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드래곤 (3)
영화 ‘사랑길’이 개봉 첫 주부터 흥행 가도를 달리는 동안, 나는 아이리스와 함께 이런저런 방송에 출연하면서 우리 영화에 대한 홍보에 매진했다.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 홍보를 위한 방송 활동도 같이 겸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영화에 관심을 보일 테니까 말이다.
열심히 촬영한 작품인데 사람들에게 관심도 못 받고 묻혀 버리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게 싫어서라도 나와 아이리스는 최대한 영화 홍보 활동에 스케줄을 집중시키기로 했다.
우리 둘이 자주 방송에 나가서 그런 걸까.
뜻하지 않은 프로그램에서 제안이 오게 되었다.
예전에 유행했던 가상 결혼 프로그램을 소재로 다룬 예능, ‘웨딩 라이프’.
이곳에서 나와 아이리스가 가상의 부부로 출연해 줬으면 하는 제안이 온 덕분에 이래저래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어차피 나와 아이리스의 소속사가 같으니까.
회의도 굳이 따로 할 필요 없이, 서로 시간을 맞춰서 같이 진행하기로 했다.
아이리스가 가장 먼저 의견을 비쳤다.
“저는 출연할래요.”
“이유는?”
“웨딩 라이프라는 프로그램, 요즘 시청률이 가장 잘 나오는 예능 프로 중에 하나잖아요. 시청률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나가는 게 좋죠. 그래야 홍보도 훨씬 잘될 테고요.”
물론 이미 영화 ‘사랑길’이 명작이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서, 우리가 홍보하지 않아도 알아서 영화는 등에 날개를 단 듯 계속해서 날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배우가 열심히 방송에 출연하면서 영화에 대한 것들을 대중에게 알리고 다니면, 그만큼 효과가 날 수밖에 없다.
그걸 생각해서 나는 이미 HTB, 솔로 가수 활동 기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리스는 가수가 아니라서 딱히 시즌, 비시즌으로 나눠 활동하는 건 아니니까 크게 상관은 없을 테고.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대표님만 정하시면 되겠네요.”
우리 HT 엔터테인먼트의 방침은 ‘아티스트의 의견을 중시하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HT의 대표이자 동시에 소속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내 의견도 비중 있게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결국은 출연하는 사람이 내가 될 테니까 말이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 그러자.”
아이리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진짜로 우리 둘이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키스까지 한 입장인데 뭐가 더 눈치가 보일까.
그리고 영화가 로맨스 장르다 보니, 우리가 이렇게 가상 커플로 활동하는 걸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많은 홍보 효과를 보일 것이다.
의사는 빠르게 결정되었으니.
이제 프로그램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살펴볼 차례다.
내용은 간단했다.
‘웨딩 라이프’ 제작진이 따로 마련한 숙소. 그쪽에서는 가상의 신혼집이라고 지칭하던데, 아무튼 그곳에 가서 1박 2일 동안 지내고 오면 된다.
특별히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없다.
그냥 둘이 알콩달콩 하룻밤을 지내는 것을 카메라에 담기만 하면 된다.
관찰 예능 콘셉트를 기본으로 깔고 가기 때문에 숙소 이곳저곳에는 수많은 카메라들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과 사적인 공간은 분리되어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이런 경계가 없다.
집이 곧 촬영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거는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가기로 결정을 내린 이상, 이제 와서 싫다고 의견을 뒤집기에는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승훈이 형이 펜을 들고서 수첩에 뭔가를 빠르게 적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촬영 시기는 내가 그쪽하고 이야기해서 조율해 볼게.”
“잘 부탁해, 형.”
“오케이. 걱정하지 마.”
우리 둘의 스케줄도 거기에 맞춰서 일정을 잡으면 될 것 같다.
이 프로그램 말고도 나와 아이리스가 같이 출연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이 아직 더 남았다.
프로그램 명단을 보던 아이리스의 매니저가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당분간 두 분, 정신이 하나도 없으시겠네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미 없어요.”
그렇게 된 지 오래다.
* * *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 팬들의 관심조차 사로잡기 시작한 ‘사랑길’.
덕분에 이전처럼 세계 각국의 영화 시상식에 우리 영화가 초청되는 일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저번에는 내가 개인적인 일이 많아서 잘 참여를 못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주연 역할로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웬만하면 오 감독과 같이 시상식에 꾸준히 참여를 해 볼 생각이다.
일단 계획은 이런데.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나 아이리스 같은 경우에는 헌터 일도 같이 병행하고 있으니까.
저번에 크라겔들이 갑자기 출몰했던 것처럼 몬스터들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면 우리도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출동해야 한다.
