과 2층이 연결되어 있는 뻥 뚫린 공간이 우리를 맞이했다.
탁 트인 전경을 보자마자 스트레스가 벌써부터 풀리는 기분이었다.
‘방송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드네.’
아는 지인하고 같이 어디 가까운 펜션으로 놀러 온 기분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지인이 같은 그룹 동료의 여동생이라는 것 정도일까.’
실제로 그랬다면 많은 문젯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방송이니까.
카메라가 있으면 어떻게든 합법이 된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카메라들이 동선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한 대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대의 카메라가 그러니까 확실히 누군가가 우리들의 사생활을 지켜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긴 했다.
‘관찰 예능 같은 거, 예전에 어떻게 찍었나 모르겠네.’
내가 이런 방송 프로그램 촬영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 걸까.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짐도 다 풀고 나서 우리 둘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정하기로 했다.
“점심부터 먹어야죠. 제가 요리해 드릴 테니까, 같이 장 보러 가요, 오빠.”
“그럴까?”
스태프가 이 근처에 있는 마트, 공원, 그리고 카페 등등. 들를 만한 곳에 대한 정보들을 알려 줬다.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