영화 시상식보다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세평 감독도 당연히 양해를 해 주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크라겔 이후로 몬스터들 소식이 없긴 한데.’
혼자서 조용히 와인 잔을 기울였다.
숙소에서 다시 내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덕분에 지금처럼 여유롭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숙소에 있을 때가 싫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도 가끔은 필요한 법 아니겠나.
앨범 활동 기간이 끝난 때를 이용해서 나는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나 자신만의 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난번처럼 니암과 딜런 그리고 준서, 이렇게 셋은 여전히 숙소에 남아서 다음 앨범 작업 준비에 들어가기 전까지 쉬면서 지내기로 했다.
데이브의 경우에는 나처럼 숙소를 나와서 아이리스와 같이 지내고 있는 중이다.
숙소 생활을 할 때에도 여동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녀석이니까.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TV를 돌리다 보니, 레이드 시대 때의 사건 사고를 집중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내가 출연한 다큐멘터리와는 별개의 프로그램이었기에 관심이 쏠렸다.
최초의 게이트가 열린 시점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게이트가 닫히기 전까지.
그 역사를 한눈에 보기 쉽게 쫙 정리해서 보여 줬다.
‘다큐 잘 만들었네.’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왠지 학교 수업을 듣는 거 같은 지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는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술술 듣기 좋게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 안주가 없었는데, 잘됐네.’
와인만 마시기에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 때, 마침 안주로 삼기 좋은 소재가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고 있어서 좋았다.
레이드 시대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꼭 언급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내가 레이드 시대의 시작을 알린 건 아니지만, 끝마무리를 지은 사람이었기에 엔딩은 항상 나의 활약이 차지했다.
[지금 보시는 영상이 바로 레이드 시대를 열었던 원흉, 드래곤입니다. 자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만, 드래곤이라는 존재 자체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하죠.]
드래곤에 대한 정보가 일반인들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은 이유는 헌터협회가 일부러 관련 자료들을 숨기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아직 협회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철민 소장과 연구원들도.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낸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녀석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서 어떻게 그런 강한 힘을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게이트를 열고 닫을 수 있는지.
모든 게 미스터리다.
드래곤 녀석하고 싸울 당시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검으로 녀석의 머리를 두 동강 내기 직전.
놈은 분명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게이트는 또다시 열리게 될 거라고.
그때는 녀석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 영상이 내가 잡은 드래곤의 뼈대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을 비췄다.
공룡의 화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녀석의 뼈들.
‘죽기 직전에 네 친구가 있다는 말은 왜 안 하고 뒈졌냐.’
차라리 그런 말이라도 남겼더라면, 드래곤이 한 마리 더 남아 있을 거라는 확신이라도 가졌을 텐데.
하여간 저놈의 드래곤 놈들이 문제다.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오늘따라 와인이 쓰다.
* * *
레이드 시대의 물건들이 이제 유물 취급을 받는 시기가 오게 되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아이템, 그리고 몬스터들의 사체를 박제해 전시해 놓은 박물관들이 여기저기에 늘어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의 눈에 이곳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내용물이 건물 한가운데에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는 게 보였다.
인류의 목숨을 담보로 최후의 전투에 나섰던 헌터, 강태오가 쓰러뜨린 최강의 존재.
드래곤.
그의 뼈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드래곤의 뼈마디 하나만 하더라도 억 단위는 기본으로 호가한다.
돈 많은 재벌들도 드래곤의 사체에 많은 욕심을 냈지만, 여기에 깃든 의미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서 일반 사람들에게 전시해 보여 주자는 쪽으로 의견을 통합하게 되었다.
레이드 시대 때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남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전시물이기도 했다.
오늘도 이곳 박물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드래곤의 흔적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인파 속에 존재를 숨긴 채 드래곤의 앞에 마주 서게 된 한 여성.
제이커와 같이 행동했던 그녀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드래곤을 바라보면서 작게 혼잣말을 흘렸다.
“오랜만이야, 친구.”
뼈만 남은 드래곤은 그녀의 반가운 인사에 대답이 없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여자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괜히 인사 한마디 정도는 건네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더니만. 결국 인간 녀석들한테 이렇게 호되게 당해 버렸네.”
여성의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서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그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 언젠가 인간들에게 되레 당하게 될 거라고 했지?”
이번에도 드래곤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여성은 마치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자업자득이지.”
여성이 가져온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아무튼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으라고. 네가 못 한 일, 내가 할 테니까.”
이내 여성은 그대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처음부터 이 공간에 없었던 존재처럼.